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부문 당선: 김주형 학생(사회학과 2) 「우리는 왜 칠 수밖에 없는가」

 

지난 2016년에 출판된 『거의 모든 거짓말』은 지난 2011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전석순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쓺과 침의 세상

 어린 나는 욕을 ‘쓰다’와 ‘하다’ 사이에서 무엇이 맞는가 고민했다. 어머니는 욕을 ‘하다’라고 가르치셨지만, 암만 생각해도 욕은 쓰는 것이었다. 살인자가 흉기를 구해 죄를 저지르듯 사람은 욕을 사용하여 누군가를 헐뜯는다고 생각했다. 욕은 ‘나’와 별개인 도구인 셈이었다. 헷갈렸던 시절을 지나, 이젠 욕을 ‘하는’ 내가 그때를 돌이켜보면 사람은 순백과 같다고 어렴풋이 가정했던 것 같다. 순백은 사람이 천성적으로 선하여 그 어떤 부도덕도 저지르지 못하나, 환경의 유혹으로 악행을 저지른다는 말이 아니다. 저 식칼이 존재했기 때문에 내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항변은 헛소리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인간은 선, 악, 미, 추 등 모든 가치를 담지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사회적 산물의 사용으로 자신을 정립한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리라. 사회적 산물의 예시로는 앞서 나온 ‘쓰는’ 욕이 있다. 이처럼 순백은 인간을 무엇이라고 정의하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의 종(種)이라 여기기 때문에, 그의 정체를 묻는 자에게는 가장 게으른 답변인 동시에 가장 순수한 답변일 것이다. …

 

  우리가 왜 허구적 인물인 ‘나’에 꼼짝없이 빨려들 수밖에 없는지를 캐내 보자.

 

  1. 거짓말은 나쁘다.

  2. ‘나’는 거짓말을 한다.

  3. ‘나’는 나쁘다.

 

  삼단논법으로 거짓말쟁이 ‘나’에 관한 보편적인 판단을 추려내면 위와 같을 것이다. 우리는 대전제 1.을 반박할 수 없다(선의의 거짓말에 관한 논쟁은 논외로 한다). 소전제 2.도 소설 줄거리 상 참이다. 애초에 그는 거짓말 2급 자격증으로 먹고산다. 따라서 두 전제 모두 참인 까닭에 3.은 반드시 참이다. 그는 ‘객관적’으로 나쁘다. 그러나 우리는 거짓말 치는 ‘나’를 악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속고 속이는 1급 시험에서 낙방한 ‘나’를 자승자박이라며 고소하게 느끼지도 않는다. 오히려 독자는 적극적으로 그의 삶을 이해하며, 마치 자기합리화라도 하듯 그의 거짓말과 양다리를 용인한다. 나쁘다는 사실을 알지만, ‘나’를 안쓰럽게 여기는 찝찝함이 마지막 책장에 뭉그적댈 뿐이다. 왜 우리는 ‘나’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지 않는가? 필자는 독자가 『거의 모든 거짓말』의 세계를 은연중에 못마땅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회는 거짓말 자격증을 만들어 거짓말 치기를 장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등장인물 그 누구도, 사회의 이상한 세태를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먹고 살기 위해 뛰어난 거짓말쟁이가 되고자 노력할 뿐이다. 작가는 약간의 찝찝함을 빌미로, ‘살아남기 위해선 꼭 거짓말이 필요하다’라는 이데올로기를 ‘나’의 삶과 성찰 꾸러미로부터 통찰하길 바랐을 것이다. …

 

