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밥 한번 먹어요.” 친하지 않은 사이에서 자주 하는 말이죠. 정말 밥이 먹고 싶을 수도 있지만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번학기 여론부에서는 한학기 동안 매주 다른 중앙대 유명인사와 ‘밥 약속(밥약)’을 잡고 함께 식사할 예정입니다. 이번주 밥약의 주인공은 203관(서라벌홀)에서 ‘중앙대 구내 구둣방’을 운영하는 이무웅씨(79)입니다. 교내 상가 주인 중 가장 오랜 기간을 일해 온 그와 친해지는 시간을 가져보시죠.

사진 정준희 기자
사진 정준희 기자


성취감 위해 일하는 구두장이
마음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장인 정신으로 가득 찬 이곳에서는 주인장의 손길 한번이면 물건이 뚝딱 고쳐진다. 구두를 비롯해 벨트, 지갑 등 가죽 제품 수선은 물론이고 열쇠 복사도 가능하다. 이번주는 서라벌홀 1층에서 중앙대 구내 구둣방을 운영하는 이무웅씨와 밥약을 잡았다. 38년째 중앙대에서 꿋꿋이 ‘한우물’만 파고 있는 그와 한끼 식사를 같이하며 이야기를 나눠봤다.

  돌고 돌아 구두에 정착

  서라벌홀 1층에는 여러 개의 상가가 모여 있다. 가장 깊숙이 들어가면 항상 문을 열어놓은 채 손님을 반기는 구둣방이 있다. 학내 상가 임차인 중 가장 오랫동안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구둣방 사장 이무웅씨와 지난달 30일 수요일 저녁 식사 한끼를 함께했다.

  가게로 들어서기 전부터 시끄러운 쇳소리가 귀를 울렸다. 조심스레 문턱을 넘자 손님이 맡기고 간 여러 종류의 구두와 함께 벽에 걸린 열쇠 꾸러미가 이목을 끌었다. 그 앞에는 자신이 직접 만든 공구를 손에 움켜쥔 채 일에 몰두하고 있는 이무웅씨의 모습이 보였다.

  열쇠 복사를 마친 그와 본격적인 인터뷰를 진행했다. 구두 수선 일을 시작한 계기부터 들어봤다. “대학을 졸업한 후 여러 차례 직장을 옮겨 다녔어요. 목공소, 국방부 조달본부, 화학 회사 등 다양한 곳에서 근무했죠. 한곳에 오래 머무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그렇게 직장을 옮겨 다니던 도중 이전 회사로의 복직을 계획했어요. 그래서 다니던 곳을 그만뒀는데 갑자기 상황이 여의치 않아져 복직이 힘들어졌죠. 살길이 막막해져 결국 40대에 들어서는 공사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를 하게 됐어요.”

  구두와의 인연은 공사 현장에서 우연히 듣던 라디오 방송에서 시작됐다. 라디오에서 구두 기술자의 삶을 다루는 인터뷰가 흘러나왔다. 이무웅씨는 방송을 접한 즉시 구두 수선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곧바로 방송국을 찾아가 프로그램 담당 PD에게 출연자 연락처를 받아냈어요. 기술을 전수받으려고 말이죠.(웃음) 그런데 막상 기술자를 찾아가니까 단칼에 거절당했어요. 당신은 구두장이 인상이 아니니까 일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 썩 가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었다. 일주일 내내 기술자를 졸졸 따라다니며 괴롭힌 끝에 결국 구두 기술을 연마할 수 있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식사를 위해 정문 근처로 향했다. 이동하는 중 노영돈 학생처장(독일어문학전공 교수)을 마주쳤다. 이무웅씨는 “잘 지내시죠?”라며 반갑게 악수를 건넸다.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웃음) 워낙 오랜 시간을 일해 왔으니까요.”

