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 명가’ 중앙대가 배출한 레전드 농구스타가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주인공은 바로 ‘스피드를 겸비한 빅맨’, ‘블록슛 황제’라고 불리며 KBL 역사상 손꼽히는 레전드로 평가받는 전 프로농구 선수 김주성(사회체육학부 98학번). 그는 지난달 18일 열린 KBL 플레이오프 챔피언결정전 6차전을 끝으로 화려한 선수 인생 대장정을 마쳤다. 신인상부터 수차례의 최우수 수비상, 베스트 5, MVP, 그리고 마지막엔 식스맨 상까지 거머쥐며 ‘레전드’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은 역사를 기록한 그의 농구 인생을 추억해본다.

사진 최지환 기자
사진 최지환 기자

'무적' 중앙대를 이끌며
농구 코트 위에서
화려하게 비상했던 시절

겸손한 카리스마로
팀을 이끌어갈
그의 앞날이 기대된다


빼어난 신예가 나오면 ‘제2의 김주성’이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그만큼 농구선수라면 누구나 탐낼만한 이력을 가진 그는 선수 생활 내내 성실한 자세와 헌신적인 플레이로 팬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했다. 그는 자신을 ‘조용히 숨어있는 선수’라고 평가했지만 농구계에서 누구보다 눈에 띄는 선수였다. 이젠 16년 프로 선수 생활을 마친 김주성 선수를 떠나보낼 때다.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올 그를 기대하며 그의 농구 인생을 들어봤다.

  -은퇴 직후여서인지 홀가분해 보인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마치 시즌이 끝난 뒤 휴가를 보내듯 지내고 있어요. 원래 시즌이 끝나고 두 달간 휴가 기간이거든요. 특별한 건 없고 가족과 함께 보내고 있죠. 오는 8월엔 ‘농구 선진국’ 미국으로 지도자 연수를 떠날 예정이에요.”

  -무엇을 배울 예정인가.
  “거창한 연수는 아니에요. 영어도 배우고 미국에선 어떻게 시합을 치르고 준비하는지, 그리고 운동은 어떻게 하는지 다양하게 보려고 해요.”

  -지난 2일엔 안성캠에 들러 후배들의 동국대전 경기를 관람했다고.
 
“경기는 졌지만 한 게임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스포츠라는 게 우리 팀이 잘한다고 항상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운도 따라줘야 하고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하니까요. 같이 온 송영진 선배도 식사자리에서 말했어요. 다음 게임을 잘하기 위한 초석으로 생각하라고요.”

  -돋보인 선수가 있었다면.
  “센터 포지션의 2학년 박진철 선수가 잘하더라고요. 웨이트가 잘 돼 있고 점프가 좋아서 가능성이 커 보여요.”

  -중앙대 농구가 예전보다 주춤한다는 평가를 받는데.
  “대학 농구도 흐름이 있어요. 스카우트에 따라 흐름이 많이 바뀌죠. 최근 스카우트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었지만 양형석 감독님이 오신 이후로 팀을 다잡고 선수들도 잘해줘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죠. 여기서 오버페이스하면 부상이 나올 수 있어요. 지금처럼 꾸준하게 한다면 다시 흐름이 우리 쪽으로 오지 않을까 생각해요.”

  김주성 선수가 농구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뛰어난 두각을 드러낸 건 아니었다. 그의 잠재력이 제대로 터진 건 중앙대 시절이다. 그는 대학 최고의 센터라는 평가를 받으며 ‘무적’중앙대를 이끌었다. 그가 중앙대에 몸담은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중앙대는 농구대잔치 3연패와 수차례의 대학농구연맹전 우승을 차지했다. ‘허동택 트리오’에 이은 또 한 번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마침내 대학농구 코트를 넘어 국가대표 코트까지 반경을 넓혔다. 대학교 1학년 때 이미 허재, 강동희, 문경은, 전희철 등 쟁쟁한 선배들과 함께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목에 거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다른 선수 보다 농구를 늦게 시작했다고 들었다.
 
