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에 접어든 유럽 사회에서는 전통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예술에 대한 욕구가 커졌습니다. 이 중심에는 오스트리아가 있었죠. 오스트리아의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당시 미술계에서 시도하지 않은 구성으로 많은 이들에게 강렬한 눈도장을 찍었습니다. 클림트를 뒤이은 에곤 쉴레(1890~1918) 또한 그만의 ‘아르누보(art nouveau)’를 선보였죠. 자 그럼,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의 아르누보’ 강연으로 들어가 볼까요?

“각 세기마다 고유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 빈 분리파

“예술가라면,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이라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을 이용해서

지금까지 없던 걸 만들어내는 힘이 있어야 한다.” - 상징주의 화파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떠올리면 ‘음악의 도시’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모차르트, 슈베르트, 하이든 등 세계적인 음악가를 다수 배출해낸 도시이기 때문이다. 음악으로 더 잘 알려진 비엔나는 기존 예술을 거부하고 새로움을 추구한 아르누보(art nouveau) 미술의 거장을 탄생시킨 도시이기도 하다. 그 주인공은 바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다. 안현배 강사(성공회대 교양학부)와 함께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의 아르누보’를 주제로 1900년 비엔나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를 만나봤다.

  새로운 예술의 탄생

  “19세기까지 유럽 예술에서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것은 칭찬이 아니었어요. 모방이 더 위대한 가치였죠.” 안현배 강사는 ‘인간은 이데아를 설정해 놓고 거기에 다가가도록 돼 있다’는 플라톤의 구절을 언급하며 서양 예술에서는 예술의 정수인 고전시대의 아름다움을 좇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는 14~16세기에 발생한 ‘르네상스(Renaissance)’의 의미를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로의 회귀에서 찾는 것도 이러한 인식과 맥을 같이했다. 안현배 강사는 르네상스로 되살려진 고전 예술은 이후 몇백 년 동안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오랜 기간 이어져왔던 고전예술은 산업혁명이라는 사회적 변화에 의해 또 다른 전환점을 맞게 됐다.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유럽에서 도시의 자본은 급속도로 팽창했다. 이후 부를 축적하는 새로운 계층이 생겨났고 공장주나 대규모 자본가는 노동력 확보를 위해 많은 사람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요구는 많은 인구가 도시에 급격히 유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계층 간 격차는 증폭됐고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 계층은 노동자와 차별화를 추구했다. “도시가 성장하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도시에 똑같은 집과 아파트가 많이 생겼어요. 남들과 다름을 뽐내고 싶었던 사람이 독특하고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도록 했죠.” 안현배 강사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유럽 예술이 그동안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했다고 말했다. 아르누보의 탄생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응답이었던 셈이다.

  기존의 예술 영역에서는 여전히 전통과 규정이 엄격하게 작용했지만 건축, 의상, 산업 디자인 등의 분야에서는 시대상을 반영한 새로운 미(美)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아르누보에는 규칙과 패턴이 없고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지나치게 화려한 양식이 주가 됐다. 독특함을 위해 사람들은 막대한 돈을 투자했으며 비효율적인 수공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아르누보 예술은 스페인 건축가 가우디, 영국의 밀레이 등을 탄생시키며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유럽 전역을 지배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오스트리아,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가 있었다.

  혼돈의 세기말, 향락의 도시 비엔나

  안현배 강사는 과거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광을 재조명했다. “19세기까지 오스트리아는 유럽 영토의 40%를 차지하는 대제국이었어요.”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 중 하나였던 오스트리아는 19세기 후반에 독립적인 민족국가의 등장으로 인해 점점 무력해졌다.

  기울어가는 오스트리아 사회를 지배한 것은 ‘향락’이었다. 19세기 오스트리아 비엔나는 유럽 성(性) 산업의 최고봉이라 불릴 정도로 향락 문화가 발달했으며 거리에는 술과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로 넘쳐났다. 19세기 말 비엔나가 맞이했던 아르누보의 키워드는 ‘향락’이었던 것이다.

  비엔나가 특히 ‘성(性)’ 문화에 빠져든 데에는 다른 이유도 존재했다. 안현배 강사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잘 알려진 프로이트는 비엔나에서 가장 유명한 심리학자였어요. 그는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기가 성적 욕망과 충동이라고 밝혔죠.” 개방적인 비엔나 문화도 한몫했지만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가 발표한 이론은 비엔나 민중의식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이후 비엔나 예술가들이 ‘성’에 몰두하게 된 근거가 됐다.

