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는 자주 반복돼 진부해진 설정을 말합니다. 자주 쓰였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으로 당연시됐다는 것을 뜻하겠죠. 이번학기 문화부는 클리셰를 들여다보고 그 의미들을 파헤쳐 보려 합니다. 이번 주 클리셰는 바로‘동성애’입니다. 지난 25일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는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 활동가의 강연 동영상을 비공개 처리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의 반발때문이었는데요.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동성애에 대한 터부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콘텐츠에도 여전히 동성애는 비가시화되거나, 특정한 이들만을 부각시킨 형태로 재현되고 있죠. 콘텐츠 속에서 동성애는 지워져 있습니다. 현실에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콘텐츠에 꾸준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면, 그것 또한 '클리셰'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동성애 클리셰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일러스트 황예나 학생
일러스트 황예나 학생


우정일 뿐이란 변명 속
자릴 잃는 사랑

‘진짜 게이’란 없다
다양성이 존재할 뿐

 

‘Brother’와 ‘Romance’를 합친 신조어 ‘브로맨스’는 포털사이트 시사상식사전에서 ‘남성 간의 애틋한 감정 또는 관계’로 정의된다. 그들의 애틋함은 대중의 마음을 건드렸고 2010년 이후 국내 드라마와 영화계에 브로맨스 열풍이 불었다. 브로맨스는 남남 케미를 앞세운 수많은 작품과 더불어 가수명, 방송 프로그램명으로 자리 잡았다. 다양한 미디어 속에 자리한 브로맨스는 일관된 주장을 기반으로 했다. “우리는 동성애가 아니다.” 로맨스란 단어와 함께하는 브로맨스가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불한당),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을 통해 브로맨스가 갖는 의미를 알아봤다.


  동성애를 감추는 브로맨스란 시치미
  영화 <불한당>의 변성현 감독은 시사회에서 이 영화는 브로맨스가 아니라 멜로라 생각한다고 밝힌 적 있다. 영화를 준비하면서도 멜로 영화를 많이 봤다는 감독의 의도는 ‘재호’와 ‘현수’의 관계를 통해 영화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범죄 조직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수많은 배신을 겪은 재호는 쉽게 사람을 믿지 않는다. 오랫동안 모셨던 형님마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그를 더욱 외롭게 한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만난 ‘현수’만큼은 그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패기 넘치는 첫인상으로 재호의 호감을 산 현수는 재호의 목숨을 노리던 죄수를 잡으면서 그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다.

  현수를 향한 재호의 신뢰는 무한하다. 그리고 집착적이다. 현수를 자신의 옆에 두기 위해 그의 어머니까지 죽인 재호는 현수에게 남성 간의 의리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현수 또한 어머니가 돌아가신 상황에서 재호를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 현수가 교도소에 잠입수사 중인 경찰이란 사실도 둘 사이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수가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범인이 재호임을 알게 되면서 둘 사이에 갈등이 시작된다. 한없이 깊었던 둘 사이의 믿음은 슬픔으로 점철됐고 결국 둘 중 한 명이 죽어야만 하는 결말이 찾아온다. 현수는 재호를 질식시키면서도 그의 손에 총을 쥐여줬고, 재호는 손에 총을 쥐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죽이려는 현수를 쏘지 못했다. 둘 사이에 흐르는 애절함은 우정보단 사랑에 가까웠다.

  재호 역을 맡은 배우도 영화 속에서 현수를 사랑했다고 말했다. “동성애는 아니지만 사랑인 것 같다. 브로맨스를 넘은 강한 관계라고 이해했다.” 동성 간에 사랑이란 감정이 흘렀지만 동성애는 아니란 것이다. 그의 모순은 브로맨스란 이름으로 탈바꿈해 각종 기사로 홍보됐다.

  김경태 강사(다빈치교양대학)는 미디어에서 사용하는 브로맨스는 성애적 욕망이 배제된 남성 간의 친밀함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브로맨스란 표현 덕에 미디어가 묘사하는, 남성 간의 우정을 넘어서는 친밀함이 동성애란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이는 그동안 동성애가 그나마 확보해 온 가시성의 영역을 침범한 거죠.” 미디어를 통해 조금씩 사회에 녹아들고 있던 동성애가 브로맨스로 덧씌워 지면서 다시 한번 존재를 부정당했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동성애적 요소를 묘사하는 장면도 브로맨스로 봉합되고 있어요.” 백문임 교수(연세대 국어국문과)는 남성 간 동성애를 부정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브로맨스가 사용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영화 <불한당>에는 ‘저 양반, 남색도 하고 여색도 해’라는 재호에 관한 대사가 투자사에 의해 빠지기도 했다. 재호가 동성에게도 성애적 감정을 느낀다는 설정이 빠진 자리에는 자연스레 브로맨스가 채워졌다.

