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만큼 보상받는
  사회를 향한 한걸음
 
  유명무실, 그러나
  오점 아닌 시작점
 
 
당신은 조선 시대에 양반가문의 남성이었을까? 15세기 양반 남성의 비율이 전체의 7%를 차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가능성이 낮은 일이다. 만약 당신이 93%의 다른 성별 또는 다른 신분이었다면 당시 관직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더 큰 확률로 당신이 35%의 백정이었다면 이력서에서 의무적으로 자신이 백정임을 밝혀야 했고 일당을 떼이는 것은 기본이었다. 수백 년이 지나 신분제가 철폐되고 고용 기회가 많은 사람에게 부여됐다. 하지만 지금의 당신, 정말 평등한 평가를 받고 있는가. 치열한 스펙 경쟁과 호감형 외모를 위한 성형 고민에 둘러싸이진 않았는가. 당신을 구제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의 과정과 해결방향을 알아봤다.
 
 
  지지부진(遲遲不進) 끝에
  2000년대 초반부터 이력서 항목에 관한 문제는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에 고용노동부는 지난 2007년 ‘개방형 표준이력서 및 표준면접 가이드라인’을 제작·보급했다. 인적사항, 혼인, 학력사항, 가족관계, 신체조건 등 과다한 정보를 요구하지 않도록 명시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 2011년 총 160개 민간 기업과 총 40개의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선 모든 기업이 여전히 과다한 개인정보를 요구하고 있었다.  
 
  “노동부의 권고사항이 별로 지켜지지 않았어요.”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전 국회의원은 지난 2012년 ‘표준이력서 활성화를 위한 간담회’를 가졌다. 그러나 간담회를 통해 진행된 법안은 최종적으로 통과되지 못했다. 이후 지난해 네 차례에 걸쳐 발의된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도 법으로 규정되지는 못했다.
 
  평등한 채용을 위한 노력은 법적 영역뿐만 아니라 시민단체 차원에서도 이뤄졌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지난해 11월 사진 부착이 일으키는 외모지상주의 문제를 꼬집는 풍자 퍼포먼스와 발표회를 진행했다. 이 발표회는 전국지구의 여성민우회에서 릴레이로 진행됐으며 총 82개 기업, 기관, 단체에 ‘사진 없는 이력서’ 사용을 도모했다. 
 
  가시적인 결과가 미미했던 표준이력서 사용이 처음으로 의무화된 것은 지난해 12월 서울에서부터였다. 더불어민주당 이신혜 서울시의원이 제271회 정례회에서 ‘서울특별시 고용상의 차별행위 금지 조례 일부개정조례안’을 대표로 발의 한 후 상임위원회에 통과시켰다. 이신혜 의원은 공정한 채용의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 분위기를 언급했다. “취업난을 겪는 청년들이 노력한 만큼 보장받을 수 있도록 공정한 사회 분위기가 확장됐으면 합니다.” 이에 따라 부분적으로 서울시 산하기관 22곳에서 표준이력서 사용이 의무화됐다.
 
 
  얼룩진 표준이력서
  그렇다면 현재 서울시에서는 표준이력서 사용이 잘 지켜지고 있을까. 총 17개의 서울 산하기관에 직접 전화해 시행 여부를 확인해봤다. 4곳이 표준이력서를 사용하고 있었고 서울산업진흥원, 서울관광마케팅,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은 아직 채용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표준이력서를 통한 채용의 진행 상황을 묻는 말에 대다수 기업은 형식적인 답변을 늘어놓기 바빴다.
 
  표준이력서에 대한 채용자의 무심한 태도는 채용과정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지난해 한 취업포털 사이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93.4%가 여전히 사진 부착을 요구하고 있었다. 심지어 56%의 구직자는 신장 및 체중 정보를 요구받기도 했다. 결국 표준이력서는 고용노동부의 권유였을 뿐 따르는 이 하나 없는 ‘유명무실’에 그친 것이다.
 
  기업들이 표준이력서 사용을 불편해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직업군별로 구직자들의 장점을 드러낼 항목이 표준이력서에서 배제된 내용에 포함된다는 주장이다. 서울연구원 인사복지팀은 표준이력서에 역차별의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연구원은 학력에서 직무 적 역량이 드러나는데 학력란이 사라지면 그들의 노력이 오히려 인정받지 못하게 되죠. 일종의 역차별이에요.” 표준이력서가 직종별로 구직자에게 요구되는 직무 관련 항목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업들이 표준이력서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는 이유는 사진부착을 하지 못하기 때문으로 나타났다. 김광진 전 의원에 따르면 서비스업은 일정 정도의 호감형 인상을 추구하는 실태이다. 서비스업 직종 종사자들 직업 특성상 외모가 성과 수준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행적 믿음은 서비스업뿐만 아니라 타 직종에서도 존재해 ‘이왕이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하며 외모를 요구하고 있다. 
 
 
  다음 단추를 위해서
  이들은 표준이력서가 가진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지만, 표준이력서가 일으킨 변화를 단순히 불편으로만 치부하는 성급한 인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물론 현재 표준이력서가 가진 한계는 개선돼야 할 점이다. 하지만 이는 표준이력서가 지향하는 평등한 채용 과정이 전제됐을 때 논의될 수 있는 문제이다. 이신혜 의원은 표준이력서의 취지를 바탕으로 이력서 문화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의지를 보였다. “모든 직종을 반영할 수 있는 이력서는 없을 것 같아요. 표준이력서의 사용을 권고 사항으로 하되 불필요한 정보의 기재는 경계해야죠.”
 
  한국여성민우회는 기업들이 이력서에 요구하는 정보의 필요성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지 반문했다. “가령 의사에게 의사 면허증을 요구할 순 있지만, 소방관에게 일정 정도의 신체요건을 요구하는 것은 필요 이상의 정보인 거죠.” 이력서는 구직자의 역량을 드러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이전에 요구한 역량이 내재화된 차별적 의식에 기반을 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 
 
  한편 이신혜 의원은 사진 부착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기업에 단호하게 대응했다. 이력서에는 주관적 평가의 가능성이 있는 모든 요소가 제외돼야 하기 때문이다. “외모 등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 기준에 의할 수밖에 없어요. 공정한 사회를 지향하기 위해선 절차상의 공정성이 우선 확보돼야 해요.” 절차상의 공정은 채용의 첫 번째 관문인 이력서에서부터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표준이력서가 고용차별을 완벽히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하지만 표준이력서는 최소한의 평등을 보장하고 있기에 더이상 퇴보할 곳은 없다. 앞으로 개선될 사항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한국여성민우회는 표준이력서를 ‘첫 단추’라 표현했다. “일단 첫 단추가 필요해요.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이력서가 고용 평등의 출발 지점이 돼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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