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두 번 그러다가 가해자를 좋아하게 된 것 아니냐, 특채6급 공무원이면 대가성이 있다는 걸 알아야지” 지난 5일,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 의혹이 처음으로 제기되는 기사에는 위와 같은 댓글이 달렸다. 피해자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성폭력을 범죄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담긴 발언이다. 대학가 성폭력 문제를 바라보는 대학 사회의 시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누가 보면 여기 사람 전부가 가해자인 것 같네.” 지난 1월 한 중앙동아리 2차 가해 의혹 사건에서 동아리의 무책임을 질타하는 피해자의 호소에 한 동아리 부원은 동아리 단체 메신저에서 위같은 문자를 보냈다. 대학가 성폭력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도록 ‘허락’한 자는 누구일까. 최근 이어지는 대학가 미투 운동과 함께 대학 내 성폭력 문제의 원인과 그 해결방안을 알아봤다.

 

입막은 재갈은 풀었지만
손발은 여전히 묶여

보호받지 못한 채
가시밭길에 내몰린 그들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씨는 대학교 엠티에 갔다가 남학생들이 자신을 ‘씹다 버린 껌’이라 칭하는 걸 듣고는 이불 속으로 숨어든다.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고 숨도 막혔는데 그냥 계속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야 했다. 오히려 김지영씨가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자신의 존재를 들킬까 조마조마했다.’

  소설 속 김지영씨가 숨어야 했던 지난 2003년으로부터 15년이 지났다. 김지영씨 대신 서지현 검사가 용기를 내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냈다. 이후 세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씹다 버린 껌’들이 ‘Me Too(미투) 운동’으로 조금씩 숨을 터뜨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이불 밖에서 마주한 현실은 아직도 녹록지 않다. 2018년 대학의 모습은 김지영씨가 다니던 대학과 얼마나 달라졌을지, 미투 운동을 따라가며 대학가 성폭력의 현주소를 짚어봤다.

  권력에 가려졌던 그들의 눈물

  지난달 20일 한 온라인커뮤니티에 청주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배우 조민기가 지속적으로 제자들을 성희롱·성추행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교수이자 연예계 선배라는 수직적 권력으로 인해 피해 학생 대부분이 밝히지 못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대학가에도 미투 제보가 이어지고 있다.

  학생들은 주로 SNS, 학내 커뮤니티 등을 통해 이제까지 숨겨야만 했던 성폭력 피해를 고발한다. 지난 1일 서울시립대 학생 커뮤니티 ‘서울시립대 광장’에는 ‘A교수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제보가 올라왔다. “나만 잊고 지내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나 때문에 다른 학생도 피해를 보고 있을까 너무 무섭고 미안했어요.” 가해 교수가 동의 없이 신체를 만지고 강제로 키스를 시도하는 등의 성추행을 저질렀지만 피해 학생은 이 사실을 신고할 수 없었다.

  미투 운동이 활성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학생들이 나서서 자신의 피해를 밝히기는 쉽지 않다. 지난 3일 페이스북 페이지 ‘성신여대 대나무숲’에 한 학생이 B교수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실제로 B교수는 학생의 엉덩이에 손을 대고 학생에게 ‘스폰’을 제안하는 등 수많은 성폭력을 감행하고 있었다. 성적이나 졸업에 있어 불이익을 받을까 알리지 못했던 피해 학생들이 익명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겨우 피해를 털어놓은 것이다. 교수가 학생의 진로 등에 끼치는 영향이 큰 수직적 권력 관계에서는 학생들의 신고에 큰 용기가 필요하다.

  신고가 힘든 피해 학생 대신 동료 교수들이 가해 교수의 성폭력을 대신 고발한 사건도 있다. 하부 권력에 있는 피해자들 대신 C교수와 동등한 권력을 쥔 교수들이 문제를 대신 폭로해 준 것이다. 지난 8일에는 서울대 의대 교수 12명이 동료 C교수의 성폭력을 고발했다. 그들은 C교수가 지도학생, 간호사, 전공의 등을 상대로 부적절한 성적 행위와 성희롱을 반복해 왔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이 계속해서 대학에 지도교수 변경을 요구하고 학내 인권센터에 투서를 제출했지만 별다른 조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후배간 성폭력 문제도 함께 고발되고 있다. 지난달 25일 세종대 한 학생은 페이스북 페이지 ‘세종대학교 대나무숲’을 통해 “신입생 시절 ‘러브샷 5단계’라며 처음 본 남자 선배의 쇄골을 핥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 지시를 거부하자 그는 옆에 있던 여자 선배에게 ‘선배의 말이 우습냐’며 욕설을 들었다.

  상처에 또다시 쏘아진 화살

  대학에 존재하는 수직적 권력 구조 속에서 용기를 내 성폭력 사건을 고발한 피해자들은 ‘2차 가해’란 또 다른 장벽에 부딪힌다. 대표적인 2차 가해는 학내 인권·성평등센터의 부족한 대응이다. 지난달 2월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서는 D교수가 학생 두 명을 성추행한 죄 등으로 법적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법적 처벌이 이뤄지기 전까지 D교수는 6개월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고 보직을 유지하는 등 평범한 학교생활을 이어온 것으로 밝혀졌다. 그 과정에서 피해 학생을 향한 2차 가해가 이뤄졌다. D교수가 학교에 피해학생이 먼저 자신을 유혹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이다. 피해를 고발하는 학생에게 학내 성평등센터는 법원의 판결이 확정되기 전엔 교원에게 어떤 조치를 할 수 없다고 답할 뿐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이후 피해 학생의 주변 관계에서도 2차 가해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7일 페이스북 페이지 ‘미투 대나무숲’에 같은 과 선배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고발 글이 올라왔다. 이 글에는 양궁을 전공하는 피해 학생이 사건 고발 이후 양궁부 내에서 따돌림을 당했다는 내용이 기술됐다. 또한 피해자는 인권·성평등센터로부터 가해 학생과 분리된 공간을 조치 받았지만 학과 사람들로부터 의도적으로 훈련시간을 빼앗겼다고 주장했다.

