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와 코끼리.’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부부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겉모습부터 추구하는 미술 세계까지 모든 게 달랐다. 이렇듯 어울리지 않는 듯했던 둘은 모두 민족에 대한 애정과 혁명적인 예술관을 바탕으로 활동했던 혁명예술가였다. 멕시코의 예술과 정치를 나란히 이끌었던 이들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벽화운동, 민중을 계몽하다
  1900년대 초반, 멕시코는 격동의 시기였다. 디아스 독재 체제 아래 소수 특권층이 이익을 독점하고 농민은 착취당하는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이어졌다. 또한 디아스 정권은 외국 자본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이렇듯 불공정하고 종속적인 발전은 멕시코 사회를 잠식시켰고 1910년, 사회적 모순이 극에 달하자 멕시코 국민들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몇 차례의 혁명을 거치면서 멕시코는 혼란과 분열이 뒤엉킨 카오스 상태였다. 새로 들어선 오브레곤 혁명정부는 내전을 종식시키고 경제를 발전시켜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이를 위해 정부는 국민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멕시코만의 ‘민족 정체성’에 집중했다. 박윤정 큐레이터(국민체육진흥공단)는 이러한 가치를 확립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벽화운동’이 등장했다고 말했다. “당시 대다수 멕시코 국민이 문맹이었어요. 그래서 멕시코 정부는 공공장소의 벽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벽화를 그려 민중을 결속시키고자 했죠.” 벽화운동은 정부의 강력한 후원 아래 민중을 계몽하는 정치적 도구 역할을 한 것이다.

  벽화는 멀리서도 눈에 띌 만큼 거대한 규모로 그려졌으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표현됐다. 국회도서관 김태중 해외자료조사관은 벽화운동이 민중예술로서 의의가 있다고 말한다. “가진 자의 몫이었던 미술이 미술관 문턱을 넘어 대중을 위한 예술이 된 거죠.”

  디에고, 혁명예술을 이끌다
  디에고 리베라가 이끈 벽화운동은 대부분 고대 멕시코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 파란만장했던 멕시코 근대사 등을 주제로 다뤘다. “디에고는 「위대한 도시 테노치티틀란」을 통해 멕시코 고대 문명인 아즈텍 제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김태중 해외자료조사관은 디에고가 높은 문명 수준을 자랑했던 아즈텍 사회를 그려냄으로써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했다고 전했다.

 

디에고 리베라 作 「위대한 도시 테노치티틀란」 프레스코, 490X971cm, 1945.
디에고 리베라 作 「위대한 도시 테노치티틀란」 프레스코, 490X971cm, 1945.

  동시에 디에고의 그림에는 윤곽이 뚜렷하고 입체적인 멕시코 전통화풍이 드러난다. 근대화 과정에서 등한시된 원주민 전통문화에 관심을 불어넣고자 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디에고는「꽃 파는 사람」(디에고 리베라, 1935)에서 원색을 풍부하게 사용했다. “디에고는 채도가 높은 원색과 강한 보색 대비를 이용해 화려한 색감을 표현했어요.” 김태중 해외자료조사관은 디에고가 당시 멕시코 예술계에 여전히 지배적이었던 유럽 화풍에서 벗어나 멕시코만의 특색을 가진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디에고 리베라 作 「꽃 파는 사람」 캔버스에 유채, 150X120cm, 1942.
디에고 리베라 作 「꽃 파는 사람」 캔버스에 유채, 150X120cm, 1942.

  근대화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꼈던 당시 멕시코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많은 지식인이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돌렸으며, 이는 디에고의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조은정 교수(한남대 일반대학원 미술학과 겸임교수)는 「우주의 지배자」(디에고 리베라, 1934)를 예시로 소개했다. “작품 속에서 날개와 함께 가장 중심에 위치한 인물은 노동자의 형상이에요. 그리고 오른쪽에 나타난 붉은 깃발은 ‘세계노동자연합’을 나타내죠.” 이 작품에는 공산주의 지도자 레닌도 등장한다. 디에고는 사람들과 함께 손을 잡는 레닌의 모습을 통해 ‘민중들의 연대’를 강조했다. 자본계층이 아닌 민중을 위한 사회를 갈망했던 멕시코 국민에게 그들 간의 연대는 매우 중요한 가치였다.

디에고 리베라 作 「우주의 지배자(부분)」 프레스코, 480X1143cm, 1934.
디에고 리베라 作 「우주의 지배자(부분)」 프레스코, 480X1143cm, 1934.

  프리다, 자아를 표현하다

  멕시코 현대미술에는 디에고 못지않은 명성을 자랑하는 화가, 프리다 칼로가 있다. 프리다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가진 예술가였다. 프리다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에 의해서였다. “프리다는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어요. 또한 당시 멕시코 미술의 거장이었던 남편 디에고와 차별화된 자신만의 미술 세계를 펼쳐나가기도 했죠.” 조은정 교수는 당시 멕시코 사회의 남성중심적 예술 풍조에도 불구하고 여성인 프리다가 자아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드러내며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다고 말했다. 70년대 많은 페미니스트는 이렇듯 강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독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던 프리다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프리다는 생전에 수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그의 강한 자의식은 자화상 곳곳에서 두드러진다. “프리다는 어린 시절 겪었던 소아마비와 교통사고로 인해 평생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어요. 또한 결혼 후에는 디에고의 여성편력으로 인해 고독 속에 살았죠.” 박윤정 큐레이터는 프리다의 삶을 잠식한 고통이 그가 오롯이 자기 내면에 집중하여 능동적으로 성찰할 힘을 주었다고 말했다.

  「자화상」(프리다 칼로, 1948) 속 프리다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다. 하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는 의지를 보여주려는 듯 강인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작품을 통해 본인이 추구하는 자아를 명확히 드러낸 것이다.

프리다 칼로 作 「자화상」 메이소나이트 유채, 50X39.5cm, 1948.
프리다 칼로 作 「자화상」 메이소나이트 유채, 50X39.5cm, 1948.

  또한 프리다는 디에고와 마찬가지로 원주민 전통문화에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멕시코 남동부의 테우안테펙 전통문화에 대한 프리다의 애착은 남달랐다. 테우아나 여인의 전통의상을 입은 프리다는 「자화상」을 비롯한 많은 작품에 등장한다. 박윤정 큐레이터는 테우안테펙이 모계적 전통이 강한 사회였다고 설명했다. “전통적으로 테우아나 여인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그들의 문화는 식민시대에도 굴하지 않고 전해 내려왔어요.” 프리다는 강인하고 자유로웠던 테우아나 문화를 통해 자신이 지향하는 여성상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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