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비평 부문 당선: 전명환 학생(국어국문학과 4)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 치킨」 

―영화 <극한직업>의 흥행을 통해 보는 문화가 보급되는 방식―

 

  1.

  치킨에 관련된 밈(meme)이 몇 년째 생산되고 있는 걸 보면 치킨이 아니라 치킨의 저변이 유행하는 것 같다. 언제부턴가 치킨은 우리 삶에 자리를 잡아 한국인의 ‘소울 푸드’라는 호칭까지 얻게 되었다. 배달 문화가 너무 익숙해진 탓일까. 범국민적인 볼거리가 생기면 다들 맥주와 치킨을 꺼내들고, 길거리에는 택시 다음으로 배달 오토바이가 많다. 치킨 브랜드들은 끝없이 나열할 수 있고 고급 브랜드부터 로컬 브랜드까지 다양한 메뉴를 거느리고 있다. 심지어 인터넷에서는 이러한 말도 돌아다녔다. “1, 2, 3등급은 치킨을 시키고 4, 5, 6등급은 치킨을 튀기고, 7, 8, 9등급은 치킨을 배달한다.” 이런 천박한 유행어 속에서도 모든 계급이 치킨에 얽혀 있다는 것, 심지어 지금 와서는 너나 할 것 없이 자영업에 뛰어든다는 걸 생각하면 이 현상은 괴이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치킨에 중독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른바 ‘치느님’이라는 말이 유행했을 때는 조금 과장해서 이 현상이 하나의 전체주의적 현상은 아닌가 하고 두 눈을 의심하기도 했다. 당시 ‘-느님’의 호칭을 얻은 건 국민MC라고 불리던 유재석과 치킨뿐이었다. 둘의 공통점은 이를 싫어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그저 말을 하지 않을 뿐이다. <극한직업>의 흥행은 앞서 말한 치킨의 저변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성공한 코미디 영화임에 틀림없지만 이 코미디가 성공한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찜찜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단순히 소시민들의 공감을 사는 신파 없는 코미디로서 성공한 것일까? 우리는 어쩐지 치킨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군침을 흘리게 되어버려서 나도 모르게 영화관에 이끌린 것은 아닐까?

  따지고 보면 <극한직업>의 설정은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다. 흔한 한국식 조폭 영화의 구도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폭이 주가 되든 경찰이 주가 되든 경찰은 항상 열악한 여건에서 승부를 보고, 각자의 ‘조직’이 운영되는 방식에서 모두가 인간적인 면을 보여준다. 험한 일에는 조선족이 동원된다는 점까지 여전하다. 마약반과 강력반의 구도로 종종 대응되는 경찰과 조폭 두 개의 조직은 “너도 힘드냐? 나도 힘들다.” 같은 오래된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지독한 로우 키의 암실을 들여다 보거나, 버즈 아이 뷰로 화려한 전투씬을 내려다 보는 게 아니라 ‘인간성’이 극도로 확장되어 관객에게 ‘너도 힘드냐? 일단 웃자.’라는 손을 내민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이것이 생각보다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중요한 건 ‘너도’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게 대단한 공감을 산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일단’에 동조해주었을 뿐이다. 일단 치킨이니까.

  따라서 영화의 공감과 흥행은 치킨의 무수한 변주가 성공했다는 증거다. 치킨집, 프렌차이즈, 소상공인, SNS, 마약, 조폭, 직업, 자본, 언론까지 이 모든 건 치킨의 변주로 나타난다. 마약반이 실제로는 엄청난 신체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며 모든 소상공인이 극한의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영화의 메시지는 적당히 기분 낼 때 모여서 쉽게 뜯어먹기 좋은 음식이나 다름없다. SNS를 통해 유명해지는 음식점과 카페는 프레임 안에 예쁘게 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어차피 외부로 전시되는 것은 겉보기의 플레이팅, 그리고 직관적인 맛일 뿐이지 그 안에 담긴 재료나 그 비법,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없다. 치킨을 통해 자조하는 말 중 하는 “코딩을 하다 막히면 근처 치킨집 사장님께 물어보면 된다.”인데, 전문직 종사자들도 은퇴 후에 치킨집을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봤자 사람들이 치킨을 사먹을 때는 그런 고민이나 여운을 즐기지는 않는다. 먹을 때는 맛 생각만 한다.

