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싸늘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겨울의 문턱에 이르렀다.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 세월은 이렇게나 빠르고 필자로서는 이 귀중한 한 토막 한 토막의 촌음을 충분히 되새기지도 못하고 덧없이 보내는 것 같아 너무나 마음 시리다.

  서두를 푸념으로 시작해 버렸다. 그러나 다시 위 문장을 곱씹어 보기를 바란다. 저 두 문장에 은유는 몇 개나 있는지 세어 보자. ‘겨울의 문턱에 이르다’, ‘시간이 쏜살같다’, ‘세월이 빠르다’, ‘촌음을 되새기다’, ‘촌음을 보내다’. 두 개밖에 안 되는 문장에 모두 다섯 개에 이르는 은유가 녹아 있다. 아차차, ‘마음이 시리다’를 빼먹었다. 그렇다. 이것도 은유이다. 이렇듯 우리 언어의 곳곳에는 너무나 자명해 보여 미처 은유인지도 인식하지 못하는 은유들이 말 그대로 ‘창궐’해 있다. ‘은유가 창궐하다’, 이것도 은유이다.

  조지 레이코프는 인지언어학자이다. 그는 인간의 추상적 사고가 대부분 은유적으로 개념화된다고 말한다. 특히 시간이나 감정 등은 은유가 아니면 도저히 개념화할 방법이 없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랑’은 ‘마법, 매력, 미침, 결합, 양육’ 등의 개념에 토대를 두고 있고 이것이 감정의 영역으로 사상(mapping)된 것이라 한다. 그는 ‘은유의 본질은 한 종류의 사물을 다른 종류의 사물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이다’고 강조한다. 그렇다. 은유는 일종의 공감이고, 그 공감이 또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어 번성해 나간다. 

  ‘사랑에 빠지다’라는 은유를 사용한 최초의 인간이 어떠한 체험을 했는지를 상상해본다. 연애를 하면 뇌에서 다량의 도파민이 방출되고 이 호르몬은 중독성이 강해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든다. 눈에 콩깍지가 씌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불가항력적 체험. 그는 그것을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했던 체험과 연관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최초의 연관, 이 사랑의 은유는 이를 들은 사람에게 자신의 무릎을 치게 했고 그렇게 공감을 얻어 널리 전파되어 나갔다. 따라서 일부 문학가들이 일상적 은유를 ‘사은유(死隱喩)’라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사은유’라 불리는 그것이 실은 살아남아 유전자를 퍼뜨리는 진정 살아있는 은유들이다.

  그러나 레이코프는 은유가 사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할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예를 들어 ‘갈등은 병이다’라는 은유는 갈등을 회피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는 은유이다. 그러나 갈등을 적절히 노출하여 관리해 나간다는 은유를 도입한다면 갈등에 대한 더욱 건전하고 유익한 인식을 확보할 수 있다. 실제로 과학 분야에서는 작고 보이지 않는 전자라는 대상을 때로는 입자 은유, 때로는 액체 은유라는 상보적 은유를 통해 파악하면서 더욱 적절한 ‘전자관(電子觀)’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이렇듯 우리가 더욱 건전한 사고와 행동을 유도할 수 있는 은유를 새롭게 창조해 나가고 이를 공감을 통해 번성시키는 것이야말로 ‘은유로서의 삶’을 건강하고 풍요롭게 일구는 일이 아닐까.

홍달오 교수

다빈치교양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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