“맞아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정식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전까진 그저 키가 크고 친구들과 농구하기 좋아하던 학생이었죠. 농구대잔치나 농구드라마, 슬램덩크 등 농구가 인기 많던 시절이기도 했죠. 자연스레 농구 선수를 하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어요. 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농구할 수 있는 학교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죠.”

  -단순한 흥미를 넘어 농구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었나 보다.
 
“공부가 안된다는 걸 미리 알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웃음) 지방에선 키가 큰 축에 속했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데려갈 만했겠죠.”

  -농구를 시작한 지 1년만인 고등학교 2학년 때 청소년 국가대표로 발탁됐는데.
 
“실력보단 키 때문이죠. 그게 벌써 20여 년 전 일이니까 키 큰 선수가 드물던 시기예요. 하지만 청소년 대표팀에선 시합을 거의 안 뛰었어요. 워낙 기량 좋은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에 저는 견학하고 온 느낌이었죠.”

  -이후 중앙대에 입학한 계기가 있나.
 
“당시 중앙대 체육부장이셨던 정봉섭 부장님의 스카우트로 중앙대에 오게 됐어요. 고등학생 때부터 저를 알아봐 주신 분이죠. 제가 어려운 환경인 걸 알고 물심양면으로 꾸준히 도와주셨거든요. 당연히 중앙대에 진학하기로 결정했죠.”

  -안성캠에서 보낸 새내기 시절은 어땠나.
 
“1, 2학년 땐 조금 힘들었어요. 고등학생 때보다 훈련량도 늘었고 부모님과 처음 떨어져 숙소 생활을 하게 됐으니까요. 향수병도 있었죠.”

  -대학 시절 어떤 선수였나.
 
“열정적인 학생이었죠.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열심히 했어요. 동료와 의지하면서 정신없이 농구하고 농구 외의 생활도 즐거웠어요. 선후배 관계없이 워낙 친했거든요. 평일 내내 붙어 있는데도 토요일에 외박을 나가면 항상 다시 모였어요. 저녁에 술 한잔하고 다음날 같이 모여 학교로 들어갔죠.”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
 
“오래돼서 가물가물한데….(웃음) 4학년 때 열린 농구대잔치 준우승이 기억에 남아요. 3학년 때까지 농구대잔치 3연패를 달리다가 4학년 때 상무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거든요. 아쉬워서 기억에 많이 남네요.”

  -대학교 1학년 때 성인 국가대표로 발탁되기도 했다.
 
“무서웠어요.(웃음) 선배들이 못 되게 한 것도 아닌데 지레 위축되기도 했죠. 오죽하면 선배들한테 ‘어리바리’로 통했어요. 국가대표인만큼 정말 잘하고 싶은 마음도 컸어요. 지기 싫었죠.”

 -지난 1월 ‘올스타전 3x3 대학 OB 최강전’에서 중앙대 OB팀으로 참가해 우승했다. 감회가 새로웠겠다.
 
“무엇보다 그 경기에서 꼭 이기고 싶었어요. 후배들에게 돌아가는 상금이 걸려있었거든요. 시합에 들어가기 전에 다 같이 ‘꼭 우승해서 후배들한테 상금을 주자’고 다짐했어요. 이왕 걸려있는 상금을 후배들이 쓴다면 더 좋잖아요. 그래서 다들 죽기 살기로 했네요.”

  프로 무대에서 김주성 선수는 ‘만능 플레이어’로 통했다. 특히 그는 수비를 중심으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팀에 공헌했다. 거기에다 탁월한 득점력까지 가졌다. 그의 업적은 어떤 수식어와 여느 평가보다도 기록이 말해준다. 통산 블록슛 1위, 통산 득점과 리바운드 2위, 역대 통산 세 번째 1만 득점 달성, 정규리그 5회 우승, 챔피언결정전 3회 우승,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및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우승 등 그 누구의 커리어와도 비교 불가한 선수다.