  먹을 때 별다른 준비가 필요 없고, “신발도 튀기면 맛있다”는 어떤 쉐프의 말처럼 그냥 마시고 뜯어먹으면 되는 치킨에는 우리가 큰 피로도를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피로를 씻어주기까지도 한다. 이런 특징은 혼자 먹어도 좋고 함께 먹어도 좋다는 것이다. 인기 게임 PUBG의 우승 메시지처럼 치킨 먹기는 하나의 휴식 과정이다. 퇴근 후 집에 와서 축구 경기를 보면서 치맥을 하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더 잘 느낄 수 있다. 이런 치킨은 하나의 ‘보급형 진통제’처럼 퍼져 있다. 1등급부터 9등급까지 모두 치킨에 얽혀 있으며, 반은 생산자고 반은 소비자인, 그 외에 치킨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 없는(가려지는) 사회 속에서 우리의 모든 것은 납작해지고 있다. 먹는 것이 가장 용이한 문화생활이 되고, 외관 이상을 신경 쓰기에는 너무 많은 물질적 정신적 비용이 소모되는 시기에 <극한직업>은 너무나 많은 요소들을 웃음 뒤에 가려놓은 채 성공한 코미디로 정평이 나게 되었다.

  물론 코미디 영화 그 자체를 비난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최근의 한국영화 중에서 보기 드문 성공한 코믹 영화였다. 문제는 우스갯소리로 얘기하던 (그러나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일은 아니었던) 전문직(경찰)업인이 소상공인으로 변환해내면서 두 직업이 모두 한국에서 ‘극한’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도 우리는 전문직과 소상공인 누구에게도 들어갔다 나온 적이 없다는 걸 깨닫는 데 있다. 의도치 않게 성공한 치킨집에 한참을 웃게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웃음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불일치할 때 발생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게 된다. “우리 같은 소상공인들, 다 목숨 걸고 일하는 사람들이야!”라는 고 반장(류승룡)의 대사에 잠시나마 공명하게 되는 건 그 대사가 서사와 어우러졌기 때문이 아니라 류승룡의 절실한 연기력과 문자 그대로가 전달하는 내용 때문이다. 영화는 지속적으로 대중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빌미로 삶의 애환을 고려하는 것처럼 굴지만 극한직업의 흥행에 일부 기여는 했겠지만 진짜 흥행은 그런 부분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2.

  <극한직업>이 영 나쁜 영화였다고만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선택한 데는 당연히 이유가 있다. 다만 장사가 잘 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어절씨구 좋다 하고 유사품들이 늘어나게 되는 건 막고 싶다. 이에 대해 먼저 영화 속 ‘수원 왕갈비’ 소스가 단지 치킨에 적용되었을 뿐인데 사람들이 대거 치킨을 찾게 된 이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갈비를 먹으면 될 것을 왜 치킨에서 갈비‘맛’을 찾는가? 심지어 그 가격이 갈비를 넘볼 정도로 높아졌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치킨을 먹으러 온다. 첫 번째 이유는 먹는 것으로부터 경험을 찾기 때문이다. 과거라면 꽤 무리한 지출을 해나가며 고급 음식점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다면 지금은 적은 지출로도 유의미한 경험을 주는 맛집이 중요하다. 한동안 치즈등갈비 집이 우후죽순 늘어난 적이 있었다. 이 음식의 핵심은 고급스러운 느낌을 더해주고 갓 나온 음식을 좋은 식감으로 먹는다는 경험을 제공하는 치즈에 있었다.

