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악법에 의해 죽었다. 그리고 오늘날 본관을 점거한 대학생은 학칙의 손에 끌려 나왔다. 학칙은 학교를 구성하는 헌법과 같다. 그런데 사람이 법을 제정하고 법이 다시 사람을 지배하는 법치주의는 여전히 학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을까. 서울권 30개 대학교의 학칙을 바탕으로 알아봤다.
 
 
 
  찾을 길 없는 학생의 주권
  일반적으로 학칙을 개정하는 과정은 크게 발의, 심의, 의결로 나뉜다. 먼저 학칙 개정이 필요한 부서나 총장이 학칙 개정안을 발의한다. 이후 개정안의 적절성을 판단하기 위해 교무위원회와 대학평의원회를 거친다. 이들 위원회에서 심의를 통과한 개정안은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총장이 공포한다. 이러한 공식적인 학칙 개정 절차에 학생이 얼마나 참여할 수 있는지를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총 30곳을 대상으로 조사해봤다.
 
  조사 결과 많은 대학에서 학생이 학칙 개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전체 30개 대학 중 12개교는 학칙에 명시된 학칙 개정 절차에서 학생을 배제하고 있다. 이들 대학은 학칙에 대학평의원회의 심의 절차를 명시하지 않거나(11개교) 학칙 개정 과정에 참여하는 대학평의원회에 학생 대표자를 포함하지 않았다(1개교). 학생 대표자가 없는 곳에서 심의·의결된 학칙이 학생을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학칙 개정 과정에 학생이 참여할 수 있는 대학에서도 학생의 목소리는 미약했다. 학칙 개정 과정에 대학평의원회가 포함된 18개 대학에서 학생은 대학평의원회 구성인원 중 평균적으로 약 17%의 인원만을 배정받았다. 교수 및 교직원과 함께 ‘대학삼륜’을 구성하는 학생의 위상에 부합하는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눈 감고 귀 막은 비민주적 학칙
  학생이 참여하지 못하는 학칙 개정 절차는 학내 민주주의 실현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임재홍 교수(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는 헌법 제정에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것처럼 학칙 개정 과정에도 대학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해야 한다고 밝혔다. 대학을 총괄하는 학칙의 제정에 학생을 비롯한 학내 구성원이 참여하지 못하면 민주주의적 가치가 훼손당한다는 것이다. 임재홍 교수는 “총장 1인에게 학칙 개정권을 부여하는 바람에 학칙이 비민주적인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며 학칙 개정 절차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드러냈다.
 
  대학평의원회가 의결권이 아닌 심의권만 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전체 30개 대학 모두 대학평의원회에 의결권이 아닌 심의권만을 부여하고 있다. 의결권이 없는 대학평의원회의 의견은 의사 결정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조성한 교수(공공인재학부)는 “심의권만 가진 대학평의원회에서는 학생의 의견뿐 아니라 교수의 입장도 학칙 개정 과정에 반영되기 어렵다”며 “결국 대학평의원회는 요식행위로 전락했다”고 대학평의원회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임재홍 교수는 “현행 학칙은 대부분 총장의 이해관계를 옹호하는데 편리하게 구성돼 있다”고 지적했다. 만약 총장이 잘못된 의사 결정을 했을 때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서 시정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학생들도 당연히 그 절차를 따를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칙이 진정한 의미의 정당성을 가지려면 의결권을 갖는 의회 같은 조직이 구성되고 그 조직을 통해 학칙이나 규정을 제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임재홍 교수는 “학칙 개정 절차가 내포하고 있는 비민주성을 고려하면 본관점거를 택한 학생만을 비판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나쁜 학칙이 착해지려면
  비민주적 학칙 개정 절차는 「고등교육법」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지적된다. 「고등교육법」 제6조 1항에 따르면 ‘학교의 장은 법령의 범위에서 학교규칙을 제정하거나 개정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임재홍 교수는 「고등교육법」이 권력을 독점한 총장을 집중 관리함으로써 대학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려 했던 군사정권의 잔재라고 설명한다.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처럼 대학의 총장은 학칙 개정부터 행정권, 예·결산 등 학내 주요 사안에 대해 ‘제왕적 총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독재적 권력을 휘두른다는 것이다. 임재홍 교수는 「고등교육법」 개정을 통해 학칙 개정 절차에 숨은 비민주적 요소를 배제하고 학내 구성원들이 서로의 의견을 존중할 때 오늘날 대학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평의원회의 역할 강화도 민주적 학칙 개정을 위한 방안으로 꼽힌다. 조성한 교수는 “현재 운영되는 대학평의원회의 심의 과정은 학칙 개정상의 비민주성을 효과적으로 개선하지 못하고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대학평의원회가 형식적인 심의기구에서 벗어나 학교법인이 공익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다행히 학내 의사 결정 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12월 고려대는 학내 의사 결정 과정에 있어 한걸음 발전을 이뤄냈다. 학생들의 의견을 대학본부에 직접 전달할 수 있는 소통기구가 마련된다는 것이다. 고려대 이승준 총학생회장(심리학과)은 “올해 안에 신설될 학사제도협의회는 교직원 3인과 학생 3인으로 구성된다”며 “학생들이 학사제도 협의회를 통해 학사제도 제·개정 등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역시 미래라이프 대학 설립과 관련하여 대학본부가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아 86일간 본관점거가 진행됐다. 그 결과 총장 사퇴 이후 기존 총장 간선제를 총장 직선제로 개정하려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특히 교수와 교직원, 학생의 의견이 총장 선출에 같은 비율로 반영된다는 점에서 학내 의사 결정 과정에서 민주성이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나름의 성과가 있었지만 본관점거라는 최후의 수단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학내 의사결정 과정의 비민주성은 여전한 문제점으로 꼽힌다. 지금도 많은 대학 학생들은 학칙 개정 과정에서 배제돼있고 비민주적인 학칙도 바뀌지 않았다. 갈등의 도화선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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