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대신문 기획부 기자다. 매주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우리 사회에 내재된 문제를 지적하고 분석하는 기사를 쓴다. 폭넓은 시사상식을 요구하는 기획기사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 전문가를 취재하고 논문을 찾아보며, 관련 책을 읽기도 한다. 일주일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새로운 주제에 대해 공부하고 취재하고 기사까지 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꼬집은 데에 대한 쾌감, 내가 제기한 문제의식에 다른 누군가가 공감을 하고 설득될 때 느끼는 뿌듯함, 이런 것들이 나의 긍지를 높여주었고 기자로서의 바쁜 일상을 이어가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여느 때처럼 기사 준비를 위해 교수님을 취재하러 갔을 때였다. 안티페미니즘을 주제로 준비해간 질문지를 읊으려는 나의 말을 교수님께서 가로막았다. 그리고 나에게 먼저 물음을 던지셨다. “공하은 기자는 페미니즘이 뭐라고 생각해요?”


  당황했다. 사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항상 짧은 시간 안에 기사를 쓰기 위해 주제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기계적으로 머리에 입력했고, 그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기사를 썼다. 나는 그렇게 ‘입력된’ 정보를 열거하는 식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러면 공하은 기자는 안티페미니즘과 관련해서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어요?” 말문이 턱 막혔다.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겠다’던 기자인 나는 정작 기사 주제에 대해 제대로 된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나는 그동안 내가 ‘남이 느꼈음직한 불편함’에 공감하려고 ‘노력’하며 기사를 써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왜 나는 불편하지 않았나. 어쩌면 나는 진심으로 불편해져보려는 시도조차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무언가를 ‘불편하게’ 여기는 일은 정말이지 ‘불편한’ 일이니까. 기사를 쓸 수 있을 정도만, 머리로만 이해하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기를 스스로 꺼려했던 것이리라.


  “누구도 차이를 이유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 너무 당연한 가치잖아요.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과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그 구조를 바꾸어나가야 하는 거고.” 교수님께서는 ‘우리가 왜 불편해야 하는지’를 역설하셨다. 한 마디 한 마디 틀린 말이 없었다. 사회구조적 모순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데에는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자유와 평등.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우리는 불편해야 하는 것이다. 그간 왜 불편함을 느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도 없이 그저 ‘학습된 정보’에 의존해 기사를 작성해왔던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어떤 부조리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어 보일 수도 있고 어떤 부조리는 오히려 나에게 유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또 어떤 부조리는 너무나도 사소하고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져 불편함의 목소리를 내는 순간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눈총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함에 목소리 내는 것, 그것이 기자의 일이고 이 시대 지성인의 과업이 아닐까. 이에 나는 능동적으로 불편함을 느끼고 목소리를 내는, 용기 있고 건설적인 ‘프로불편러’가 되어 보려고 한다.


공하은

기획부 정기자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