  -대학 생활을 마치고 지난 2002년 ‘원주 TG삼보’에 입단했다. 프로팀에 처음 들어왔을 때 어땠나.
 
“대학 시절보다 자유로웠어요. 선배들과 나이 차가 많아서 어리광도 부릴 수 있었죠. 그래서 오히려 편하기도 했고요. 선배들이 보기엔 마치 파닥대는 느낌이었을 거예요.(웃음) 또 프로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고민됐죠.”

  -신인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발탁된 선수였는데도 고민이 있었나.
 
“‘1순위로 뽑힌 선수로서 뭔가 보여줘야 하는 건 아닌가’하는 스트레스나 압박이 있었죠. 저에 대한 평가가 반반 나뉘었는데, 의문을 가진 이들에게 반박할 수 있는 플레이를 보여주려고 노력했어요.”

  -‘기록의 사나이’라 불릴 정도로 업적이 많다. 가장 맘에 드는 타이틀은.
 
“블록슛 1위가 가장 맘에 들죠. 유일하게 ‘1’이 붙어있고 제 장점이기도 하니까요. 후배 중에 깰 선수가 많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을까요.”

  -수비가 장점인 선수인데도 득점이 상당하다는 특징이 있다.
 
“저한테도 1만 득점 달성은 정말 의미가 커요. 운동을 늦게 시작한 편이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부족했어요. 스스로도 공격 면에선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죠. 선수 시절 수비에서 두각을 나타낸 편이었는데 열다섯 시즌이 지나고 뒤돌아보니 1만 득점 가까이에 와 있었더라고요. 공격적인 선수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와있는지 신기했어요. 1만 득점까지 20점, 10점이 남았을 땐 신경이 쓰이고 떨렸네요.(웃음)”

  -프로 데뷔 이후 16년 동안 원주팀에만 몸을 담았다. 이적이 잦은 프로 세계에서 쉽지 않은 행보인데.
 
“처음엔 저도 예상 못 했어요. 사실 이적을 할 수도 있었고 그럴 뻔한 상황도 있었는데 비슷한 조건이라면 한 팀에 계속 있는 게 낫다고 판단했어요. 마음이 친정팀에 머무른 것 같네요.”

  -덕분에 팀도 김주성 선수 덕을 톡톡히 봤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정말 감사하지만 팀 구성이 좋았던 거죠. 용병 선수라든지 팀에 좋은 동료들이 많았어요. 운 좋게 맞아떨어진 게 아닌가 생각해요.”

  -은퇴 전까지 꾸준한 활약을 보여준 비결이 있다면.
 
“젊어야만 열정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나이 많은 선수도 열정이 있으면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잘해야 한다는 욕심보다 내게 맞는 플레이를 해야 하죠. 젊은 선수처럼 못 뛰어다니면 그 상태에서 어떤 플레이를 할 수 있는지 찾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16년의 선수 생활을 거치며 스스로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나.
 
“신인 시절엔 어리광을 부리는 후배였다면 그런 후배를 받아주는 선배가 된 거죠. 후배 입장이었던 시절 제가 맘 편히 운동할 수 있도록 선배들이 도와줬기 때문에 저도 그런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어요. 쓸데없는 말도 많이 하고 후배에게 장난도 자주 건넸죠. 그래도 후배들이 저를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었을 거예요. ‘형이 어려운데 우리한테 다가와 주려 노력하는 걸 알고 있다’고 말을 하기도 해요.”