  즉 우리의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지거나 그것에 애환을 느끼게 하는 대목은 거의 없다. 마약반의 고군분투야 가족 같은 롱 쇼트의 구도에서 꽁트처럼 이어지는 ‘적당히 모자란’ 사람들에 대한 수요는 늘 있었기 때문에 웃을 수 있었고, 앞서도 말했듯 그들의 치킨집은 그야말로 순항에 순항을 거듭하기에 웃을 수 있었다. 치킨에서 왜 갈비맛이 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치킨을 먹으러 갔는데 갈비맛이 나온다라는 그 자체가 식사 겸 맛집을 찾으러가는 여행 겸 미식을 한다는 고급스러운 취향을 도와주는 여러 요소로서 그냥 갈비집을 가는 것과는 다른 행위가 된다. 이것이 입소문을 타게 되면 이른바 ‘확실한 행복’을 제공할 수 있게 되어 그 후부터는 제법 가격이 상승해도 사람들이 몰리는 건 여전해지게 된다. 영화표는 좌석별로 가격이 매겨지고나서부터 사람들에게 가격적으로 확 체감이 된 문화생활이 되었는데 사람들에게 큰 고민 없이 웃고 나올 수 있는 잘 연출된 영화를 선택하는 두 번째 이유 ‘도박 없는 수’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 번째는 많이들 거론하는 것처럼 시장 상황이 괜찮았다는 점이다. 수완 좋은 사업가가 수원왕갈비치킨의 레시피만 가지고 순식간에 전국에 수많은 매장을 차릴 수 있었다. 이는 사실 조직적인 마약 운반책이지만 각 가게에는 마약 운반이 방해가 될 정도로 손님이 제법 오는 편이었다. 어찌되었든 CJ의 선택을 받은 영화는 전국적으로 많은 스크린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놀랍게도 <극한직업>의 흥행을 이야기하는 기사나 평가에서 이 영화가 독과점을 하고 있다는 데서 생각보다 엄격한 잣대를 받지는 않게 되는데, 이는 <마약왕>의 실패와도 깊은 연관이 있는 듯하다. 다층적이고 어수선하게 이어지는 주제와 한 대단한 인물에 대한 서사보다는 모두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큰 고민 없이 웃을 수 있는 <극한직업>이 압도적으로 성공한 것이다. <스윙키즈> 역시 좋은 소재와 그에 따른 주제의식을 내포하지만 그걸 드러내는 과정에서 다소 신파적이라고 불릴 만한 장면들이 많이 삽입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스크린도 어느 쪽에 몰아줘야 할지 확실해졌다.

  요컨대 네 번째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보면서 크게 불편하거나 논란을 지필 만한 지점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간 한국 영화의 웃음코드에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요소들이 있었다. 특정 계층을 비하한다든가, 마냥 웃기에는 사회적인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든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그냥 웃기지를 못하든가. <극한직업>은 지금 사회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지점이 무엇인지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익숙한 점을 짚어가면서도 각 소재들에 대해 깊이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김여사’라든 말에 대해서라든가 겨우겨우 먹고 사는 ‘형제치킨’이라든가, 악의적으로 문제를 덮어씌우는 미디어의 문제는 이 영화가 무엇을 풍자하려고 하는가 싶을 때쯤 다음 서사로 넘어가게 하여 그저 이야기의 장치 정도로 축소된다. 관객들은 이 치킨집이 어떻게 되는지, 마약 집단은 어떻게 되는지에 빨려들어가 치킨들이 어떻게 생산되고 소비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영화가 다루고 있는 소재들은 풍자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언급’했다뿐이지 모든 것은 완전히 감독의 의도대로 웃음을 위해 배치되어 있다. 이것이 배고프지만 라면을 먹고 싶지는 않고, 너무 비싼 음식을 넘볼 만큼 여유 있지도 않은 관객들에게 적어도 신파 같은 뒤끝이 남지 않는 담백한 영화로서 서로의 수지가 맞아떨어지게 된 이유다. 그도 그럴 게 한국사회가 담론에 담론을 거듭하여 논의해야 할 것은 많아졌지만 누구나 어디서나 너무나 쉽게 말을 나눌 수 있게 됨으로써 실제 학문의 담론 진전도와 달리 일상생활에까지 들어온 담론들은 이른바 ‘호불호’의 영역에 놓이게 된다. 이때 어설픈 풍자로 ‘취향’을 가르는 것보다는 모두에게 그럴싸하게 잘 먹혀 들어갈 수준에서 코미디를 전개하는 건 상업적 영화가 취해야 할 제법 괜찮은 전략이었을는지도 모른다. 배달의 민족에서 치믈리에 대회를 열고 동물보호단체가 거기에 뛰어들었 때 사람들은 치킨 먹기가 윤리적으로 안정적이어서 옹호한 게 아니다. 동물보호단체의 논리를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영화에 크게 웃어주지 않는 사람은 애초에 영화를 보지 않고, 언급도 하지 않으며 반면에 이런 영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웃으며 띄워주는 사람들은 여기저기 입소문을 낸다. 치킨이 이렇게나 흥행하는 데에는 그만큼 닭이 어마무시한 생산력으로 보급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현상에 대부분 왜 ‘사람’이 치킨집을 차리는 데 집중할 뿐이지 그 많은 치킨집에 납품되는 닭의 출처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 수없이 늘어나는 치킨집 수만큼 거기에 도살되는 닭의 수는 어떻게 채워지는가? 모두가 이 구조에 복무하고 있기에 이 논의를 꺼내는 것은 마치 ‘위선자’처럼 취급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설득하는 건 별다른 의미가 없기에 담론은 일상 영역보다 치열한 토론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마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이 고통을 싹 잊게 해준다는 이유로 싼 값이 보급되는 마약은 이 구조를 타고 멀리멀리 퍼져나가고 있다.

