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입니다.” 자기소개할 때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가장 먼저 이름을 알려준다. 가장 기본적이고, 또 중요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이름의 중요성은 영화나 문학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그런데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 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펴냄) 그리고 소설 『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 펴냄) 등이다. 작가는 왜 작품에서 중요한 ‘이름’을 생략해버린 것일까. 전문가와 함께 그 이유를 분석해봤다.
 
  작가가 흘린 단서, 이름
  이주은 교수(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는 이름이 인물의 이미지를 제시한다고 설명했다. “인물의 이름은 직업이나 성격과 관련돼요. 이름이 갖는 인상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전문직에 종사하며 자기주도적으로 사는 여자의 성으로는 ‘서’씨가 많이 등장하고 ‘은수’같은 중성적 이름이 많이 쓰인다. 이렇듯 작가는 이름에 단서를 던져 놓는다. 이는 수용자가 더욱 쉽고 빠르게 인물과 작품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배우 전지현이 연기하는 인물에겐 이런 단서가 없다. 영화에서 그의 역할은 이름 모를 ‘그녀’일 뿐이다. 작가는 가장 중요한 여주인공의 이름을 없애고 대명사로 표현했다. 인물을 파악하기 위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
 
  이주은 교수는 이름의 생략이 오히려 수용자로 하여금 작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든다고 말했다. “이름을 쓰지 않으면 선입견을 주지 않을 수 있어요. 계속해서 수용자의 궁금증을 유발해 한 인물을 파헤치게 하죠.” ‘그녀’를 파악하기 위해 수용자는 작품을 샅샅이 들여다보며 인물의 뒤를 쫓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수용자는 작품 속 정보를 파악하고 해석하며 ‘그녀’를 찾게 된다. 이는 수용자가 보다 인물에 집중하도록 작가가 설치한 일종의 장치다.
 
  너일 수도, 나일 수도, 모두일 수도
  “눈먼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필요 없소. 내 목소리가 바로 나요. 다른 건 중요하지 않소.”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 나오는 대사다. 작가는 대놓고 이름이 중요치 않다고 선언한다. 그리곤 모든 이름을 소설에서 지워버렸다. 인물들의 국적이나 인종, 그리고 배경이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인지에 대한 설명도 말끔히 지워버렸다. 인물 또한 고유의 이름 없이 그, 그녀와 같은 대명사와 함께 간단한 특징만으로 묘사할 뿐이다.
  
  작가가 이름을 생략한 이유는 단순히 수용자를 혼란스럽게, 즉 ‘눈을 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유명사는 인물 그 자체의 단독성이나 고유성과 같은 인물 개인의 문제를 부각해요. 반면 대명사는 인물 개개인의 개성보다는 보편성을 강화하죠.” 배봉기 교수(광주대 문예창작학과)는 이름을  쓰지 않으면 이야기 속 문제가 누군가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이 폭력적이고 비윤리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런 모습을 통해 극한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수용자에게 전한다. 여기서 눈이 먼 그와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 필요가 없다. 수용자가 집중해야 할 점은 인물이 아니라 극한의 상황에서 나오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름의 생략을 통해 극한의 상황이라면 누구나 윤리의식이 무뎌지고 가치관이 붕괴할 수 있는 위험에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빈 공간을 상상의 공간으로
  생략된 이름이 수용자에게 주는 영향은 이뿐만이 아니다. 조미라 강사(국어국문학과)는 이름의 생략이 수용자를 작품에 더욱 몰입하도록 돕는다고 말했다. “이름을 생략하면 작가가 갖는 ‘그’의 이미지가 아니라 수용자 마음속에 있는 ‘그’를 마음껏 상상할 수 있게 하죠.” 이름이 생략된 덕분에 수용자는 작가가 만든 공간 속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마음껏 쓸 수 있다는 설명이다.
 
  소설 『레베카』는 주인공인 ‘나’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소설 속에서 ‘나’의 이름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작가는 주인공의 이름을 없앰과 동시에 그의 시선과 생각을 세세한 부분까지 공유해 수용자가 소설 속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수용자가 감정을 이입하면 단순한 작품 감상을 넘어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기에 소설 속 ‘나’는 언제든지 현실 속 ‘나’가 될 수 있던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도 마찬가지다. 대명사로 비어있는 이름에 자신의 이름이나 주변 지인의 이름을 대입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수용자는 눈이 보이지 않아 누군가의 인도를 받는 인물이 될 수도 있고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채로 눈먼 자들을 인도하는 인물이 될 수도 있다. 자신 그리고 지인을 작품 속 인물에 대입하는 순간 소설은 개인 고유의 이야기가 된다.
 
  조미라 강사는 작품에서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다양하다고 설명했다. “이름을 지칭하지 않는 의미와 효과는 무수해요. 작품의 의도와 방향에 따라 여러 효과가 있죠.” 덕분에 만약 수용자가 이름을 숨긴 창작자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자신만의 효과를 작품에 적용하며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
 
  이름의 존재는 중요하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을 때도 이름은 중요하다. 이름은 존재하지 않을 때 새로운 효과를 가져다준다. 이름이 있건 없건 그 자체로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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