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이미지의 기록
아케이드로 자본주의를 보다

 

류신 교수가 발터 벤야민의 일생을 설명하고 있다
류신 교수가 발터 벤야민의 일생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김정훈 기자

 

온 도시를 돌아다니며 자본주의를 연구한 사람이 있다. 발터 벤야민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을 사소한 일상에서 찾았다. 그가 바라본 거리는 자본주의 기제를 읽는 새로운 지평이다.

 지난 27일 302관(대학원) 301호에서 제208회 중앙게르마니아가 열렸다. 이번 강연은 벤야민의 유고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주제로 류신 교수(독일어문학전공)가 강연했다. 강연은 벤야민의 일생, 글체, 사상 등의 내용으로 구성됐다. 류신 교수는 벤야민이 머물렀던 다섯 도시를 배경으로 강연을 펼쳤다.

포르부, 자유가 가로막힌 항구

 포르부는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 근처에 있는 항구도시다. 벤야민은 이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현재 포르부에는 그의 무덤이 자리해 있다. 훗날 건축가 대니 카라반은 벤야민을 기리기 위해 <통로(Passages)>를 제작했다. 이 구조물은 벤야민의 무덤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물길 모양이다. 길의 끝엔 바다가 있지만 유리로 막혀 있다. 바다는 자유를 상징한다. 벤야민은 끝내 그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벤야민은 독일 출생 유대인으로 나치의 탄압을 받아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1940년 나치가 프랑스까지 점령하자 그는 미국 망명을 결심했고 배를 타기 위해 포르부로 갔다. 그러나 그는 포르부 세관에 걸려 발이 묶였다. 좌절감을 느낀 그는 결국 모르핀을 다량 투여해 죽음을 택했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벤야민이 살아생전 쓴 책이 아니다. 그는 사망하기 15년 전부터 여러 도시를 거닐며 자료를 수집했고 집필을 준비해왔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책은 마감되지 못한 채 남겨졌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그가 죽은 후 42년이 지나서야 롤프 티데만이 벤야민의 원고를 편집해 출간한 책이다. 책의 이름은 아케이드를 향한 벤야민의 관심을 반영해 붙여졌다.

출발점은 베를린과 나폴리

 아케이드는 일종의 통로다. 오늘날 상가에서 주로 보이는 건축양식이다. 벤야민은 실용성을 가진 철과 공개성을 지닌 유리의 조합이라는 점에서 아케이드에 매력을 느꼈다. 이러한 아케이드를 향한 그의 관심은 베를린과 나폴리에서 시작됐다.

 벤야민은 베를린의 한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미술품을 거래하는 상인이었다. 유년시절 그의 집 근처에는 로지아 형태의 건물이 있었다. 로지아는 아케이드의 전신으로 건물 1층이 광장을 향해 공개된 실내와 실외의 점이지대다. 그는 로지아를 산책하면서 아케이드 구조를 처음 접하게 된다.

 이후 32세가 된 벤야민은 교수자격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나폴리로 떠났다. 나폴리의 집은 그가 태어난 베를린과 달랐다. 기후가 온화해 사람들이 창문을 열어둬 실내가 보였기 때문이다. 커튼으로 집 외부와 내부를 차단하는 북유럽과는 다른 생활양식이었다. 그는 “나폴리는 낮과 밤, 소음과 평화, 거리와 집이 상호 침투한다”고 말했다. 

 벤야민에게 베를린과 나폴리는 사유이미지의 실험장이었다. 사유이미지란 사유를 스냅 이미지로 포착해 보존하는 방식이다. 그는 도시를 거닐며 사유이미지를 통해 아케이드를 분석했다. 이를 통해 아케이드가 비가 내려도 산책과 쇼핑을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됐음을 알게 된다. 거리를 실내화한 구조의 아케이드는 이후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모스크바에서 본 아케이드의 몰락

 벤야민은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나폴리를 떠나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괴테 항목을 집필하기 위해 러시아 모스크바로 향했다. 모스크바는 인류최초로 사회주의가 실현된 도시다. 그의 모스크바 일기에는 “전차는 다른 곳에 서고 상점은 식당이 되고 식당은 다시 사무실이 된다”고 적혀 있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도시가 다시 건설되는 한편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아케이드는 쇠락하는 모습을 마주한다.

 러시아에 남은 자본주의 산물은 모스크바 국영 백화점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설립되기 전 차르 체제하의 모스크바 국영 백화점은 사치품이 즐비한 아케이드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로 인해 기존 체제가 붕괴하면서 화려하던 국영 백화점은 몰락했다. 이때 벤야민은 국영 백화점을 보며 아케이드의 우울한 이면을 발견한다. 

눈부신 파리의 판타스마고리아

 1933년 벤야민이 나치를 피해 망명한 프랑스 파리의 아케이드는 사치품 거래의 중심지였다. 그는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초안인 『파리-19세기의 수도』에서 아케이드를 “상품자본주의의 원조 신전”이라 설명했다. 파리의 아케이드 내 상점에서는 상품 옆에 가스등을 두어 상품을 돋보이게 했다. 조명과 대리석으로 인해 빛나는 상품은 마치 미술품처럼 보였다.

 벤야민은 이처럼 상품 진열을 아름답게 하는 장치를 ‘판타스마고리아’라 칭했다. 그가 말한 판타스마고리아는 환상을 뜻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물건을 사고 싶게 만들지만 돈이 없어 물건을 사지 못하고 아케이드를 나올 때는 허무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물건을 구경하러 아케이드에 들어간다. 그는 여기서 인간의 페티시즘에 가까운 물욕을 발견했는데 이 물욕 역시 자본주의가 만든 판타스마고리아다.

 판타스마고리아는 물욕을 부추겨 시민을 정치권력과 멀어지게 만든다. 벤야민은 프랑스의 아케이드가 왕정과 혁명이 반복되는 반동기에 기획됐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1852년은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하는 제2제정 반동기였다. 당시 독재정권의 도시설계자 조르주 외젠 오스만은 파리를 가로지르는 일직선 도로를 뚫고 뒷골목을 없애 아케이드를 여럿 만들었다. 샹젤리제가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쇼핑대로다. 이를 보며 벤야민은 아케이드가 정치 억압을 숨기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판단했다.

 허나 허상에 도취된 세계일지라도 각성의 계기는 있다. 당시 오스만은 도로에 바리게이트를 칠 수 없도록 설계해 민중이 소규모로 시가전을 벌일 수가 없게 막았다. 그러나 프랑스 민중은 파리코뮌이라는 대규모 방위군을 결성해 파리에 바리게이트를 세워 항전했다. 파리코뮌 사례를 보며 벤야민은 판타스마고리아를 극복할 가능성을 발견했다.

모든 거리를 유리지붕으로
덮으려 한다고 들었어
그럼 아름다운 온실이 되겠지
우린 그 안에서 멜론처럼 살거야

아직 끝나지 않은 무대

 벤야민은 판타스마고리아 각성법을 연구하는 데 인생 후반부를 바쳤다. 그가 연구에 이토록 몰두한 이유는 본인 역시 나치즘이라는 판타스마고리아의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치즘은 끝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그는 친구인 게르숌 숄렘에게 “이 책은 정말이지 내 모든 투쟁과 생각의 무대라네”라는 편지를 보냈다.
벤야민의 생은 끝났지만 그의 무대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류신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영원히 반복될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한다. 오늘날 우리는 파리코뮌을 넘어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지금 만연한 자본주의 세태에 끝없는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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