  3.

  당연하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이 일련의 생산/소비 과정에 얽힌 대중의 취향을 따지고 들려는 것은 아니다. 치킨집 개업은 처음에 그냥 마약반끼리 추억할 해프닝 정도로 끝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것을 마약 운반 수단으로 선택한 건 프렌차이즈 기업가이다. 대규모의 자본을 투여하고 적절한 마케팅 기법을 부여하자 치킨은 더욱 손쉽게 흥행하기 시작했다. 이 구조를 자본가가 쥐어잡고 있기 때문에 다시 악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먹고 사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먹고 무언가를 팔아 사는 일은 생각보다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다. 사람들의 취향은 결국 공급자들이 내놓은 선택지 안에서의 자유라는 걸 생각해볼 때 우리가 지금 먹고 살 만한 것들이 딱 이 정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면 대중의 취향 같은 걸 따지고 있을 때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랜차이즈는 개인이 부담해야 할 복잡한 절차를 간소화시켜준다. 서울에서 먹을 수 있는 건 부산에서도 먹을 수 있게 된다. 복제는 원본의 고유성을 잊게 만들고 이는 새로이 등장한 기술과 자본 없이는 불가능한 방식이다. 이 프랜차이즈를 마냥 비난하고 있을 수 없는 이유는 개인에게 당장 사는 문제를 다소 완화시켜주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개성 있는 가게들이 임대료 문제로 문을 닫고 있다면 그건 프랜차이즈 점주 때문이 아니라 그런 큰 힘으로 승부를 봐야 장사를 해볼 만한 여건과 상황이 문제인 것이다. 눈앞의 이익을 셈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기에 우리는 이 구조에 너무 익숙해졌지만 잘 되는 영화를 앞세우고 잘 안 되는 영화를 쳐내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상영관을 늘려 천만 영화라는 수식어를 다는 일은 이제 좀 부끄러워 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도전할 힘이 없는 건 당연하다. 프랜차이즈가 확보해놓은 일정한 질을 뛰어넘지 못하면 손쉽게 무너지고 만다. 한국의 문화 경쟁력을 점검하면 효율성 때문에 장기적으로 전체적인 질이 떨어진다는 걸 알 수 있다. 괜찮은 영화가 나오기 전에 당장 잘 팔리는 영화가 우선시되기에 영화감독들 또한 안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안전한 선택이 이어지거나, 다소 그럴싸한 제안이 나와도 프랜차이즈 방침을 거치다 보면 균질된 형태를 띄게 된다. <극한직업>은 흥행력과 소재, 그걸로부터 연상할 수 있는 점까지 고려했을 때 어느 정도 괜찮은 영화였다고 애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뛰어난 해외의 영화(대중성과 예술성을 가리지 않고)를 주목하다 보면 한국의 현상과 한국에서 생산되는 영화에는 왜인지 더 날카로워지게 된다. 그렇다고 외면할 수는 없다. 거대한 프랜차이즈가 지배하는 구조 자체에도, 그 사이에서 잘 해보겠다고 애쓰는 작은 가게들에도 지속적인 관심이 이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국 어디를 가도 비슷한 모양새가 돼버리고 말 것이다. 거대 조직과 싸워야 하는 열악한 마약반이 가방 안에 든 현금 제안에 어떻게 굴복하지 않을 수 있는가?

