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는 '미와 공포의 섬뜩한 혼합'이란 평을 받으며 소설가 한강에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을 안겼다.
『채식주의자』는 '미와 공포의 섬뜩한 혼합'이란 평을 받으며 소설가 한강에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을 안겼다.

지금은 수그러들었지만, 올 초만 해도, 미투 운동은 뜨거웠다. 서지현 검사의 용기는 있는 폭로로 시작된 미투 운동은, 정치권, 연예계까지 불붙듯 타올랐다. 그러나 평범한 우리들의 세계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변화를 이끌고 온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술을 먹을 때, 조금 더 조심할 뿐, 근본적으로 있던 잘못된 관념과 행동들이 변화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는 이런 우리들의 모습들을 총체적으로 담아낸 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현실을 기반으로 창조해 놓은 새로운 가상 세계이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적나라하게 현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페미니즘을 대하는 태도들

  우선 미투 운동과 같은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크게 4가지의 반응과 태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무지형이다. 기존 남성 가부장적 현실에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 권력을 남용하거나, 회피하기 급급한 존재들이다. 또 다른 반응은 위선이다. 분명 기존 남성 가부장적 현실에 문제를 느낀다. 그러나 그 부당한 권력을 내려 놓지는 않는다. 조금 감정을 담아 폄하해 말하면, 입진보, 입페미다. 비슷한 유형으로는 소시민이 있다. 마초적 문화에 문제를 느끼고 자신이 그런 문화에 일부에 있다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그 문화를 개선하는 것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는, 그 문제를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인 진보가 있다.

  소설에 위 상징을 대입해 분석하기 전에, 소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하겠다. 이 장편 소설은 객체화된 주인공 영혜를 중심으로, 영혜의 가족들이 영혜를 대하는 심리를 서술했다. 이 장편 소설은 세 개의 중편소설(Part 1 채식주의자, Part 2 몽고반점, Part 3 나무 불꽃)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중편소설에서 한 명의 인물이 주도적으로 내면을 서술하며 서사를 이끌어 간다.

  Part 1: 채식주의자

  우선 채식주의자에 있는 상징 논하기 전에, 간략하게 줄거리를 소개하겠다. 영혜는 피가 떨어지는 고깃덩어리 꿈을 꾸고 두려움을 느낀다. 그 이후 육식을 금한다. 이때 이 소설을 이끌어 가는 인물인 남편은 이를 이해하지 않는다. 또한 영혜의 가족들 역시 이해하지 않고, 영혜에게 육식을 강요한다. 그러나 영혜는 자해를 한다. 그리고 영혜의 남편은 이혼을 하고 이 중편소설은 끝난다.

  한국 사회를 상징한다

  Part 1은 『채식주의자』라는 이 장편소설과 같은 이름을 갖고 있다. 그만큼 가장 눈에 띄는 갈등을 보여준다. 우선 남편은 위 4가지의 태도 중 무지를 상징한다. ‘P13 나는 우리의 생활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으리라고 상상한 적이 없었다.’ 여기를 보면, 그는 지속적으로 아내가 그에게 복종하고 지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현실 개선 의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 ‘P38, 39에 이상한 여자와 산다 해도 나쁠 것 없겠다고 나는 가끔 생각했다. (중략) 밥을 차려주고 집을 청소해주는 누이. (중략) 나는 술기운에 기대어 아내를 덮쳐 보기도 했다.’ 여기에는 현재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대표적인 억압들을 서술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시선에 따른 구색 맞추기, 그저 가사노동만을 하는 존재, 성적 대상화된 존재. 현재 한국 사회가 가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을 요약해 놓았다. 즉 이렇게 수많은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사회를 상징하고 있다.

  필자가 이 소설에서 독특하다 생각했던 것 중 하나가 그녀의 내면 서술은 꿈을 통해 추상적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상징을 찾기 위해서는 그녀가 단편적으로 서술한 꿈과 남편을 통해 서술된 그녀의 습관을 따라가야 한다. 이를 종합적으로 분석했을 때, 그녀는 진보라는 태도를 지닌 사람이라 볼 수 있다. ‘P12 결혼한 뒤 아내는 집에서 아예 브래지어를 벗고 지냈다.’ 여기서 브래지어는 이 소설의 종합적 맥락을 봤을 때, 부당한 여성 억압을 상징한다고 본다. 그리고 다음으로 한 꿈을 보겠다. ‘P19 (중략)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린 대 막대들에 매달려 있는 것 (중략) 하지만 난 무서웠어. 아직 내 옷에 피가 묻어 있었어.’ 영혜는 고깃덩어리들에 무서움을 느낀다 볼 수 있다. 우선 고깃덩어리는 동물의 세계를 상징한다. 동물의 세계는 약육강식 세계이다. 즉 지배-피지배 프레임을 상징한다. 따라서 위에 언급한 두 상징을 종합해 볼 때, 단순히 성별이 다른 이유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관계가 무서운 것이며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녀가 진보인 것은, 그 무서운 것에 순응하고, 그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하며 평등한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극단에 있는 무지와 진보 사이에서 무수히 다툼이 있다. 소설 속에서 채식주의라는 유의미한 논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상징을 생각해 볼 때, 절대 단순한 투쟁이 아니라 볼 수 있다. 추가적으로 꿈에 대해 해석해보고자 한다. ‘P31 육식은 본능이에요 채식이란 본능을 거스르는 거죠.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전형적인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물론 골고루 먹는 것이 몸에 좋다. 하지만, 우리의 본능은 종종 우리의 도덕과 반대로 운동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근 적절치 못한 본능에 충실한 식습관에 따라 성인병이 급등한 것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본능에 충실함을 요구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꿈 하나를 더 해석해 보겠다. ‘P36 누군가가 사람을 죽여서…… 깨는 순간 잊었어. 죽인 사람이 난지, 아니면 살해된 쪽인지.’ 이는 자신이 지배하는 계층임에 동시에 지배당하는 계층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지배와 피지배 관계 속에서는 언제나 관계가 유동적인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Part 2: 몽고반점