  한국에서 거짓말은 참말이 된다

  칠 수밖에 없는 세계는 현실의 반사경이다. 하루하루 연명하는 삶 속에서 소설 같은 이데올로기를 지각할 수 없는 것도 똑같다. 『거의 모든 거짓말』은 시민에게 거짓말 자격증을 부여했고, 현대는 우리에게 자유로이 일할 수 있는 자격을 선사했다. 그러나 두 세계 모두 먹고살기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일할 수밖에 없다. ‘취미는 취미로’라는 격언을 따라, 사랑받기 위해 상대가 제시한 삶을 택하고 무엇이 되고 싶다는 첫 거짓말에 발을 들인다. 자유주의 사회 특유의 ‘뭐든지 할 수 있다!’라는 구호는 생존경쟁을 치러야만 하는 우리를 무디게 만든다. 무엇이든 자유로이 할 수 있기에, 눈앞에 닥친 경쟁에서 살아남기만 하면 거짓말을 진실로 이룰 수 있으므로.

  거짓말이 제시하는 가도가 정설이라 여겨지는 현실은 끊임없이 경쟁이 계속되는 전장이다. 개인은 홀로 외로이 존재하며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혹사한다. 바야흐로 ‘번아웃(Burn Out) 증후군’과 고질적인 우울증의 지배기다. 개울에 비친 자신의 상과 고독한 사랑에 빠진 나르키소스는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저주받은 현대의 나르키소스들도 홀로 세상을 살아가다 고대 신화를 따라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우리는 자신의 삶에 괴사(壞死) 중이다. 사회 병리의 증상으로 우리는 자존감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자존감은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의 문화 코드로 안착했다. 필자는 자존감 열풍의 시작을 고2 때 즈음, 2016년도로 기억한다. 위로와 자기만족을 내건 각종 강연과 방송 프로그램은 여전히 성행하고, ‘마음 처방전’류 도서들은 각종 변주를 낳고 있다. 아기자기한 삽화와 짧은 문구로 구성된 몇몇 위로서는 베스트셀러로 등극해 삽화를 달리하여 한정판을 내놓기도 한다. 물론, 인간 심리의 중요 요소인 자존감을 스스로 높이고자 노력하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그 극복 의지를 누가 폄하하겠나. 그러나 대중의 관심이 일시에 자존감으로 쏠리는 것은 한국인의 자존감에 큰 문제가 발생했음을 반증한다. …

 

  한국에는 물신(物神)이 군림한다. 2018년, 한국을 덮친 비트코인 광풍은 물신이 현신한 듯했다. 가상화폐 가격은 투기로 인해 훌쩍 치솟아 해외 시세의 2~30%를 웃돌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투자자는 꾸준히 증가하여 약 100만 명이 투자에 참여해 한탕을 노렸다. 일확천금의 신분 상승을 노린 그들의 의식 저변에는 필시 물신의 조종이 있었으리라. 다수의 물신주의자로 구성된 사회는 사람을 금전만으로 평가하게 된다. 그 결과, 자본과 소득에 따른 차별과 무시의 풍조는 사회의 기조로 뿌리내린다. 사회적 가치 대신 금전으로 인간의 쓸모를 판단하는 사회에서 압도적 다수의 일반 노동자는 자신을 높게 평가할까? ‘비교적’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가치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이처럼 인간의 가치 평가 기준이 왜곡된 한국 사회에서 다수는 행복할 수 없다. 

  한국은 극도로 양극화된 대지주 사회이다. 상위 10%의 한국인을 제외한 나머지는 땅 3%로 아옹다옹 싸우는 패자이다. 최소한 전체 인구의 10%가 되어야만 ‘비교적’ 부유하므로 스스로 높게 평가할 수 있다. 사회적 가치는 충족했으나 물질적으로는 궁핍한 90%를 달래기 위해 사회는 물신주의의 평가 기준과 능력주의를 만족하는 ‘진실’을 꾸며낸다. 그 진실은 정형화된 ‘성공법’이다. 뚜렷한 주관 없이, 모두가 한가지 궤도를 좇으나 이 방법이 진실임을 증명한 자는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그 소수조차도 어쩌면, 학력 자본을 뒷받침할 수저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개천(일지도 모를)에서 용 나는 모양새는 다시 성공법을 진실로 굳히고, 한국에서 거짓말은 이렇게 참말이 된다. 마치 ‘거짓말 차등 자격증제’를 실시하여 승급에 혈안이 되도록 해 세계의 본질적인 병리에 의문을 갖지 못하도록 한, 어떤 숨 막히는 소설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

