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줄 알았으면 대학 안 보냈다.”
 
  나에게 있어 집이 숙박업소가 되었을 즈음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대학원이니 교직 이수니 떠들어대던 아들이 입학 후에는 동아리다 뒤풀이다 해서 바쁜 모양이니 아버지로서는 참 답답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한편 대학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접하며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많아진 나는 이해해주지 않는 부모님이 그저 밉기만 했다.
 
  이는 대화가 부족했다거나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결론지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대화할 때 태도를 조심하려고 해도 감정적으로 마무리되는 일이 많았다. 이런 상황들은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더 근본적인 어긋남이 있었음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화감은 인식 차이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인식 차이의 한계는 왜 발생할까.
 
  지식이 형성되는 과정 중 첫 단계는 오감을 통해 나와 세계를 받아들이는 ‘인식’이다. 인식으로 받아들인 정보는 인간이 가진 오감의 한계로 인해 있는 그대로를 반영하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본인의 직접인식을 통해 받아들인 정보라 하더라도 기억과 표현의 한계 때문에 그 선명도와 정확도가 감소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식의 한계이다. 인식의 한계는 필연적으로 인식 차이의 한계를 만들어낸다. 직접인식조차도 정보를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는데 타자의 인식을 인식하는 일은 어떻겠는가. 그러나 언어가 지식의 구체화를 가능하도록 하면서 인간은 선명하지도 않고 판명할 수도 없었던 타자의 인식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게 됐다. 언어가 본인의 인식과 지식을 통해 타자의 그것을 미루어 추측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가 된 것이다.
 
  고도로 발달한 언어는 지식을 일반화하는 데까지 이르러서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흐릿하게까지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 경계의 존재를 잊거나 간과하여 타인을 확실히 알 수 있다고 ‘착각’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인식 차이의 한계’를 깨닫지 못한 게 내가 부모님과 갈등한 이유 중 가장 핵심이었다. 서로 모든 것을 알지 못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확실히 안다는 전제로 대화했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한 것이었다. 부모님과의 대화 중에 ‘대학생활’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는데 이때 나와 부모님이 ‘대학생활’에 대해 가진 생각의 종류나 양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동등한 입장으로 사용했다는 경험을 오류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 문제는 서로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여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문제는 타인의 전부가 내가 인식하는 전부인 줄 알면서 비롯된다. 내가 깨달은 것은 어찌 보면 원론적이고 당연한 내용이다. 그러나 그만큼 놓치기 쉬운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연구하는 개인과 사회가 되길 바란다.
 
이성혁 학생
철학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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