  우선 여기까지 채식주의자의 상징을 말하고, 두 번째 소설 몽고반점에 대해 논하도록 하겠다. 몽고반점의 주체는 영혜의 형부다. 그는 영상 예술가로서 현실 흑백 예술에 회의를 느낀다. 그러다 꽃의 색채에 매료된다. 그리고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자 몽고반점과 꽃의 융합이란 예술적 영감에 사로잡힌다. 결국 영혜와 그는 몸에 꽃을 그리고 성관계를 맺는다. 또한 그 다음 날 영혜의 언니가 그것을 보며 모든 관계는 파탄이 나고 끝난다.

  예술론의 변화 그리고 불완전한 결과

  굉장히 충격적인 스토리라인이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난해한 부분이었다. 형부의 역할이 무엇인지 감을 잡기 굉장히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상징을 대입해보면 생각보다 쉽게 해석할 수 있다. 우선 기존 현실 흑백 예술은 가부장적 사회 질서를 의미한다. 흑백의 이분법을 지배-피지배의 관계로, 현실은 말 그대로 가부장적 사회 현상을 찍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새롭게 변한 그의 예술 지향점은 색이 있는 꽃이다. 색은 다양화를 통해 만인의 존재를 존중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꽃 역시 하나의 식물이다. 식물은 무생물들의 작용으로 어떠한 생명체를 지배하지 않고 살아가는 평화를 상징한다. 따라서 그는 기존 가부장적 질서에 문제를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진정 진보라 보기 힘들다. ‘P113 그 안에 아이가 깨거나 할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 부분은 아이를 자고 있을 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아내의 일이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집에 불러 아이를 보게 하고, 아내가 집에 오기 전에 애를 홀로 두고 나가며 한 말이다. 즉 자신이 가부장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문제만 삼고 권력을 남용하는 전형적 모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형부는 위선을 상징한다.

  사실 어떻게 해석할지 모르게 만들었던 부분 중 가장 난해했던 부분이 영혜와 형부가 성관계를 맺은 부분이다. 우선 이를 해석하기 위해 영혜가 몸에 꽃을 그리고 했던 말에 주목해야 한다. ‘P118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꿈(악몽)을 꾸지 않아요.’ 즉 외형적으로 꽃을 그림으로써 외형적으로 그리고 내적으로 식물의 평화가 일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외형의 꽃은 하나의 피아식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형부와 영혜가 관계를 가질 때, 형부는 이미 꽃으로 몸을 도배했다. 따라서 영혜가 같은 존재로 인식해 피아식별에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점에서 형부가 진정한 위선자라 볼 수 있다. 겉으로는 꽃을 받아드리지만, 그저 자신의 욕구를 위한 위장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왜 몽고반점이 소설의 제목인지 이해하는 것도 어려웠다. 우선 몽고반점의 색은 초록색 그리고 파란색이다. 이를 통해 유추해 볼 때, 식물의 시발점이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또한 몽고반점의 특성을 생각해 봐야 한다. 몽고반점은 성인이 되어가며 없어진다. 몽고반점이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의 생각 속 아이들의 이미지는 순수한 이미지다. 물론 현실은 악마일 때도 있지만, 사이 좋게 지낼 때는 아주 평화롭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며 때가 끼고 영악해진다.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교묘히 이용한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며 우리 안의 평화의 씨앗인 몽고반점이 없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영혜는 그 씨앗을 유지하고 평화로의 길을 걸어갔다. 그렇기에 영혜가 예민하게 불합리에 저항한 것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그런 에너지를 지녔기에, 형부가 탐낸 것일 수도 있다.