  치킨집으로 흥행하든, 경찰이 되어 거대 조직을 소탕하든 사람들은 결국 “우리 이제 외식도 좀 하고 멋진 데 구경도 하고 그렇게 살자. 그럴 자격이 충분하니까.”라는 대사를 기억하게 된다. 먹고 사려면 무엇이든 해야 하고, 무엇이든 극한직업이라는 이름을 얻기에 충분한 이유는 사회구조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공장식 축산을 강화하고 싶어서 치킨을 먹는 사람은 없고, 그것에 복무하기 위해서 치킨집을 운영하는 사람도 없다. 핵심은 사람들이 치킨만을 소비하게 된 것, 즉 이 치킨을 값싸게 보급하는 구조를 꾸린 것에서 시작된다. 만약 <극한직업>이 성공한 코미디 영화의 모범으로 자리잡아 이후에 이러한 영화들이 우후죽순 생겨난다면 그중에서도 어떤 것은 흥행을 하고 어떤 것은 흥행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 실패 케이스는 가려지고 다시 성공한 케이스들만 주목을 받아 많은 상영관을 획득하게 된다. 선택지가 너무 좁다. 더 큰 선택지는 출혈을 요구한다. 최근 <미성년>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예매를 하려다가 죄다 조조 아니면 심야이고 그 중간 시간대에 상영하는 상영관은 하나도 없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건 선택지를 주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고를 게 없어서, 있는 걸 봤(먹었)더니, 그게 나쁘지 않았다. 딱 그뿐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코미디 영화의 전개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갈 부분들이 있다. 앞서 큰 논란이나 불편한 지점을 잘 피해갔다고 얘기했지만 영화가 완벽했다는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인간적인 캐릭터는 등장하지만 그 많은 캐릭터들이 입체적이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밖에서는 ‘좀비’라고 불리지만 안에서는 집안의 경제를 억지로 짊어진 가장으로서의 고 반장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인물은 그 인물들의 소문이나 설명으로만 속성이 묘사된다. 애초에 특출난 서사의 힘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인물들의 배열은 마치 TV 개그프로그램처럼 관객을 한 순간 한 순간의 해프닝과 엉성함, 균열로 인해 웃음을 짓는 상황 중심으로 매몰되게 한다. 즉 전체 줄기를 이끌어가는 서사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게 만드는데 (누구나 이 영화의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앞선 <스윙키즈>나 <마약왕>이 실패한 이유를 생각한다면 그 점은 다소 쓰라린 단점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렇다 보니 서사의 미약함을 메우기 위해 생각보다 통쾌한 전투씬이 후반에 배치되어 있다. 설정 쇼트 정도의 먼 거리에서 소수의 마약반과 다수의 조직이 싸움을 벌이는 장면, 각 형사들이 개별적으로 일대일 싸움을 하는 장면들은 사람들이 그래도 형사인데, 하는 데서 품던 기대를 마지막에 높여주게 한다. 이러한 ‘조미료적 배치’에 대해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다. 특히 장 형사와 선희(장진희 역)의 격투씬에는 대체 이것을 왜 넣었는지 그 저의가 의심될 정도였다. 흥행코드를 너무 감안한 나머지 여성 두 명이 단독으로 화려한 격투씬을 하게 되면 장점이 살아날 거라고 생각했을까? 이 점을 지적하는 것도, 지적하지 않는 것도 다소 저열한 딜레마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영화 초반의 ‘김여사’ 대목과 이어 봤을 때 대부분 용납할 수 있더라도 이런 식으로 모든 걸 소재로서만 활용하는 조미료 레시피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마지막의 선상 격투가 훨씬 더 의미있고 값졌다. 싸우는 두 명의 리더는 전투력에 있어서 하잘것없지만 서로 더 이상 내줄 수 없는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점에서 많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 치킨집의 기이한 성공과 마약반의 숨겨진 신체 능력으로 전개되는 영화 안에서 결말부만은 진흙탕 액션이 보여주는 웃음으로 그래도 이 영화가 사람들의 ‘악바리’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구나, 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둘의 전투에는 칼도 총도 개입하지 않는다. 만약 상대가 제대로 된 무기 하나만 갖추고 있었어도 고 반장은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그의 아내가 가장 걱정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비인간적인 현실 속에서 비인간성(좀비)을 통해서 생존하는 모습은 사실 꽤나 풍자적인 부분이다. 영화 내내 제시된 ‘극한’이라는 수식어를 깔때기처럼 잘 모아서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으로서 작용한 것이다.

