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한 게 없다. 지난달 13일 대학본부는 교무회의 등 중요한 의결이 진행될 때 학생과의 소통 여부를 필히 확인하겠다고 총학생회장과 합의했다. 정말 ‘확인’만 있었다. 전공개방 모집제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반 학생도 참여할 수 있는 소통의 자리는 지난 4일에 열린 설명회뿐이었다.
 
  그마저도 제도 집행은 확정된 사안이었다. 그런데 구체적인 사항은 결정되지 않았다. 대학본부는 구체적인 논의만 가능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마저도 할 수 없는 모순을 발명해냈다. 원점부터 논의하자고 하는 학생들에겐 뭐가 문제냐고 ‘구체적으로 말하라’고 반문했다. 전혀 변한 게 없다.
 
  학생들은 분노했다. 4일 설명회에서 사과대 학생회는 “이러한 상황에서 논의를 진행할 수 없다. 앞으로 이런 자리가 다시 만들어질 거라 기대하고 오늘은 자리를 뜨겠다”며 보이콧을 선언했다.
 
 
학생은 부조리에
‘예의 없이’ 화 낼 자격이 있다
 
  그러나 대학본부를 향한 낮아진 기대는 오히려 학생 사회에 대한 높은 기대로 돌아왔나 보다. 중앙대 대나무숲엔 사과대 학생회를 비난하는 글이 줄지어 올라왔다. ‘대학본부도 소통하려고 총장단과 관련 임원들을 대동하고 자리를 만들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나갈 수가 있느냐’,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야유를 쏟아내고 언성을 높일 수 있느냐.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
 
  근거 있는 주장은 없고 상황에 대한 서술만 존재한다. 임원들 앞에서 ‘무례하게도’ 대학본부를 꾸짖는 학생, 우르르 들어왔다 빠져나간 사과대…. 그뿐이다. 맥락이 없다. 왜 사과대는 그렇게 행동했어야 하는지, 대학본부는 사안이 거의 결정된 상황에서 왜 이제야 ‘자칭’ 소통의 장을 열었는지에 대해선 묻지 않는다.
 
  사과대를 무례하다 말할 수 있는가. 설명회는 애초에 대화의 자리였다. 대화는 혼자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4일의 설명회는 독백에 가까운 것이다.
 
  게다가 학생은 대학본부가 원하는 주제의 대화에 모조리 참석해야 할 의무가 없다. 그날 대학본부가 원한 대화는 ‘어떻게 전공개방 모집제도를 통과할 수 있는지’였고 학생들은 그렇지 않았다. 학생들은 ‘이 전공개방 모집제도가 왜 이렇게 강압적이고 숨 차게 진행돼야 하는지, 학생들에 대한 사안에 학생들은 왜 빠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대화하길 소망했다. 대학본부가 전공개방 모집제도가 사실상 결정됐다고 말한 순간 대화는 종결된 것이다.
 
  대화의 자리를 스스로 끝내버린 대학본부였다. 학생은 과연 어떤 존재여야 하기에 대화할 준비도 되지 않은 채 소통하자고 강요하는 상대에게 항상 예의 차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상대에게 화 낼 자격은 학생에겐 더 이상 없는 것인가.
 
  슬픈 사회다. 학생은 으레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아래 서로를 감시한다. 감시받는 학생은 완벽해야 한다. 암묵적 규율은 암묵적이기에 더욱 권력을 가진다.
 
  그래서 완벽한 비판만이 허용된다. 하나의 티끌이 모든 것을 규정한다. 새하얀 도화지를 모서리 검은 점 하나 때문에 찢어버리는 모습. 그 안에 무얼 그리려 했는진 기억하지 않는다. 아무런 움직임도 허용되지 않는다.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명제는 본질부터 부정 당한다.
 
  우리가 원하는 학생사회는 이런 사회인가. 그야말로 비인간의 사회. 그자체로 모순인 사회. 자정작용은 없고 자기검열만 있는 사회.
 
  선배는 내게 좋은 기사는 질문하는 기사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묻고 싶다. 착한 학생, 완벽한 학생이 돼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착함이라는 도덕률은 누가 정했는지, 그래서 그것은 누구를 위한 착함인지.
 
  그리고 다른 질문. 이 착함과 완벽함은 더 나은 중앙대와 학생사회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가.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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