 

  우리는 모두가 순백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침과 쓺의 세상은 거짓말을 치도록 강요한다. 다양성이라는 가치는 거짓이 되고, 능력주의 신화는 절대 참이 된다. 『거의 모든 거짓말』의 세계는 현대를 비틀어 이야기에 은근히 담아내, 일상에 침투한 이데올로기를 독자 스스로 까발리도록 한다. 물론, 거짓말 자격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거짓말 자격증을 따야 할 필요는 없지만, 거짓말을 참으로 믿지 않으면 2급·3급의 하류 낙오자가 되는 현실에 살고 있다. ‘나’의 성장소설이자 거짓말쟁이 세계를 비판한 세태소설인 이것은 진실로 향하는 안내서이지 않을까. 거짓말이 지배하는 세상과 ‘나’는 누구인지 당최 알 수 없는 시대를 그려낸 『거의 모든 거짓말』을 권한다. 

 

 당선자 김주형 학생 interview: 사회가 치는 거짓말을 막으려면

 소설 『거의 모든 거짓말』에는 ‘거짓말 자격증’을 따려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다. 김주형 학생(사회학과 2)은 한국사회 역시 우리에게 거짓말 치고 있다고 말한다. 약자인 개인에게까지 거짓말을 조장한다고 강조하면서 말이다. 그가 작품 너머 짚어낸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김주형 학생이 제시한 시사점을 함께 나눠봤다.

 

  -해당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창의와 소통> 수업에서 전석순 작가의 세태소설 『철수 사용 설명서』를 처음 접했어요. 작품의 흡입력이 엄청나 마치 스펀지 같더라고요. 곧바로 전석순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을 찾아보던 중 『거의 모든 거짓말』을 발견했어요. 공교롭게도 『82년생 김지영』과 비슷한 시기에 출판됐더라고요. 뛰어난 내용보다 조명받지 못한 점이 아쉬워 이를 소개하고자 했어요.”

  -3단 논법으로 주인공 ‘나’를 분석했는데.

  “비평에도 논증 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논증과 추론>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되새기며 문장을 읽었죠. 주인공 ‘나’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면서 양다리까지 걸친 밉살스러운 인물이에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주인공이 밉지 않더라고요.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던 중 문득 주인공이 몸담은 세계가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를 객관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3단 논법을 활용했죠. 자세히 보면 모든 전제가 참인데 결론은 거짓이에요. 숨은 전제가 틀린 거죠.”

  -주인공 ‘나’처럼 방황한 적이 있는가.

  “학창 시절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부모님 반대로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했죠. 이후 지역 미술대회에서 수상도 했지만 대학 입시가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왔어요. 사회는 ‘주어진 길을 따라야 잘 먹고 잘살 수 있다’고 자꾸만 주입하죠.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건 글쓰기예요. 사회가 제시한 정상 궤도에서 이탈했다고 낙오자 취급받으면 참 슬플 것 같아요. 다양한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로 거듭났으면 좋겠습니다.”

  -정상 궤도란 무엇인가.

  “경제적 가치처럼 오늘날 중시되는 것만을 달성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에요. 정상 궤도가 정립되는 순간 다양성이 상실돼요. 자유로운 사람에게 ‘왜 저렇게 살아? 낙오자인가 봐.’ 하면서 낙인찍기 시작하죠. 사회는 ‘이렇게 달리면 성공할 수 있다’고 외치지만 이는 결국 거짓말이에요. 모두가 성공할 수는 없어요. 자존감을 다루는 책이 한국사회에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사실도 이를 뒷받침하죠.”

