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의 첫날, 학교 본부는 설명회를 열었다. 모집단위 광역화를 골자로 한 계획안을 발표했다. “기본적인 틀은 그대로 갑니다. 세부적인 부분은 합의할 수 있습니다.”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논의 일정을 제시했고 일찍이 선을 그은 채 원래의 구상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몇몇 학생들은 학교 본부를 거슬렀다. 그 ‘기본적인 틀’을 바꾸고자 힘을 모았다. 연서명을 받고 대자보를 적고 피케팅을 했다. 나도 그 중 하나로서 숱한 과정을 함께했다.

  “그런다고 뭐가 바뀌나요.” 하루는 후배가 따져 물었다. 얼마간 비난이 섞인 말씨였다. 나는 모욕을 당한 것처럼 일부러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위의 문제야. 마땅히 바뀌어야 해.” 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쪽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앞날이 어떻든 그게 떳떳한 삶이라고 일렀다. 하지만 진작 마음을 돌린 후배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이미 현실이 그렇잖아요.” 바닥에 침을 뱉듯 쏘아붙였다. “형은 너무 이상적이에요.” 대화는 줄곧 평행선을 달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서러운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후배가 던진 질문이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런다고 뭐가 바뀌나요.” 처음에는 후배를 탓했다. 스스로의 안위만을 지키는 그 옹졸함을 헐뜯었다. 바꾸려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바뀌지 않을 거라 어림잡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후배에게 전한 이야기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했다. 결과에 대한 두려움. 나 역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냉소를 떨치기 어려웠다.

  사실 너무 겁이 났다. 끝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까봐, 전부 무의미한 일에 불과할까봐, 뒤늦게 나의 어리석음을 후회할까봐. 겉으로는 희망을 고집하는 척 나는 비관의 늪에서 혼자 허우적거렸다. “그런다고 뭐가 바뀌나요.” 내가 아팠던 건 꿈쩍도 하지 않는 학교 본부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학교 본부 앞에서 나를 좀먹는 모진 물음 때문이었다. 나는 언제까지 다음을 낙관할 수 있을까. 매일밤 나의 가슴에 과녁을 만들어 활시위를 당겼다.

  그 무렵 나는 간절히 나를 건지고 싶었다. 실낱같은 끈을 놓치기 싫었다. 늘 곱씹던 문장에 대한 답을 찾길 바라며 어머니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런다고 뭐가 바뀌나요.” 그리고 어머니의 한마디가 나에게 구원처럼 떠올랐다. “기사 한 줄이 바뀐단다.” 앞으로 모든 소식 앞에 더해질 “학내 구성원의 반발 속에서”라는 글귀. 그 짧은 글귀가 변화의 실마리라고 강조했다. 적어도 나중에는, 먼저와 같은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또한 모든 역사가 그러했단다.” 물론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나는 곰곰이 그 의미를 되풀이했다. 어쩌면 어린 시절 문방구마다 놓였던 게임기와 비슷해 보였다. 동전을 다시 넣으면 캐릭터는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나 기어이 한 걸음을 나아갔다. 마찬가지로 내가 끈질기게 오늘을 새긴다면, 다음 차례의 누구는 보다 나은 위치에서 내일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세월의 통증을 거듭한 끝에 정말 ‘뭐가 바뀌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고작 한 줌의 가능성이라도 좋았다. 다윗이 돌멩이를 쥐었던 것처럼 나 또한 공동의 기억을 붙잡기로 다잡았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기대의 여지를 남기고자 했다. "그런다고 뭐가 바뀌나요." 새삼스레 삼 년 전의 일을 적는 까닭도 다름없다. 도대체 무엇이 바뀌고 있는지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기시감 가득한 나날을 살기 일쑤고 그 속에서 나는 여전히 무력하게 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프게 씨앗을 뿌릴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 학교 본부는 개교 백주년을 맞이해 새로운 슬로건을 정했다. "기억할 것보다 기대할 것이 더 많습니다." 백주년기념관 로비에 자리한 박용곤 두산 명예회장의 조각을 바라보며, 나는 가만히 헤아렸다. 기업가의 부조상은 어떤 기억을 담고 있을까. 전량 수거된 교지를 기억할까. 타워크레인에 오른 이름을 기억할까. 백만 원짜리 자보를 기억할까. 파란 압수수색 상자를 기억할까. 교수 연구실에 붙은 포스트잇을 기억할까. 과연 어떤 기대를 담고 있을까.

이상민 학생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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