  구스타프 클림트, 팜므파탈을 그리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장식미술학교 출신으로 동생과 함께 극장이나 미술관을 보수하는 일을 했었다. 보수 작업을 통해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이따금 벽화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클림트가 접한 운명은 페르낭 크노프의 「애무」였다. 이 작품에는 동물과 사람의 경계도, 남성과 여성의 경계도, 두 생명체의 관계도 전부 모호하게 나타난다. 기존에 인간의 의식 속에 존재했던 모든 경계선을 허물고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보여준 것이다. 이 작품에 크게 감명받은 클림트는 이후 크노프의 영향을 따르면서도 장식미술가 출신인 자신만의 개성이 반영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전통과 관습을 철저히 거부했으며 오직 그만의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주제를 표현했다. 대표적으로 그가 비엔나 국립대학교에 그렸던 벽화들을 들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소실됐지만 현재 컴퓨터 그래픽 복원을 통해 만나볼 수 있는 벽화 「철학」을 자세히 보면 숨어 있는 얼굴들을 여럿 찾을 수 있다. 그들은 모두 생명과 철학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져있다. “전통에 따르면 정확한 원근법과 삼각형 구도에 의해 주인공이 가운데에 배치되고 주변 인물들은 작게 그려져요. 하지만 이 그림에서는 한쪽에 인물들이 몰려 있고 다른 한쪽은 비어있죠.” 안현배 강사는 구도 측면에서도 「철학」은 획기적인 작품이라고 말했다.

구스타프 클림트, 「철학」(복원), 캔버스에 유채, 430×300㎝, 1907.
구스타프 클림트, 「철학」(복원), 캔버스에 유채, 430×300㎝, 1907.

  클림트는 여느 비엔나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에로티시즘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클림트가 그린 여성과 에로티시즘은 이전의 그 어떤 화가도 시도하지 못한 방식이었다. 그의 작품 속 여성은 노골적이면서도 매혹적인 눈빛을 하고 있다. 기존 유럽 미술에서의 수줍은 듯 시선을 피하는 여성과는 전혀 다른 양상인 것이다.

  클림트의 이러한 색깔은 「유디트」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성서에서 적장을 죽이는 영웅적 자객으로 묘사된 유디트는 클림트의 그림에서 정면을 지그시 바라보며 매혹적이고 독특한 표정을 짓고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Ⅰ」(일부), 캔버스에 오일, 84×42m, 1901.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Ⅰ」(일부), 캔버스에 오일, 84×42m, 1901.

  클림트가 표현한 여성은 흔히 말하는 ‘팜므파탈’에 가깝다. 팜므파탈은 19세기 후반 당시 유럽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다. 안현배 강사는 이러한 개념에 당시 유럽 사회의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고 전했다. “팜므파탈은 무섭고 위험하지만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여성을 뜻해요.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지위가 높아지는 것을 바라보는 남성 사이에서 생긴 말이죠.” 클림트 외에도 당대 여러 작가가 여성을 그리스 신화 속 괴물 메두사, 성경 속 악녀 살로메와 같은 존재로 표현하면서 여성을 무서우면서도 매혹적인 존재로 그려냈다.

  그만의 예술은 화풍에서 끝나지 않았다. 클림트는 장식미술가 출신이라는 특성을 살려 그림을 그리는 재료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을 드러냈다. 작품 「키스」에서 그는 황금을 재료로 선택해 녹여 바르거나 얇게 펴 모자이크로 표현하는 등 화려하고 개성 있는 기법을 사용했다. 이를 통해 클림트는 당시 오스트리아와 비엔나의 향락적이면서도 감각적인 분위기와 에너지를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캔버스에 은박‧금박‧유채, 180×180cm, 1907~08.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캔버스에 은박‧금박‧유채, 180×180cm, 1907~08.

  에곤 쉴레, 같고 또 다르게

  클림트의 스타일을 발전시킨 대표적인 작가로 알려진 에곤 쉴레는 클림트의 제자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클림트가 그의 스케치를 본 후 제자가 아닌 친구가 되기를 청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의 대표작 「포옹」을 살펴보면 ‘성’과 ‘욕망’을 과감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클림트와 비슷하기도 하다. 그러나 드로잉 기법에서는 클림트와 전혀 다른 자신만의 색을 볼 수 있다.

에곤 쉴레, 「포옹」, 캔버스에 유채, 100×170㎝, 1917.
에곤 쉴레, 「포옹」, 캔버스에 유채, 100×170㎝, 1917.

  그는 미성년 소녀를 모델로 누드화를 그려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쉴레는 동네에 고아나 집시 소녀를 모델로 누드화를 그렸어요. 사춘기에 나타나는 미완성의 아름다움을 주장했죠.” 안현배 강사는 쉴레 작품의 예술적 의도를 설명했다.

  또한 쉴레는 뛰어난 상상력과 창의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자기 성찰자Ⅱ(죽음과 남자)」에서 남성 뒤에 붙어있는 존재는 사신, 즉 죽음의 신이다. 기괴하면서도 인상적인 이러한 설정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다수의 영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 등장하며 오늘날까지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에곤 쉴레, 「자기 성찰자Ⅱ(죽음과 남자)」, 캔버스에 유채, 80×80㎝, 1911.
에곤 쉴레, 「자기 성찰자Ⅱ(죽음과 남자)」, 캔버스에 유채, 80×80㎝, 1911.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의 작품을 통해 안현배 강사는 시대 반영론적 관점에서 예술의 의의를 역설했다. “미술작품은 그 시대 사실을 가장 잘 보관하고 있는 역사책이에요. 이 그림들을 이해하는 순간 1900년대 비엔나를 이해할 수 있듯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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