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신문에 들어가게 됐다는 기자에게 학과 동기들은 “요즘 누가 신문을 읽냐”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돌이켜 보니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310관 1층 배부대가 완전히 빈 적은 없었습니다. 소속감 때문인지 동기들의 말에 속상하기도,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의문이 들었습니다. 항상 남는 신문을 위해서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일이 효율적인지에 대해서 말이죠. 하지만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취재과정에서 신문은 여전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대학보도부 정기자로서 처음 만났던 취재원은 디지털이미징전공 학생이었습니다. 전공이 없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안했을 학생들에게 학교는 충분한 조력자가 돼주지 못했습니다. 개설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강의가 폐강됐기 때문입니다. 학교가 디지털이미징전공이 없어질 당시 전공생의 학습권을 끝까지 보장하겠다는 말을 지키지 않은 셈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편을 겪고 있던 학생은 기사를 통해 문서화된 공식적 자료가 생기길 원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단 한명의 학생이 남더라도 그 학생의 수업권이 당연하게 보장되길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장애인권위원회(장인위) 설립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취재하는 도중 해당 부스에서 중대신문 기사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개강호에 실렸던 ‘공간문제로 인한 장인위 무산’ 기사였습니다. 기사를 비치한 이유를 물었더니 장애학생회가 처한 상황을 알 수 있는 공식 자료라고 생각해 참고용으로 뒀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기사가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자료였습니다.

  이후 학교는 디지털이미징전공생들의 입장을 더 세심하게 배려하기로 했습니다. 전공생이 얼마 남지 않은 점을 고려해 추가적인 강의 개설이 이뤄졌습니다. 소통 부족 문제를 인지한 학교는 지난주 간담회를 열기도 했죠. 장인위 설립 서명운동도 성공적으로 끝나 지난 10월 전체학생대표자회의에서 해당 안건이 가결됐습니다.

  다섯번의 신문을 발행하며 생각해봤습니다. 누구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신문이지만 여전히 신문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신문이 직접 문제를 해결하진 않았으나 그 과정에 있었다는 사실이 뿌듯했습니다. 자칫 묻혀 버릴 뻔했던 일을 알렸다는 점이 뜻 깊었죠. 덕분에 배부대에 남겨진 신문에 느꼈던 속상함을 조금이나마 지울 수 있었습니다.

  예술조차도 민중을 위해 만들어져야 한다고 했던 빅토르 위고는 인간 최고의 의무가 타인을 기억하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기자는 신문을 통해 많지는 않았으나 몇명의 ‘누군가’를 기억했습니다. 그 기억은 아마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어떤 기억들은 그들에게 꾸준히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산됐던 안건이 가결되고 바뀌지 않던 상황이 변했던 경험처럼 말이죠. 따라서 누구나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신문이 여전히 존재했으면 합니다. 기자는 그 ‘누구나’를 위해 학내구성원이 하고픈 얘기를 더 많이 보고, 듣고, 읽고, 나누는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