  또한 피해 사건이 언론에 넘어가 공론화되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발생한 사례도 있었다. 지난 7일 보도된 이화여대 퇴임교수 성추행 사건에 대해 이화여대 페미니즘 동아리 ‘행동하는 이화인’은 사건을 폭로하는 기사가 피해자의 동의 없이 보도됐다고 설명했다. 한 학과의 남 교수 전체가 성폭력 가해자로 고발된 명지전문대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기자가 학생들이 대학에 제출한 진정서를 무단으로 입수해 언론에 공개한 것이다. 이는 피해자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범죄가 아닌 단순히 이슈거리로 소비하는 모습이다.

  ‘행동하는 이화인’ 대표자는 피해자의 동의 없이 사건을 공론화하거나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지 못하는 것 또한 2차 가해라며 이를 비판했다. “권력형 성폭력은 2차 가해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하기 힘든 구조에요. 피해 사실을 밝히는 것부터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고 공론화 이후에도 ‘피해 사실에 대해 이야기해보라, 자신이 허락한 것 아니냐’ 등 2차 가해를 당하죠.”

  “권력 기관에서조차 피해자들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피해자들은 익명으로 폭로를 할 수밖에 없어요.” 서울대 페미니즘 학회 ‘관악의 페미들’은 익명 제보의 진위여부를 의심하기 전에 피해자가 익명으로 말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회 분위기를 성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대학생들의 미투 운동은 대부분 실명을 밝히지 않는 페이스북 대나무숲이나 학내 커뮤니티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미투 운동 자체를 부정하거나 미투 운동이 특정한 목적을 지닌 음해 행위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한 중앙대 학생은 SNS를 통해 수업을 듣는 과정에서 교수로부터 “너네도 내 수업에 불만 있으면 미투든 미쓰리는 알아서 해라”는 발언을 들었다고 밝혔다. 미투 운동의 본질을 폄하하고 이를 단순한 개인의 불만 고발로 취급한 발언이다.

  학교의 울타리는 튼튼할까

  학내 성폭력이 문제가 제보되고 공론화되는 과정에서 대학은 어떤 조처를 취하고 있을까. 여성가족부는 ‘성폭행·성희롱 고충상담창구(상담창구)’ 설치·운영 지침을 모든 대학에 내렸다. 이에 따라 국내 각 대학은 ‘인권센터’, ‘성평등상담실’ 등 다양한 이름으로 상담창구를 운행하고 있다. 경희대, 단국대,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중앙대, 홍익대 등 서울시내 총 7개 대학의 성폭력 처리 규정을 비교해 어떤 조치가 취해지고 있는지 살펴봤다.

  학내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상담센터에 신고할 수 있다. 하지만 특정 기한이 지나면 신고가 불가한 학교도 있다. 7개 대학 중 서울대와 중앙대 두 학교만이 신고 기한 규정을 가지고 있다. 서울대는 사건이 발생한지 6년, 중앙대는 1년 안에 신고를 해야만 사안을 처리해준다. 단 상담센터에서 인정하는 특정 사유가 있는 경우 기한을 조정할 수 있다.

  신고가 접수되면 상담센터는 위원회를 열어 사안을 심의한다. 위원을 구성할 때는 대부분 대학이 성비의 균형을 보장한다. 경희대와 중앙대의 경우 위원 중 한 성별의 비율이 60%가 넘지 않도록 한다. 하지만 이화여대는 아예 위원의 성비 규정이 없다.

  모든 학교가 위원회 구성에 있어 학생의 참석을 보장하진 않는다. 경희대, 이화여대는 피해자가 학생일 때만 학생이 위원회에 참여한다. 홍익대는 ‘학생 관련 사안’에만 학생위원이 참여할 수 있다. “‘학생 관련 사안’이라는 표현은 대학 본부에서 해석하기 나름이에요. 학생들이 피해를 받은 사건임에도 학생이 위원에서 배제될 수 있죠.” 홍익대 하소정 부총학생회장(국어국문학과)은 현재 해당 표현의 개정을 요청한 상태라고 말했다.

  위원회에 대학 본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문제도 있다. 상담소장이 위원장을 지정하는 서울대 외 6개 대학은 모두 교무처장이나 학생지원처장 등 대학본부 보직 교수가 위원장을 맡고 있다. 특히 경희대와 서울대를 제외한 5개 대학은 위원장이 추천하는 추천직 위원에만 학생이나 직원이 포함된다.  이 경우 대학본부 외에 다른 구성원의 의견은 거의 포함되기 힘들어진다는 문제가 생긴다. 한편 이화여대 위원회는 조사를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면 조사를 종결한 후 신고인에게 통지할 권한을 가진다.

  나윤경 교수(연세대 문화인류학과)는 대학별로 다 다른 인권 및 성폭력 사건 해결 위원회 구성 기준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위원회 구성에 있어 누군가의 입김이 들어간다던가, 가해자와 위원이 아는 사이라던가 하는 문제가 발생해서는 안 되죠. 또한 학생 위원회의 참석을 보장해 학생 사회의 권한을 키워야 해요. 학생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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