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말선초 격동의 시기,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정도전인데요. 정도전은 당시 문란했던 고려의 정치체제를 무너뜨리고 성리학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역성혁명을 감행했죠.


  조선에 정도전이 있다면 러시아에는 트로츠키(1879~1940)가 있습니다. 필명 ‘트로츠키’로 더 잘 알려진 그의 본명은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슈타인(Leib Davidovich Bronstein)인데요. 레닌과 함께 러시아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사회주의 혁명가입니다.

러시아 혁명 당시 적군(赤軍)을 지휘하는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 당시 적군(赤軍)을 지휘하는 트로츠키.

  트로츠키는 흔히 ‘러시아의 정도전’으로 비유되곤 하는데요. 김엘리 교수(다빈치교양대학)는 두 혁명가가 비슷한 인생 노선을 걸어왔다고 평가했습니다. “정도전과 트로츠키는 각각 이성계와 레닌에 의한 역사 속 2인자였어요. 또한 1인자의 후계자에 의해 숙청당했다는 공통점도 있죠.”
실제로 정도전은 개혁의 중심에 이성계를 세워두고 그를 조선의 초대 임금으로 추대했습니다. ‘재상 중심 정치’라는 조선 정치체계의 기반을 닦은 조선 건국의 실질적 일등 공신은 본인이었는데도 말이지요. 조선 개국 이후에도 정도전의 활약은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조선의 수도를 건설하고 「경국대전」의 출발인 「조선경국전」을 지으며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죠. 그러나 이후 그는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 의해 피살당해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합니다. 정도전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추구한 반면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을 지지하는 등 국가운영 방향에 대한 뜻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트로츠키 또한 유사한 행보를 보입니다. 그는 레닌과 함께 러시아혁명을 이끌며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을 건설한 핵심인물이었습니다. 레닌이 최고지도자로 내세워지기는 했으나 트로츠키는 개국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레닌의 후계자로 지목되기도 했죠. 그러나 그는 건국 이후 소련의 기틀을 다진 또 다른 정치인 스탈린과 의견 대립을 보입니다. 스탈린은 한 국가가 스스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일국사회주의론’을 주장하며 소련의 입지를 다지는 데 집중하고자 한 반면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을 주장하며 사회주의의 세계화를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트로츠키가 자본주의적 방식을 일부 채택했던 ‘신경제정책’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면서 두 인물 사이의 대립은 더욱 팽팽해졌죠. 결국 레닌이 사망하고 난 후, 그는 스탈린과의 세력다툼에서 패배해 좌천됐다가 암살당하고 맙니다. 정도전과 트로츠키 두 인물 모두 건국 이후 정치적 신념 갈등으로 인해 희생된 것입니다.


  두 인물의 공통점은 이뿐만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뛰어난 군사 전략가였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 이후 요동 정벌을 계획하면서 군사제도를 개혁하고 사병혁파를 추진하는 등 군사적인 측면에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트로츠키의 경우는 혁명 당시 황제의 백군(白軍)에 대항하는 적군(赤軍)을 창립한 장본인이죠.


  또한 이들은 모두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는데요. 정도전의 경우 모계에 천인의 피가 섞여 있었다고 합니다. 신분제 사회에서 천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출세하는 데 큰 약점으로 작용했죠. 트로츠키 역시 혈통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가 유대인 혈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트로츠키는 레닌으로부터 내무인민위원직을 제의받았을 때 “유대인인 나는 소수민족문제를 다루는 데 부적절하다”며 사양했다는 일화도 있죠. 두 인물의 혈통상의 약점은 그들의 개혁에 대한 욕망과 급진적인 정치 성향에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정도전과 트로츠키. 이들은 1인자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불운의 혁명가였습니다. 두 사람의 소름 돋도록 신기한 평행이론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진부한 격언이 되새겨지게 하는데요. 역사는 돌고 돌아 또 반복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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