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에 항거한 6인의 열사

“의에 죽고 참에 살자” 
플래카드 들고 행진

100주년 맞이해
4·19 정신 되새겨야

“정말 내 평생에 자유당정권이 거꾸러지는 꼴을 못 볼 줄 알았다.”  동아일보 이강현 기자가 4·19혁명 직후 시위에 참가한 학교 학생들의 수기를 모아 편찬한 「민주혁명의 발자취」의 서문 중 일부다. 1960년 이승만 전 대통령은 3·15 부정선거를 거쳐 4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됐고 전국에서 이에 대항한 시위가 이어졌다. 4월 11일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이 최루탄을 눈에 맞은 시신으로 발견됐고 같은달 18일에는 시위에 참여한 고려대 학생들이 정치 폭력배의 습격을 받았다. 중앙대는 이에 맞서 ‘의혈’ 정신을 실천하고자 자발적인 행동에 돌입했다.

  4월 19일, 중앙대는 아침부터 북적였다. 정외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에 참가가 결의됐고 흑석-서울역-미도파-경무대-을지로 등으로 이어지는 시위 코스가 결정됐다. 당시 임영신 총장은 학생들이 교문을 나서기 전 “항거는 마땅하지만 지성인인 여러 학생은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며 만류했으나 학생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이후 유겸노 학생(당시 정외4)이 이승만 독재정권을 규탄하자는 내용의 결의문을 낭독했다. 수천명의 학생이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우며 교문을 나섰다.

  학생들은 경찰과의 충돌, 소방차의 물세례를 이겨내고 한강 인도교를 건너 경무대로 향했다. 시민들은 물을 건네고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며 시위대를 응원했다. 경무대에서 경찰과 약 2시간 정도 대치한 시위대는 국회의사당과 시청 쪽으로 방향을 틀어 행진했다. 이후 시위대는 내무부(현 을지로입구역 근처) 앞에 모여 농성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3·15 부정선거의 내막을 밝힐 것을 소리 높여 요구했다. 학생처장 등 일부 학교 관계자가 학교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지만 학생들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오후 6시경, 별안간 총성이 들리며 경찰의 일제 사격이 시작됐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김정일 동문(정치외교학과 58학번, 총동문회 고문)은 “경찰이 피를 흘리는 학생들을 때리고 총을 쐈다”며 “시위 학생들이 경찰에게 끌려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날 내무부 앞에서 ▲고병래(상학과 58학번) ▲김태년(약학과 58학번) ▲송규석(정치외교학과 59학번) ▲전무영(신문학과 60학번) ▲지영헌(신문학과 59학번) 등 총 5명의 동문이 목숨을 잃었다.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대를 이끌다 연행돼 경찰의 모진 고문을 받은 ▲서현무(법학과 59학번) 동문이 병원에서 숨을 거두며 4·19혁명으로 목숨을 잃은 중앙대 희생자는 총 6명이 됐다.

  ‘피의 화요일’이 지난 다음날, 중앙대에는 사망자 신고소와 행방불명자 상담소가 설치됐고 휴교령이 내려졌다. 많은 희생자가 나왔지만 민주화를 향한 중앙대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교내에서는 부상 학생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이 전개됐다. 교수진도 나섰다. 4월 25일 대학교수단 시위에서 법대 이종극 교수는 시국선언문 기초를 작성하며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4월 26일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고 자유당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된다. 5월 10일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4·19 희생자 추모식이 진행됐고 9월에는 지금의 104관(수림과학관) 자리에 의혈탑 제막식이 열렸다. 의혈탑은 이후 중앙도서관 앞으로 옮겼다.

  김정일 동문은 “중앙대는 최후 저항 세력으로 마지막까지 4·19혁명을 이끌며 많은 희생자가 나왔지만 국가 유공자로 인정된 공로자 수는 적다”며 “시위가 있었던 현장에 기념비 하나 없다”고 전했다.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을지로에는 고층 빌딩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김정일 동문은 “4·19 정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며 “100주년을 맞이해 4·19부터 시작된 의와 참 정신이 올곧게 이어지고 있음을 학생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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