16년의 프로 선수 생활을 마친 그가 지난달 18일 선수로서 작별 인사를 마쳤다. 그는 원주 DB 프로미의 기둥이자 훌륭한 팀플레이어로 평가 받는다. 사진제공 원주 DB 프로미
16년의 프로 선수 생활을 마친 그가 지난달 18일 선수로서 작별 인사를 마쳤다. 그는 원주 DB 프로미의 기둥이자 훌륭한 팀플레이어로 평가 받는다. 사진제공 원주 DB 프로미

  2017-2018시즌을 끝으로 김주성 선수를 더 이상 코트에서 보지 못한다. 그는 지난 1월 서울 SK 나이츠와의 경기에서 열린 은퇴 투어를 시작으로 9개 구단 원정 경기에서 은퇴 투어에 나섰다. 프로농구에선 서장훈 이후 두 번째 은퇴 투어다. 마지막 해까지 그는 ‘원주 DB 프로미’를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승리의 버저비터를 울렸다. 비록 선수로서는 마지막 인사를 나눴지만 끝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으로 귀결되는 법. 지도자로 팬들과 벤치에서 만날 날을 준비 중이다.

  -각 구단에서 김주성 선수를 위해 특별한 은퇴 투어 이벤트를 준비했더라.
 
“아, 은퇴 투어라는 말은 거창한 것 같아요. 개인적으론 은퇴 투어라기보다 소소하게 은퇴를 기념하고 싶었어요. 원래 선물도 안 받기로 했는데 다들 부담이 됐는지 선물도 하나씩 준비해주셨더라고요.”

  -은퇴 투어 중에 특히 나눔 이벤트가 인상 깊었다.
 
“기부를 함께 하고 싶어 나눔 이벤트를 준비했어요. 추첨을 통해 유니폼을 증정하는 이벤트였죠. 응모하는 과정에서 모인 수익금은 ‘대한장애인농구협회’에 기부했어요. 꽤 많은 금액이 모였는데 좋은 곳에 기부할 수 있어서 뜻깊었죠.”

  -평소에도 사회 공헌에 뜻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부모님이 장애가 있으셔서 어렸을 때부터 다른 분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도와준 분이 많아요. 부모님도 ‘네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남 도와주는 일을 꾸준히 하라’고 하셨죠. 부모님 말씀을 항상 새겼고 그래서 선뜻 기부에 나설 수 있었어요.”

  -지난달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감정이 싱숭생숭했겠다.
 
“경기장에서 라커룸까지 길을 걷는데 ‘마지막 길이네’하는 생각에 기분이 이상했어요. 정규리그는 우승 했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 패한 게 아쉽기도 했고요. 개인적인 아쉬움이 남는다기보다 마지막으로 팀에 우승을 선물해주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웃음).”

  -은퇴하는 소감이 어떤가.
 
“직업으로서 한 일생이 끝나는 거니까 아쉬운 부분이야 조금은 있죠. 가장 아쉬운 게 있다면 부모님이 유일하게 나들이 나오실 때가 제 시합 관람 오실 때였거든요. 이제 부모님께서 그러지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좀 아쉽네요. 그래도 홀가분한 마음이 훨씬 커요.”

  -그렇다면 언제 농구장에서 다시 볼 수 있나.
 
“돌아올 날은 모르겠어요.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 길 수도, 짧을 수도 있겠죠. 감독이 되기 전에 코치라든지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죠. 어떤 팀이든 저를 써줄지 잘 모르겠지만요.(웃음)”

  -마지막으로 김주성 선수를 그리워 할 팬들에게 한마디 남긴다면.
 
“그동안 체육관에 찾아와주시고 농구를 열심히 봐주셔서 항상 감사했어요. 열심히 노력해서 꼭 다시 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처럼 농구를 사랑해주셨으면 좋겠고 다시 돌아오는 날 인사드릴게요.”

지난 3월 13일,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부산 KT전에서 아버지와 사진을 찍고 있다. 그는 부모님이 가르쳐주신 나눔의 가치를 가슴에 새기며 기부 활동을 펼친 선수로 유명하다.사진제공 원주 DB 프로미
지난 3월 13일,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부산 KT전에서 아버지와 사진을 찍고 있다. 그는 부모님이 가르쳐주신 나눔의 가치를 가슴에 새기며 기부 활동을 펼친 선수로 유명하다. 사진제공 원주 DB 프로미

  당신에게 중앙대란?

  “제게 중앙대란 ‘비상’이에요. 마치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듯 제가 비상할 수 있는 곳이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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