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래 선을 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데.”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이다. 극 중 성공한 사업가 박 사장은 버릇처럼 말한다. 점잖은 모습으로 호의를 베푸는 것도 잠시, 자신이 고용한 사람들이 경계를 범할 때마다 미간을 찌푸린다. 각자 정해진 위치에 남기를 강조한다. 기생충은 기생충에 머물러야 하고, 숙주와 대등하게 굴면 안 된다. 위아래의 명확한 구분 가운데, 제한된 자유를 보장한다. 기득권은 그렇게 유지된다.

  지난달 26일, ‘리더스 포럼’이 열렸다. 나는 마이크를 건네받아 미리 작성한 메모를 읽었다. “김창수 총장님께서 생각하시는 민주적인 총장 선임 절차에 대해 질문을 드립니다. 내년 상반기 총장님의 임기가 종료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중략) 중앙대학교에서도 총장 직선제와 관련한 학내구성원의 여론이 형성된다면, 이와 같은 선임 절차가 마련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솔직한 답변이 돌아오길 기대했다.

  하지만 총장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해당 질문이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오히려 내리찍듯 한마디 보탰다. “따로 찾아오면 답변할게요.” 학생대표자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그렇게 내놓고 무시할 수 있을까. 나는 면전에서 당한 모욕에 울분이 치밀었다. 이후 단체 사진 촬영을 위해 무대에 오르자, 총장은 먼저 악수를 권했다. 다른 대표자들과 뵙겠다고 말했더니, 개별적으로 방문할 것을 거듭 주문했다.

  총장은 학생대표자에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경고했다. 일방적인 금기가 설정된 이상 그 대화는 더 이상 소통이라 부르기 어렵다. 그저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질문의 적합성을 가르는 총장의 답변이 도리어 그 행사에 적합하지 않았다. 공개적인 입장 표명을 주저하는 이상으로 학생대표자를 특별히 불러냈다. 일련의 언사는 총장과 학생대표자 사이에 살아있는 위계와 그에 따른 성역을 다시 확인 시켜 줄 뿐이었다.

  이번 학기, 총장은 중대신문과 인터뷰했다. “전반적으로 구성원들의 참여 의식이 낮은 편이다.” “구성원들의 참여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총장이 내세운 참여는 들러리 역할에 지나지 않는가. 현재 법인이 총장을 임명하는 방식은 구성원의 참여를 충분히 보장하는가.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구성원을 주체로서 존중할 의향은 없는가. 미처 듣지 못한 이야기를 위해 재차 묻는다. 그 견고한 선을 허물길 청한다.

  그리고 지면을 빌려 여타 학생대표자들에게 호소한다. 학생대표자는 총장 선임 절차를 비롯한 학교 운영 전반을 논의할 수 있다. 졸업하는 데 한자 성적이 요구되는 까닭을 의심할 수 있다. 부디 총장이 멋대로 정한 안전한 범위 안에서 상상력을 가두지 않길 바란다. 또한 그날 내가 경험한 모욕이 나만의 것이 아니길 바라며, 앞으로 선출될 학생대표자 모두 저 자신이 대표하는 누군가를 위해 자존심 세울 수 있길 바란다.

 

이상민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학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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