  백문임 교수는 브로맨스가 동성애적 코드를 사용하지만 철저히 이성애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사회에서 용인된다고 설명한다. “브로맨스에서는 남자 주인공들이 이성애자임을 증명하는 게 중요해요. 남자 주인공을 자연스럽게 이성애자로 규정하고 받아들이는 거죠.” 브로맨스물에서 남자 주인공들은 한껏 브로맨스를 펼치다가도 ‘정상’임을 증명받기 위해 이성 파트너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나영 교수(사회학과)는 남성 간에 친밀함이 주가 되는 다양한 관계를 브로맨스만으로 묘사하는 미디어는 동성애자들이 실질적으로 겪는 문제를 외면할 뿐이라 지적한다. “브로맨스는 동성애적 코드를 차용하지만 동성애자가 겪는 정체성 문제를 아예 건드리지 않아요. 동성애자가 마주하는 현실 자체를 삭제한 거예요. 오히려 브로맨스를 차용하면서 동성애가 존재한다는 현실을 가리고 있죠.”

  차별 더하기 차별: ‘여성스러운’ 게이
  남성 동성애가 ‘브로맨스’로 봉합되지 않고 드물게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소위 ‘여성적’이라 불리는 특성을 가진 게이가 등장할 때다. 여성적인 게이는 사회가 ‘여성’과 ‘게이’에게 갖는 편견을 기반으로 한다. 여성은 꾸미기를 좋아하고 질투가 심하며 앵앵거린다는 고정관념은 ‘여성적’이란 단어로 함축됐다. 그리고 게이는 남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여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사회적 몰이해는 게이에게 ‘여성적’이란 수식어를 붙였다.

  이나영 교수는 ‘게이는 여성적이다’란 통념이 생성된 원인으로 ‘정상적인’ 남성을 표준으로 삼는 사회 구조를 꼽는다. “사회는 전형적인 남성성만을 ‘정상’으로 받아들여요. 여성과 게이는 정상 집단에 속하지 못하죠. 남성성에 반하는 것은 ‘여성스러운 것’이 되고 이는 쉽게 게이의 속성으로 여겨져요.”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여성과 동성애의 속성을 모두 가진 남성은 미디어에서 웃음 코드로 소비되기 일쑤다.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의 ‘오돌뼈’가 그 예시이다. 주인공 봉순을 질투하는 오돌뼈는 항상 짙은 아이라인에 새빨간 립스틱을 칠한 채로 등장한다. 봉순을 괴롭힐 때를 비롯해 그의 모든 대사는 치켜세워진 약지와 함께 높은 톤의 목소리로 연기된다.

  오돌뼈의 ‘여성적’인 모습은 작품 설명에 ‘진짜 게이’로 설명된다. 사회가 게이를 바라보는 시점이 그대로 반영된 부분이다. 정슬기 교수(사회복지학부)는 미디어가 게이를 일관되게 묘사하는 양상을 통해 사회가 동성애에 관해 무지함을 알 수 있다고 비판한다. “소위 ‘여성스러운’ 게이도 분명 존재하죠. 그러나 모든 동성애를 일괄적이게 묘사해 고정관념을 만든다면 동성애자들의 다양성은 이해받지 못할 거예요.”

  고정관념이 양산하는 피해에서 이성애자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김민준 칼럼니스트는 미디어에서 만드는 동성애에 관한 편견이 ‘맨 박스’를 강화한다고 설명한다. “‘여성스러운 게이’ 묘사는 사회 통념상의 여성성과 남성성을 고착화해 젠더 역할을 강요하게 만들어요. 소위 ‘여성스러운’ 이성애자들에게 게이냐고 묻는 몰상식한 행동이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거죠.”

  결국 동성애는 미디어 시장에서 ‘동성애가 아닌 사랑’이란 모순, 또는 사회가 허용하는 웃음거리로 소비됐다. 동성애자가 겪는 문제를 잘 드러냈단 평을 받는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는 동성애에 관한 왜곡은 피했지만 동성애를 혐오하는 집단에게 역풍을 맞았다. ‘드라마 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방송사가 책임져라!’란 미개한 문구가 신문에 광고로 실린 것이다. 동성애자의 인권이 존중받는 미디어 문화는 아직 먼 미래의 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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