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직접 보고 듣지 않아도 매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발로 뛰는 사람을 언론인이라 한다. 여기 수많은 언론인 중에서도 매일 자신의 허들을 설정하고 허들을 높여 가는 언론인이 있다. 아나운서에서 기자로 기자에서 시사 콘텐츠를 제작하는 언론인이 되기 위해 프리랜서 선언까지.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열정이 몸에 밴 박새암 동문(중어학과 01학번)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일을 향한 사랑을 열정으로 보여주는

자신의 장벽을 끊임없이 넘으며

오피니언 리더가 되는 날까지


박나래의 인텔리 버전과 손석희의 예능 버전을 목표로 나아간다는 박새암 동문. 그에겐 다양한 색깔의 스펙트럼이 존재했다. 재치 있는 입담으로 함께 있는 이를 편안하게 만들지만 일 이야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카리스마와 강단을 뿜어냈다. 방대한 정보의 흐름 속에서 진실한 이야기를 전하는 오피니언 리더가 되기 위해 그는 오늘도 책장을 넘긴다.

  -아나운서로 처음 방송을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꿈이 아나운서였는지.

  “어렸을 때는 막연하게 오피니언 리더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올바른 가치관으로 의견을 피력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제 미래 모습을 종종 머릿속으로 그렸죠. 오피니언 리더를 꿈꾸며 중학생 때 신문 독자 투고란에 글을 써서 보내기도 했답니다.”

  -독자 투고란에 글을 쓰다니 떡잎부터 남달랐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개학 첫날, 선생님이 발표할 사람 있냐고 물으면 손을 드는 학생이 거의 없잖아요. 그럴 때 제일 먼저 손을 드는 겁 없는 학생이었어요. 또 친구들 앞에서 이야기하기를 즐겼죠. 무엇보다도 쉬는 시간에 제 이야기를 듣고 웃는 친구들의 모습을 좋아했어요. 자연스레 학교 행사에서 사회를 보며 사회자 자리에 욕심이 생기기도 했어요. EBS ‘터놓고 말해요’라는 토론 프로그램에 나가게 됐는데 프로그램 관계자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던 경험이 결정적이었어요. 제 논리력이 타인에게 칭찬을 많이 받겠다고 느낀 계기이기 때문이에요. 많은 사람 앞에 서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했죠. 하지만 그 수단을 특정하지 않았어요. 방송인 혹은 교수 모두 오피니언 리더가 될 수 있으니까 말이죠.”

  -중앙대 재학 당시에도 활발한 학생이었나.

  “학교는 사회에 나가기 전 학생들이 모여서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장을 제공하는 가장 관대한 곳이잖아요. 사람을 좋아하고 흥이 많아 치어리더 동아리와 중국어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했어요. 중국어 연극 동아리에서는 주인공을 도맡았죠. 성인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기회를 얻어 활발하게 활동한 동아리들이랍니다. 친구들끼리 모여 추억을 회상할 때 자주 등장하는 재미있는 소재이기도 해요.”

  -같은 울타리에 속했던 대학 후배들에게는 큰 동질감을 느끼겠다.

  “후배들에게는 동네 고향 친구와 같은 묘한 동질감과 전우애, 동료애, 형제애, 가족애를 전부 느껴요. 사회에 나왔을 때는 특히 더 그래요. 중앙대 후배라고 하면 밥 한번 사줄 거 두 번 사주고 싶고, 커피 하나 사줄 때 와플 하나 더 사주고 싶을 정도예요. 계속 도와주고픈 마음도 들죠.”

  -본인도 중앙대 선배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나.

  “91세 만학도 할아버지가 본인의 강연에서 ‘절대 포기하지 말아라. 포기하지 않으면 널 도와주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사회에서는 절대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어요. 기본적으로 개인의 능력과 인성이 바탕이 된다는 전제하에 많은 사람이 서로 도와야 성취할 수 있죠. 제가 지금까지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이유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도와줬기 때문이에요. 과분한 사랑과 도움을 받았죠. 그렇기에 선배들한테 받은 사랑을 후배들한테 베푸는 선배가 되려 해요.”

  -앞서 장래 직업을 특정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아나운서에 도전하게 된 계기가 있나.

  “아주 우연한 계기였어요. 대학교 3, 4학년은 구체적인 진로를 향해 준비해나가는 친구들이 주위에 생기는 시기잖아요. 그 당시 또래 친구들이 대거 머리를 짧게 자르고 아나운서처럼 옷을 입으며 방송 아카데미에 등록하기 시작했어요. TV가 유일한 매체였던 시절에 아나운서는 하늘의 별 따기 수준으로 되기 힘들면서도 인기가 많은 직업이었답니다. 인기가 많은 직업인 만큼 많은 제 친구들이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도전장을 내밀었죠.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방송에서 그 누구보다 재미있게 놀 수 있을 것 같아’라는 생각에 저도 학원에 등록했어요. 사실 정치외교학을 복수전공한 저는 정치외교학 공부를 위해 유학을 가려 했었어요. 하지만 학원에 가면 방송에서 어떻게 노는지 알려준다는 말에 이끌렸어요.(웃음) 발걸음이 학원으로 향했답니다. 그때부터 아나운서에 도전하게 됐어요.”