  -이렇듯 사회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는 저마다 쓸모가 있어요. 공부하는 학생과 벽돌을 나르는 노동자도 마찬가지죠.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사회 기여 정도에서 돈을 잘 버는 정도로 이동했어요. 개인이 지닌 금전적인 능력이 거짓된 가치 기준으로서 작용하는 셈이죠. 거짓이 진실로 거듭나면서 우리는 ‘돈, 명예, 직업’만을 바라보며 삶에 대한 자괴감을 느껴요. 비평에서 비트코인 투자에만 약 100만 명이 몰린 세태를 꼬집은 이유예요.”

  -세상이 어떻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거짓을 진실로 믿는 사회 풍조가 개선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상 궤도에 안착하기 위해 경쟁하면서 느끼는 피로감을 개인의 역량 문제로 여기는 풍조 또한 마찬가지죠.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에서 상대를 견제하는 만큼 자신에게 과도하게 몰입하며 고립돼가는 현대인을 묘사해요. 이를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 오늘날 사회 전반의 문제임을 깨닫는 과정이 중요해요. 무엇보다 경쟁으로 파편화된 개인끼리 상처와 고충을 나눌 수 있는 장이 형성돼야 해요.”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은.

  “진심어린 글을 타인에게 인정받으니 기분이 묘하네요! 글은 심금을 울릴 수도 있고 말보다도 멀리 퍼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면에 제 비평문이 실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심사평: 이승하 교수(문예창작전공)

 거짓말이 참말이 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

 

 예심을 거쳐 전달된 3편의 문학비평 작품은 모두 일정한 수준에 이르러 있어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잘 다듬고 보완하면 일간지 신춘문예에 내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조남주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을 논한 「잘 짜여진 연극 속,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김지영 씨」는 초강세 베스트셀러였던 소설을 무자비하게(?) 비판한 문제의식이 돋보았다. 통계치의 허위, 핍진성의 결여, 작가 자신의 과거 경력에 대한 의구심 등 세 가지 측면에서 비판의 메스를 들이댔다. 비판의 근거에 대해서는 수긍이 가지만 좋은 문학비평 ‘작품’이 지닌 중후함이나 깊이를 담보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차분하게 설득하는 논조의 글이었다면 문제의식이 더욱 돋보였을 것이다. 각주에 오류가 많았다는 것도 지적한다. 

  이제 2권의 시집을 낸 안희연의 시세계를 논한 「죽은 사람이 얼마나 아픈지 알 수 있다는 듯이」는 문장이 화려하고 논지가 매끄럽게 전개된다. 세월호를 종종 다룬 시인에 대한 후한 평가와 약간의 지적도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자신감 결여는 이 평론이 갖고 있는 약점이다. ‘~할 수는 없을까’, ‘~할 것 같다’, ‘~할지도 모른다’ 같은 문장이 많이 나온다. 여러 개의 비문과 띄어쓰기의 오류도 좀 더 차분한 글쓰기를 요구하고 있다. 젊은 시인이 쓴, 시대의 아픔이 투영된 시에 대한 논의이기에 좀 더 진중한 자세를 취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1983년생 소설가 전석순의 장편소설 『거의 모든 거짓말』을 다룬 「우리는 왜 칠 수밖에 없는가」는 앞의 두 작품에 비해 약점이 더 많다. 문학비평이 아니라 에세이 같다. 36쪽밖에 되지 않고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치밀한 분석과 적절한 평가보다는 자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의 문제의식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사회학과 학생이어서 그런 것일까. 거짓말이 참말보다 더욱 진정성을 지니고 들려오는 우리 사회의 왜곡된 상황에 대해 ‘한국에서 거짓말은 참말이 된다’는 소제목 아래의 글은 커다란 문제의식으로 다가온다. 좀 긴 에세이 같지만 올바른 사회를 꿈꾸며 평필을 높이 든 김주형 학생의 사회비판의식을 높이 사 가작이 아닌 당선작으로 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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