  <극한직업>의 흥행에 아주 대단한 비난을 가하거나, 대단한 칭찬을 더해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한 가지 우려스러웠던 건 이것이 괜찮은 코미디 영화의 등장이라거나 우리네 삶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켜서 성공했다고만 단정 짓기에는 그 다음 영화들이 어떤 형태를 띄게 될지 상상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치킨을 먹는 이유를 열심히 분석하면 뭐하는가. 그런 분석에 개의치 않고 사람들은 열심히 치킨을 먹고 그 분석에 대해 오히려 화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분석을 그만두게 되면 프랜차이즈들은 한국을 치킨 공화국으로 만들어버릴지도 모른다. 그 안에 마약이 섞였는지 진통제가 섞였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너무 쉽게 보급된다는 점이다. 한국 영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많이 흥행한 영화에도, 적게 흥행한 영화에도 가해져야 한다. 여기에는 너무 공고한 구조가 호시탐탐 뛰어난 보급력으로 무엇을 보급할지 선택하고 ‘배제’까지 하기 때문이다.

  <극한직업>이 한국에서 대 흥행을 끌었다고 해서 해외에 그대로 수출할 수 있을까? 극한직업 원작의 중국 수출본 <랍스터 형사>를 생각해본다면 이것이 그대로 해외에서 개봉하든 수출이 되든 그 흥행 전망은 조금 어두울 거라는 걸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이천만 명 가까이 봤다 한들 해외 경쟁력은 미지수다, 이 진술이 의미하는 건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을 끊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나치게 한국적인’ 이유를 조금 더 가시화해서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후라이드 치킨은 흑인들의 소울푸드였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것에 양념이 덧붙여져 양념 치킨, 간장 치킨, 마늘 치킨, 신호등 치킨까지 다양하게 변주되며 한국인의 소울푸드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 점에서 치킨은 한 순간의 유행거리가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한국적인 것이 되었다. 다만 유행하는 것은 그 저변으로 퍼져나가는 것들이다.

영화 <극한직업>의 일부 장면. <극한직업>은 마약반 형사들이 낮에는 치킨 장사, 밤에는 잠복근무하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린 정통 코미디 영화다. 

 

 

심사평  : 김낙현 교수(다빈치교양대학)

비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요구되는 글

비평이란 무엇인가? 질박하게 말한다면 평가하는 것이다. 단, 여기서 언급한 평가란 단순한 주관적 감정과 느낌을 앞세운 것이 아닌, 나름대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 분석한 글쓰기를 가리킨다. 이와 더불어 현 시점에서 우리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은 과연 좋은 비평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성찰적 자세이다. 현학적으로 자기 지식을 과시한 글, 전문비평가를 위한 비평의 글, 이런 비평은 일반 대중과는 한참 괴리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서 좋은 비평의 덕목은 무엇보다도 독자에게 공감과 공명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특히, 비평이 잘 읽히지 않은 작금의 상황에 비춰볼 때 더욱 더 그렇다. 이 같은 관점에 입각해 본선에 오른 작품을 평가하였다.    

  이번 본선에 오른 영상비평은 영화 〈극한직업〉의 흥행을 통해 보는 문화가 보급되는 방식을 분석한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 치킨」과 영화 〈로건〉과 히어로 영화를 비교, 분석한 「강요받은 영웅의 자리에 서서」 등 두 편이었다. 첫 번째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 치킨」을 분석한 글은 〈극한직업〉에서 중요한 장치로 설정된 ‘치킨’을 화두로 진지하고 성실하게 작품을 분석한 글이다. 나름대로 영화와 ‘치킨’의 긴밀한 관계설정을 설득력 있는 근거를 들어 깊이 있는 해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전반적으로 충분히 공감이 가는 비평이었다. 그러나 이 비평은 글쓴이가 말하고 싶은 키워드가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치킨’을 통한 문화의 보급방식이었지만, 많은 부분이 영화의 구성과 설정에 할애되고 있어 글의 일관성이 다소 흐트러졌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 점을 개선하여 심화, 발전시킨다면 훨씬 더 나은 비평이 되리라 믿는다. 두 번째 비평 「강요받은 영웅의 자리에 서서」 역시 진지하고 성실하게 작품분석을 시도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깊이 있는 해석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공감과 공명을 주기에는 미흡했다고 판단된다. 공감과 공명이 미흡한 결정적인 원인은 설득력 있는 근거가 미약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근거로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 치킨」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본선에 오른 두 편의 비평은 글쓴이가 학부생임을 감안하면, 분명 글에 대한 내공이 느껴진 글이었다. 그렇기에 두 학생 모두 비평가로서의 발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비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의 자세로 글을 써나가길 바란다. 끝으로 두 학생의 건필을 기대한다. 

