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실용이나 효율로 평가받는 이 자본의 시대에서 예술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면 무기력해진다. 비근한 예로 예술대는 대학 구조조정의 일순위이다. 예술대의 성과가 대학평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다. 예술적 성과란 이 사회에서 직접적인 쓸모가 없다. 그러나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 쓸모가 생긴다. 예술의 쓸모없는 쓸모란 20세기 중반, “절망에 던져진 인간에게 거의 유일한 희망이 예술”이라고 했던 아도르노의 말처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 삶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올 여름 양친의 잇단 투병과 그에 따른 걱정에 지쳐 도피하는 심정으로 베니스에서 열린 데미안 허스트의 전시를 보러갔다. 근 10여년 만에 선보이는 그의 개인전 <믿을 수 없는 난파선의 보물>에 대한 평론가들의 논평은 그리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수백 점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의 작품과 제작에 투입된 엄청난 투자가 오늘날 상업화로 치닫는 미술의 전형인 것처럼,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질타가 대부분이었다. 대중매체들은 데미안 허스트가 뻔뻔하게 진짜 유물과 가짜를 함께 전시하여 관객의 혼란을 선동하는 것처럼 보도하고, 풍자를 통해 온통 가짜인 세상을 비웃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예술의 본령은 사회적 금기에 대한 도덕적 훈계에 있는 것도 아니며, 풍자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예술의 가치는 상징이나 비유를 통해 훈계하거나 풍자하는 것을 넘어 삶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삶의 방향성을 재확인 하는 데에 있다. 이 전시에서 데미안 허스트는 가치란 마치 보물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난파선에서 건져 올린 유물이 오늘날 우리에게 보물처럼 여겨진다면, 보물처럼 여겨지는 이유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 질문이 그가 던지는 문제의식의 출발점이다.

  난파하는 순간 배는 우리의 감각과 의식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진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이 난파선이 발견되어 다시 우리의 의식 속으로 재진입 한다면, 그때 난파선 유물의 가치는 현실세계의 시간과 다른, 시간의 동결을 다시 끄집어 낸 것에 기인한다고 여기기 쉽다. 하지만 인간이 의식하는 시간과 다르게 인간 의식 밖의 세계도 그 세계만의 시간이 흐르고 저마다의 질서가 존재한다. 이를 깨닫지 못하고 다른 시간에 속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가치로 여겨 박물관에 진열한다면, 그것은 시간을 또 다시 동결하는 난파와 다름없다.

  가치란 그것이 속한 세계의 맥락을 벗어남으로써 오히려 가치를 잃게 된다. 즉 가치를 가치로 인식하는 인간의 의식이 가치를 없애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맥락 속의 세계는 투쟁이 없을 수 없고, 그 투쟁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투쟁이란 자신과의 투쟁이 가장 힘들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투쟁을 멈출 수 없는 일이다. 지친 삶일지언정 다시 살아야하는 의미와 용기, 구원을 얻은 전시였다.

김백균 교수

한국화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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