  -꿈꾸던 아나운서 생활은 실제로 재밌었는지.

  “재미와는 거리가 멀었어요. 매일같이 울었거든요. 발표에 있어서 늘 1등이고 주눅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제가 방송국에서는 못하는 사람 축에 속했기 때문이었어요. 너무 괴롭고 혼란스러웠죠. 좌절 그 자체였답니다. PD들이 안쓰럽다고 저를 달래서 보내던 나날들이었어요.”

  -어떤 노력으로 상황을 전환했는가.

  “각 방송국에서 롤모델을 한 사람씩 정했어요. 그리고는 롤모델이 방송에서 한 말들을 받아 적기 시작했죠. 기침, 숨소리, 농담 하나하나 그대로 수첩에 적고 따라 했답니다. ‘지금은 미약하지만 나중에 메인 앵커가 됐을 때의 내 모습은 창대할 거야’라는 생각으로 노력했어요.”

  -롤모델이 누구였는지.

  “당시 한국경제 TV 강기수 앵커, MBC 시선 집중의 손석희 앵커, 8시 뉴스의 박혜진 아나운서가 롤모델이었어요. 박혜진 아나운서에게는 호소력 있는 발성을 강기수 앵커에게는 재치를 손석희 앵커에게는 특유의 촌철살인 질문 요령을 배웠답니다. ‘너는 너무 웃지 않고 딱딱하며 말투가 강해.’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어요. 앵커가 되고 나서 제 단점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오히려 빛을 발하기 시작했죠. 딱딱한 말투는 카리스마를, 강한 이미지는 신뢰와 무게감을 시청자에게 줬다고 생각해요. 미운 오리 새끼가 제법이라며 저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죠.(웃음) 경제방송에서 이렇게 성과가 있던 앵커는 없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답니다.”

사진제공 박새암 언론인
사진제공 박새암 언론인

  -인정을 받고 있음에도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기자로 전직한 이유는.

  “아나운서는 쓰인 글을 얼마나 잘 전달하느냐가 업무의 주목적이에요. 직접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죠. 반면 기자는 직접 취재해서 콘텐츠를 전하는 사람이잖아요. 중학생 시절 독자 투고란에 글을 썼듯이 제 의견을 전하는 사람이 더욱 되고 싶었어요.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기자라는 사실을 깨달았죠. 현장 경험을 가진 기자가 돼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을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전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결국 기자라는 새로운 꿈을 품고 전직했답니다.”

  -경제 분야에서 북한 전문 기자까지 전문 지식이 필요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아나운서로 경제 방송을 하다가 경력직 기자로 전직하면서 경제가 제 전문 분야가 됐죠. 하지만 경제 분야에 그치지 않고 제 영역을 넓히고 싶어 관심 분야인 정치·외교를 살리는 공부를 시작했어요. 경제와 북한을 접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석사 학위 논문으로 북한 경제에 관한 논문을 쓰기도 했죠. 제 전문분야를 가지고 싶어 시작한 북한 공부가 지금 박사 과정 공부에 이르기까지 이끌어줬답니다.”

  -최근엔 언론인으로서 프리랜서 선언을 하기도 했다고.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회사에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꿈을 다 펼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취재를 바탕으로 제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 더 늦기 전에 프리랜서 선언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렇지 않았을 때 좋은 직장에서 그냥 안주하며 생활하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에요. TV 뉴스가 아니어도 많은 사람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는 시대에서 국한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마음껏 펼치고 싶었답니다.”

  -궁극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언론인이 되고 싶은지.

  “시사 이슈를 재미있는 콘텐츠로 전하는 언론인이 되고 싶어요. 예능인이 시사프로그램을 재미있게 이끄는 모습은 종종 보이잖아요. 하지만 시사에 대해 전문적인 교수나 기자 또는 시사 평론가가 진행자로서 재미있게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습은 잘 볼 수 없어요. 제가 끊임없이 공부하는 이유는 앞서 말한 목표를 위해서예요. 박사 학위를 따게 된다면 ‘박사이자 전직  기자가 시사 이슈를 재미있게 풀어감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웃음)”

  당신에게 중앙대

  “디딤돌이에요. 정글 같은 사회에서 너무 무섭고 외로울 때 마지막으로 찾게 되는 곳이 학교예요. 개교 100주년 기념식에서 사회를 봤던 경험은 저에게 새로운 디딤돌이 될 수 있었어요.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다가 부족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대학 은사를 찾아가기도 했죠. 석사 과정 공부를 해보라는 조언을 받고 중앙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았어요. 힘들 때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중앙대는 디딤돌 같은 존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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