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별주부전』 이야기 아시죠? 병든 용왕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간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던 토끼가 육지에 간을 빼놓고 왔다는 거짓말로 용궁을 빠져나온 이야기죠. 판소리로, 전래동화로 오늘날까지 전해져오는 이 이야기의 발단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642년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최고 권력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같은 해 신라는 백제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죠. 당시 신라 귀족이었던 김춘추는 고구려를 방문해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도리어 조령과 죽령 이북 땅을 내놓으라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결정 권한이 없다고 말하는 김춘추를 가두어버렸죠.

  위기에 처한 김춘추는 고구려 관리 선도해에게 뇌물을 주고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선도해는 오늘날 『별주부전』으로 알려진 토끼와 거북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 말의 뜻을 간파한 김춘추는 연개소문에게 땅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신라로 돌아간 김춘추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마치 ‘토끼’처럼 말이죠.

  위 설화는 연개소문과 김춘추의 관계 및 특징을 잘 드러내줍니다. 연개소문과 김춘추는 삼국통일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앞둔 7세기 말 각각 고구려와 신라의 국운을 걸고 경쟁을 벌인 라이벌이었습니다. 강응천 대표(문사철 대표)에 따르면 연개소문과 김춘추가 보인 리더십의 유형은 매우 달랐다고 합니다. “연개소문이 강력한 자주성의 화신이었다면 김춘추는 외교의 귀재였죠.”

  연개소문은 강력한 결단력을 바탕으로 강경한 대외정책을 펼친 정치가였습니다. 위의 일화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김춘추의 꾀에 넘어간 듯 묘사되지만 어찌 보면 연개소문은 현실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이제 막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 입장에서 약소국이었던 신라 때문에 굳이 새로운 전쟁에 뛰어들 필요는 없었던 거죠. 오히려 신라에 고구려의 위세를 과시함과 동시에 백제와 신라의 다툼을 방관함으로써 당과의 관계에 먼저 집중하려는 고도의 전략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는 천리장성을 쌓고 다수의 고-당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 당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죠.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당태종조차도 고구려를 쓰러뜨리지 못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지독한 독재자였습니다. 연개소문이 쿠데타와 독재로 유지한 불안정한 정치구조는 뒷날 그 아들들의 내분을 초래했습니다. 내분은 국정 혼란으로 이어졌고 결국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연개소문은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행사함으로써 결론적으로 고구려의 멸망을 재촉한 셈이죠.

  반면 김춘추는 위의 일화에서 드러나듯 뛰어난 외교술을 갖춘 외교 전문가였습니다. 삼국 가운데 가장 힘이 약했던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역이 된 데에는 김춘추의 공이 컸죠. 김춘추는 앞서 고구려와의 협상에 실패하자 당나라에 손을 뻗었습니다. 한반도 삼국 중 백제와 고구려 모두와 등을 지게 된 상황에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거죠. 결국 그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격해 무너뜨림으로써 삼국통일의 초석을 쌓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가장 큰 비판의 여지를 남겼습니다. 후대에 사대주의의 그림자를 드리운 장본인이라는 거죠. 또한 옛 고구려 땅의 상당 부분을 당에게 넘긴 채 불완전한 통일을 이뤘다는 비판도 존재합니다.

  연개소문과 김춘추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졌습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김춘추를 높게 평가했죠. 당시 지배적이었던 성리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김춘추는 흔들리던 신라 왕실을 바로잡고 신라의 번영과 삼국통일을 이끌어낸 훌륭한 군주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당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당을 섬겼다는 점에서 당시 중국 사대주의 역사관에 잘 들어맞았습니다. 반면 연개소문은 반란을 일으켜 임금을 죽인 역적이자 중국 황제에게 저항한 역적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죠.

  근대사회에 들어서 두 인물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민족주의 역사학에서는 김춘추를 민족 반역자로, 연개소문을 민족 영웅으로 본 것이죠. 강응천 대표는 ‘사대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가장 큰 이유로 꼽았습니다. “민족주의 역사학은 조선이 망한 원인을 사대주의에서 찾았어요. 그래서 김춘추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을 멸망시킨 사대주의자로 매도한 한편 연개소문은 외세에 맞서 나라를 지켜낸 영웅으로 찬양했던 거죠.”

  살아서는 적국의 지도자로 대립하고 죽어서는 찬사와 비난을 번갈아 들으며 서로 엇갈린 운명을 살았던 연개소문과 김춘추. 두 인물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점은 명확하지만 연개소문의 자주성과 김춘추의 외교술은 오늘날 우리가 되새겨야 할 소중한 역사적 자산임에는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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