‘청년예술마을’은 국내 예술가 중에서도 대학생 또래가 많은 청년예술가의 작품활동에 주목합니다. 청년들은 마을 어디선가 그들만의 표현 방식을 통해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있어요. 이번 중대신문 문화면에서는 '시대정신'을 주제로 한 '얼룩말 공작소'의 단편영화를 감상해보았습니다. 똑똑, 문을 두드려보세요. 우리 옆집에 어떤 청년예술가가 살고 있을까요?

 

사진제공 얼룩말공작소
사진제공 얼룩말공작소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

젊은 날의 투쟁 헛되지 않으리

 

관악구 신림동에서 32년째 인문사회과학 서점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장소가 있다.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1980년대 후반에 문을 연 책방 ‘그날이 오면’이다. 당시 서점은 단순히 책을 파는 장소가 아니었다. 서점을 매개로 사람들이 모이고 세상을 논하는 공론장이기도 했다.

  군사독재 아래 정권의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이 더해가던 1987년, 꽃다운 나이의 두 학생이 희생됐다. 불법 체포된 서울대 박종철 학생은 경찰의 물고문으로, 교문 앞 시위에 참여한 연세대 이한열 학생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다. 민주화를 꿈꾸던 두 열사의 죽음은 6월 민주항쟁의 불씨를 지폈다.

  지난 2010년 말 단기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영상, 아트전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온 청년창작집단 ‘얼룩말 공작소’는 단편영화 <시대정신>에 정권의 불합리성에 맞선 1987년 당시 학생사회를 담아냈다. 해당 작품을 연출한 송준호 감독은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던 평범한 학생들의 이야기를 조명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당시의 시대정신이 특정 민주화운동 세력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노력과 헌신을 작품에 담아내고 싶었죠.”

 

 

   뜨거웠던 그해의 추억

  1989년 여름, 인문대 학생회 임원이었던 학생들이 서울대를 졸업하고 사회인의 신분으로 서점에 모여 뜨거웠던 학창시절을 추억한다. “괜찮은 놈이었어.” “아주 황소고집이었지.” 그들이 이야기하는 대상은 박종열이다. 박종열은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이름을 합친 극 중 배역으로 1987년 이후로 볼 수 없게 된 친구에 해당한다. 그런데 종열을 두고 학생들의 진술이 조금씩 엇갈린다. 송준호 감독은 개인마다 박종열의 존재를 다르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친구들의 기억이 엇갈리는 이유는 각자의 방식으로 종열을 추억하기 때문이죠.”

  4·19혁명 17주년 기념 교문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피가로 호프’에 모인 학생들. 학생운동권 내에서 해당 투쟁을 야당에 힘을 실어주는 도구로 사용할지, 더 큰 운동의 발화점으로 삼을지를 주제로 대립한다. 종열은 학생운동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할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지만 다른 임원들은 학생들이 단결해서 야당을 지지하자는 의견에 수긍한다. 결국 종열은 다수의 의견에 타협해 함께 교문투쟁을 준비한다. 그러나 결전의 날에 종열이 갑자기 사라지고는 돌아오지 않는다. 해당 장면에서 종열에게 정권에 의한 부당한 사고가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민주항쟁 이후 직선제 개헌을 보여주는 실제 자료화면이 제시되며 친구들의 후회와 미안함이 섞인 멘트가 이어진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종열이가 다 봤어야 하는데.” 송준호 감독은 허구의 시나리오와 실제 자료를 사용한 다큐멘터리를 혼합해 작품을 구성했다고 설명한다. “비록 극 중 인물과 사건은 허구지만 뿌리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뒀어요. 현재까지 남아있는 장소인 서점 ‘그날이 오면’과 술집 ‘피가로 호프’도 마찬가지예요. 해당 장소에서 당시의 시대정신을 말함으로써 살아있는 민주화 정신을 전달하고자 했죠.” 이어 과거 사진자료와 현재 시점 인물들의 인터뷰가 교차하며 장면이 전환된다.

 

 

  시대정신은 얼굴이 없다

  1989년으로 돌아온 인물들은 각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한때 학생운동으로 뭉쳤던 이들은 이제 각자 자신의 방향성을 갖고 나아간다. 누군가는 사회를 바꾸고자 도전한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누군가는 시골 국민학교에서 일한다.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공단에 들어간 인물도 있다. 그렇게 각자의 위치에서 시대정신을 실현하며 살아가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종열이 사라지기 하루 전 종열과 그를 좋아했던 인물인 영희가 함께 등장한다. 영희는 종열에게 시집을 선물로 건네며 수줍게 웃음 짓고 종열은 영희에게 “내일 교투(교문투쟁)에서 봐”라며 인사한다. 화면은 종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영희를 비춘다. 이때 카메라가 비춘 영희는 대학생이 아닌 2년 후 공단에 들어가 근무복을 입은 모습이다.

  송준호 감독은 과거에 풀지 못했던 인물들의 마음을, 시공간을 초월한 영희의 모습에 투영해 환상적인 장면으로 연출했다고 말한다. “해당 장면은 인물들이 종열과 과거에 풀지 못했던 감정, 오해에 대한 미안함을 의미해요. 환상의 장면을 통해서나마 당시에는 해소하지 못했던 인물들의 마음을 대변하고자 한 거죠.”

  극 중 종열은 작품의 서사를 전개하는 주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송준호 감독은 민주화 정신을 특정 인물에게 한정하지 않기 위해 의도한 장치라고 설명한다. “특정인뿐만 아니라 불의에 맞선 수많은 이들이 있었기에 민주화를 일궈낼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박종열 배역의 얼굴을 화면에 등장시키지 않았어요. 해당 배역은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일 뿐 당시 투쟁했던 모두가 주인공이자 시대정신이기 때문이죠.”

  시대정신은 비단 1987년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작품에서 진술을 이어간 모두가 시대정신의 일원이며 우리는 각자의 시대정신이다. 극 중 사회인이 된 등장인물들이 다시 모인 장소는 서점 ‘그날이 오면’이다. 과거 학생운동의 운명을 함께했던 이곳 역시 현재까지도 인문사회과학 서점을 고집하며 변함없는 꿈을 간직해오고 있다. 세월이 무색하게 그만의 정신을 꿋꿋이 지켜온 서점처럼 어떤 시대에도 우리는 ‘그날’이 오길 바랐고 바라고 있으며 또 바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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