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고 따르는 이는 외할아버지다. 기자의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은 적이 있어 한쪽 다리가 불편하시다. 하지만 기자는 할아버지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크게 인식하며 살지 않았다. 그는 한자, 일어, 영어에까지 능통하시며 팔순이 넘는 나이에도 스마트폰을 사용하셔 손녀와 보고플 때 영상통화를 주고받는 분이다. 그는 누구에게나 모범이 됐고 존경을 사는 분이었기에 기자는 단 한 번도 장애가 할아버지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학기 장애학생지원센터가 주최한 강연에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강의를 진행한 김원영 변호사는 장애인이었다. 그는 휠체어를 굴리는 동작을 어떻게 하면 더 품위 있게 할 수 있을지 연구한다고 말했다.

  문득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완벽하게 보였던 할아버지도 같은 고민을 했을 장애인이었다. 그간 기자는 계단에서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 부축했고 걸음을 맞추기 위해 속도를 늦추어 함께 걸었다. 그래, 할아비에게 속도를 맞추겠다고 일부러 자근자근 걷는 손녀를 보며 그도 속이 얼마나 상했겠는가. 그래서 내 할아비는 더 열심히 살았을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아픔을 숨기기 위해.

  기자는 이번학기 숫자 살피기라는 작은 코너를 만들었다. 숫자 살피기 기사는 분량이 적다. 그러나 이 짧은 글에는 수많은 고뇌가 담긴다. 우리 주변의 소수자는 누구이며 다수에게 소외당하고 있는 이는 누구인지, 모두가 놓치고 있는 사람들의 현실은 무엇인지 고민한다.

  그러나 유독 해당 코너의 기사는 취재가 무너지기 일쑤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소수자가 겪고 있는 현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굳이 자신의 얘기가 아닌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기자가 숫자 살피기에서 짚어내려 했던 부분에 다수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모른다’, ‘들춰내지 말라.’, 심지어 알 필요 없다

  하지만 당장 오늘(27)부터 시행되는 양캠 총학생회 선거에서도 살펴야 할 소숫자가 너무나도 많다. 소수라는 이유로 존중받지 못한 이들의 숫자를 이번 칼럼에서 살펴보려 한다.

  ‘0’ 60대 서울캠과 안성캠 총학생회 선본이 제시한 장애인, 외국인 유학생 등 소수자를 위한 공약 수다. 다수의 표를 목적으로 하는 선거에서 소수의 안위를 고려하지 않는 선거철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0’ 이번 선거를 맞아 양캠에 설치된 장애학생 전용 선거 부스 수다. 장애 학생은 휠체어를 탄 채로 투표소에 들어가기 어렵다. 평지에 설치된 투표소는 부스 자체가 가진 좁고 높다는 한계를 해결하지 못한다.

  ‘0’ 서울캠 총학생회 선거 유권자에 포함되는 외국인 유학생 수다. 외국인 유학생은 대학생활 전체를 중앙대에서 하지만 스스로 선거권을 행사하기 이전에는 유권자로 해석되지 못한다.

  ‘0’ 이번에 배포된 유학생 전용 공약집 수다. 한국어에 능숙하지 못한 외국인들은 어떤 공약이 오가며 어떤 의견이 오가는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0’ 장애 학우들에게 공약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만든 책자, 음성 등 매체의 수다. 소수자를 위한 공약도 없지만 공약에 접근할 방법도 없다.

  여전히 기자가 살피지 못한 소수자와 소숫자는 세상에 넘친다. 그래서 기자는 비주류에 속한 슬픔을 삼키며 자연스럽게 다수의 문화에 속하기 위해 공들이고 있는 소수자에 계속 관심을 들인다. 그리고 그들이 노력하지 않아도, 대학이, 사회가, 세상이 당연하게 그들을 존중하기를 요구한다.

  2년간의 학보사 생활을 정리하는 마지막 칼럼을 닫으며 이수빈 기자의 최고 애독자였던 이재규님에게 이 글을 바친다. 그리고 당신과 걷는 속도를 맞추기 위해 천천히 걸었던 손녀는 오늘도, 앞으로도, 걸음을 늦추고 주변의 소수자에게 시선을 맞추고 따뜻한 관심을 두겠다고 약속한다. 당신의 걸음이 느리다는 이유만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게 만들었던 세상을 바꾸기 위해 당신의 손녀는 오늘도 기사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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