 

 

 

당선자 전명환 학생 interview : 웃으며 뜯었던 보급형 닭다리의 무거움

사진 정준희 기자
사진 정준희 기자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다양한 패러디로 회자되며 우리를 웃음 짓게 만든 영화 <극한직업>의 대사다. 영상비평 부문 당선자 전명환 학생(국어국문학과 4)은 국민 영화 <극한직업>과 국민 음식 ‘치킨’에 진중한 물음을 던졌다. 그는 고민 없이 즐길 수 있는 상업영화와 치킨의 이면을 솔직담백하게 풀어냈다. 지나치기 쉬운 사회 현상을 비평의 장에 세워 깊은 의미를 재발굴한 전명환 학생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당선을 축하한다.

  “좋지만 부담스럽기도 하네요. 국어국문학과 전공 수업에서 영화를 배우는 만큼 영상비평을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거든요. 부족한 점이 많지만 앞으로 열심히 글을 쓰라는 응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어요.”

  -<극한직업>을 비평 대상으로 정한 이유는.

  “지난 중대신문 비평 공모전을 보니 대부분 외국영화를 언급했더라고요. 한국 영화는 한국인이 아니면 관심 갖기 어렵잖아요. 그런 점에서 한국 영화에 집중해보자고 다짐했죠. <극한직업> 관련 후기 글을 찾아보면 대부분 칭찬하는 내용이었어요. 물론 ‘재미와 흥행을 모두 잡은 성공작이니 충분하지 않나’라고 말할 수 있죠. 분명 좋은 점도 있지만 아쉬운 점도 짚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모두가 재밌게 본 영화로부터 진지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죠.”

  -영화 속 어떤 부분에서 영감을 얻었나.

  “예상하셨겠지만 치킨이에요.(웃음) 영화에 치킨, 마약, 경찰, 전문직이 소재로 등장하자마자 글감들이 꿰어졌어요. 비평 제목도 바로 떠올랐죠. 영화 보기 전부터 치킨 소비가 불러온 문제를 고민했었는데 영화에 치킨이 등장하는 순간 무의식에 쌓여있던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었어요.”

  -치킨과 영화산업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대량 생산’과 ‘대량 보급’이죠. 치킨의 경우 맛집을 찾아다니기보다 브랜드를 더 중요하게 여기잖아요. 개성보다는 보급이 우선시 되죠. 치킨을 대량으로 찍어내고 보급한다는 점과 대기업이 영화를 제작해 상영관에 퍼뜨리는 점이 맞아떨어진다고 봤어요. 치킨과 <극한직업> 모두 전 국민이 공유하는 정서가 됐잖아요. 치킨을 싫어하는 사람도 치킨의 인기를 알 수밖에 없죠. <극한직업>을 보지 않은 사람도 대사를 알고 있고요. 핵심은 대량으로 보급하는 주체가 따로 있다는 거예요. 치킨에선 프랜차이즈, 영화에선 대기업이 보급하는 주체라고 생각해 둘을 엮어봤죠.”

  -대량 생산과 대량 보급의 문제점은.

  “치킨 소비가 늘면서 비도덕적인 사육방식과 기형적인 구조를 갖추게 됐죠. 대량으로 보급되는 영화도 잘못된 고정관념을 퍼트리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는 사람들이 문제점을 인식하면서도 쉽고 가볍게 소비하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개인에게 책임을 묻기에는 수많은 구조가 얽혀있어요. 따라서 사람들이 이 두 가지를 좋아하는 이유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했죠.”

  -비평에서 ‘개인의 취향은 공급자가 내놓은 선택지에서의 자유’라고 했다. 우리가 견지해야 할 태도는.

  “틀 밖으로 나가려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영화 <미성년>은 기존 상업영화에 비해 주류에서 벗어난 주제 의식을 담고 있었죠. 적어도 ‘상업 영화의 성공 구조’라는 틀을 지각하고 그 밖으로 나가려고 시도했다고 봐요. 이러한 시도는 착취하는 구조에서 벗어나려는 우리에게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죠. 틀 밖으로 나가려는 노력에는 의지가 필요하고 노력 끝에 문제를 해결할 방안도 있어요. 따라서 의지를 지니고 나아가는 태도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앞으로의 목표는.

  “예전부터 시를 써왔기 때문에 시를 가장 잘 쓰고 싶어요. 창작만으로 담아낼 수 없는 부분을 비평으로 표현하고 싶기도 해요. 장르에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쓰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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