  이번주 메뉴는 그가 자주 먹는 해물 순두부찌개다. 가게를 오래 비울 수 없어 캠퍼스 안 순두부찌개 식당을 즐겨 찾는다. 이무웅씨는 자신의 단골집에 온 만큼 제대로 먹는 법을 선보였다. “돌솥 채로 나오는 밥을 전부 퍼내고 거기에 뜨거운 물을 부어보세요. 그럼 식사를 마치고 입가심으로 고소한 숭늉을 마실 수 있죠.” 한끼 식사에도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에서 그만의 장인 정신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기다림 끝에 주문한 해물 순두부찌개 두 그릇이 나왔다. 뚝배기에 담긴 새우 껍질을 벗기며 못다 한 인터뷰를 이어갔다. “기술을 터득한 후 장사할 자리를 찾으러 다녔어요. 대학 안에 있는 구둣방이 장사가 잘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밤낮으로 여러 대학을 돌아다닌 끝에 당시 구둣방이 없었던 중앙대를 ‘찜’했죠.”

  이무웅씨가 구두를 다룰 수 있었던 건 끈질김 덕분이었다. 중앙대에 가게를 차린 것도 근성이 한몫했다. “처음에는 학교에 어떻게 자리를 잡아야 할지 참 막막했어요. 그래서 일단 방호실을 찾아갔죠. 구둣방은 학교에 필요 없다며 무조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석달 동안 매일같이 중앙대를 찾았다. 결국 학교 관계자를 만나 101관(영신관) 뒤쪽으로 조그마한 가게를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번 마음먹었으면 실행에 옮겨야죠.”

  우물 하나만 파며

  그는 삶 전반에 걸쳐 누구보다 끈질겼지만 한곳에 정착하는 건 어려워했다. 그런데 중앙대에서는 어떻게 38년간 쭉 머물 수 있었을까. 이무웅씨는 그 이유가 바로 중앙대 학생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1980~90년대에는 가게에 아르바이트 학생을 고용했어요. 그중에서 아버지를 일찍 여읜 학생이 있었죠. 관계가 몹시 돈독해져 결국 양아들로 삼았어요.”

  10년 넘는 세월 동안 고용한 학생은 모두 15명이다. 그 학생들과 모임을 만들어 아직까지도 정기적으로 만난다. 모임 이름은 그의 성격과 꼭 닮은 단어, ‘한우물’이다. “한달에 한번씩 모이고 있어요. 모임에서 알콩달콩 연애를 시작해 결혼까지 골인한 학생도 있죠. 결혼식 주례를 제가 봐줬답니다.(웃음)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이무웅씨는 한우물 학생들과 몹시 막역한 사이다. 가게에 설치된 TV뿐 아니라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핸드폰과 자동차까지 전부 학생들이 선물해줬다. “졸업 후 취업에 성공한 학생들이 출근할 때 입겠다고 우리 집에서 제 양복이고 구두고 전부 가져갔어요. 예전에 그랬으니까 이제 갚아줘야죠.(웃음)”

  그는 한우물 학생들과 함께 불우이웃을 돕기도 했다. “명절이 되면 돈을 모아 일찍 부모를 여읜 아이들을 찾아갔어요. 그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쌀, 연탄, 학비를 지원해줬죠.”

  그렇게 중앙대 정착에 성공한 그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지금까지 장인 정신을 가진 채 구둣방 운영을 이어가고 있다. “종종 형편없이 닳아버린 구두를 수선해달라는 문의가 들어와요. 그럼 ‘이걸 내 손으로 아름답게 고쳐보겠다’는 생각으로 도전하죠. 결과가 좋으면 성취감이 엄청나요. ‘장이’는 돈이 아닌 성취감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식사를 마치고 뚝배기 속 따뜻한 숭늉을 마시며 앞으로의 구둣방 운영 계획을 들었다. “5~6년 정도 중앙대에서 더 일할 생각이에요. 나이가 있다 보니 이제는 체력적으로 많이 지쳐요. 그런데 힘들다고 집에만 누워 있으면 건강에 안 좋잖아요. 힘이 닿는 데까지 열심히 해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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