  Part 3: 나무 불꽃

  마지막 소설 『나무 불꽃』은 영혜의 언니가 모든 사건이 있고 나서 내면 심리 중심으로 서술한다. 그녀는 우선 가장 크게 예술론이 바뀌었다. ‘P160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즉 그녀는 예술에 대해 무지했다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제를 인지하고 원인을 찾는다. 그러다 근원적 원인을 찾게 된다. ‘P192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중략)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만은 조심스러워 했다. (중략)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즉 그녀가 가부장적 지배를 회피하며 영혜에게 모든 억압을 떠밀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깨달음에 따라 그녀의 예술론이 변했다 볼 수 있다. ‘P218 그것은 분명히 충격적인 영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성적인 것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그들의 몸짓은 흡사 사람에서 벗어나오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이는 영혜와 그녀의 남편의 성관계 영상을 보고 난 반응 태도이다. 즉 그것을 예술로 받아 드림으로써 식물의 평화, 즉 가부장적 문제를 인지했다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진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없다. ‘P221 활활 타 오로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를 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이렇게 서술하며 소설을 마친다. 불이란 파멸과 분노를 상징한다. 따라서 그녀가 숲과 식물을 평화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통해 그저 파멸하고자 하는 대상으로 볼 수 있다. 사실 그녀의 그런 분노한 태도를 공감할 수 있다. 그녀는 영혜의 채식주의, 다시 말해 페미니즘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사람이다. 그녀는 아들을 제외한 모든 가족을 잃어버렸다. 또한 아들의 미래 역시 염려할 부분이 있다.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부당한 현실에 분노하는 것보단, 그 부당한 현실을 드러나게 한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것이 쉽다. 따라서 그녀는 그녀의 삶을 망가뜨린 페미니즘에 대해 분노하는 소시민을 상징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영혜가 갖는 의미

  종합하여 정리하면, 영혜는 식물이란 상징을 통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벗어나는, 진보하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트라우마는 악행의 답습이란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개선이란 진보된 형태도 있다. 영혜는 후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무차별적 폭행이 기억 깊숙한 곳에 큰 상처로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하여 더 좋은 사람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에게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로 무리한 본능의 탈선은 결국 우리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을 상징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혜는 육식 그리고 모든 식사를 금하며 건강이 악화된다. 즉 무리한 본능과의 저항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지배-피지배는 인간 역시 동물의 일부로 그 관계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물론 적당주의를 신봉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행위에는 본능도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독단적 주장은 사회를 변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의 독단적 채식주의 그리고 금식은 다른 어떤 가족도 설득하지 못하였다. 사회를 바뀌기 위해선 역사의 흐름 속에서 타당한 주장도 필요하지만, 현실의 시간 속에 사는 존재들의 동의도 필요하다. 따라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많은 이들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주장 그리고 설득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의 현실

  정리하면, 각각의 인물을 통해 무지, 위선, 소시민, 진보 모두 나타났다. 또한 그 현실의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떤 인물인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신을 모른다면, 어떠한 개선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지속적으로 자신을 성찰하지 않으면, 쉽사리 위선에 머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필자 스스로에게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끝까지 밀고 가지 않는 계몽은 오히려 더 위험한 위선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다. 5月 4日 현재 서지현 검사는 2차 피해를 받았으며, 안태근 前 검사장은 출국금지를 당했지만, 수사는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과연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현재 우리가 무엇이 바뀌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뭐가 부족했기에 현재 세상이 아직도 소설 같은 상황인지, 통렬히 성찰해야 할 때라 생각한다.

  추가적인 글쓴이의 이야기

  추가적으로 왜 그런 꿈이었는가라는 의문점이 남았기에 글의 논조와 상관없지만, 비평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꿈은 무의식의 산물이다. 우리의 근원에 있던 그리고 그 근원에 묻어 있던 생각들이 나타나는 곳이다. 영혜는 P191에 서술되어 있듯 가부장적 폭행의 트라우마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P53 내 다리를 물어뜯은 개가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묶이고 있어 다섯 바퀴째 돌자 개는 입에 거품을 물고 있어…… 개는 입으로 검붉은 피를 토해…… (그 개고기를) 나도 한입을 떠 넣었지……아무렇지도 않더군. 그녀의 기억에 잔혹하게 개고기를 먹었던 트라우마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무의식중 가부장적 피지배의 문제가 고기를 통해 투영된 것이다. 그렇기에 육식이 무서웠던 것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굉장히 유기적이고 치밀하게 조직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아이의 말처럼 순수한 어조로 되어있지만, 순수한 아이의 말이 더욱더 잔인한 것처럼, 현실의 잔혹함을 적나라하게 서술합니다. 이 글을 읽고 저는 가볍지만 단단한 알루미늄으로 맞은 것 같았습니다. 언제나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생각합니다. 그 대척점인 추를 거론하여 미로 향하는 것 역시 아름다움, 좋음의 이데아로 나아가는 예술이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그 방향을 명확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글을 읽어 제 프레임으로 글을 읽으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다만, 언제나 미의 개수는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 수만큼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삶은 인타라망의 그물과 같이 상호작용을 하며 살게 되어 있기에 이를 기반으로 새롭게 읽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독창적이지만, 이런 의견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더욱 진보되고 아름다움을 읽으실 수 있길 바랍니다.

  자연에서 벗어난 인간은 언제나 자연의 규칙을 벗어나 문명사회를 구축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본능에서 벗어나 세상을 합리적으로 바꾸는 것 역시 우리만의 독특한 본능입니다. 본능을 따르지만, 그것 역시 지배하는 문명인이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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