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부패한 공직자와 비선 실세 간의 관계를 밝혀내고 오랜 시간 잠복취재 끝에 모종의 뒷거래 장면을 포착하는 등 업적을 달성한 기자들에게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오히려 기자가 검찰의 역할까지 대신 소화해내며 정의를 구현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다. 그러나 세상엔 그런 기자들만 있는 게 아니다. 오늘 아침 읽은 주가 변동 정보부터 주말에 다녀온 연극 정보, 하다못해 당신이 읽고 있는 이 인터뷰까지. 정치 사안뿐 아니라 생활, 문화, 예술, 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 당신이 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전달하는 사람이 기자다. 그중에서도 권경희 인사이트 창립자는 정보가 필요한 사람과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을 연결하며 정보격차 완화에 일조한다. 학창시절 중대신문 편집부장을 맡기도 했던 그는 서울전자신문과 한국데이터베이스진흥원을 거쳐 서울경제신문에 몸담아 IT 발전에 한 획을 그었으며, 현재는 알파홀딩스 미디어본부장을 역임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기자는 큐레이터다’
정보 홍수 속
필요한 정보를 선별해야
 
탁월한 통찰력으로
정보전쟁의 최전선에 서다
 
 
전쟁이다. 정보사회에서 세상은 정보로서 구성되고 정보로서 변화하기 때문에 정보가 곧 돈이고 힘이다. 그러나 정보에의 접근 여부에 따라 정보격차가 발생하게 되고, 이는 삶의 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정보를 가장 먼저 접하는 기자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다. 그들이 정보를 얼마나 잘 분배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지에 따라 정보격차는 벌어질 수도, 줄어들 수도 있다. 인사이트는 그렇게 탄생했다. 창립자 권경희는 정보전쟁의 최전방에 서서 기자의 사명을 다 해왔다.
 
  -중대신문 선배를 인터뷰하게 돼서 영광이다.
  “반가워요.(웃음) 아직도 동료들과 밤을 지새우던 기억이 생생한데, 저도 감회가 새롭네요. 중대신문은 정말 제가 청춘을 바쳤던 곳이에요.”

  -지난 2014년, 인사이트를 창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통찰력을 뜻하는 인사이트는 빠르면서도 디테일이 싱싱하게 살아있는 SNS 기반 뉴스 미디어죠. 갈수록 어떤 기사의 클릭 수가 더 높나 경쟁할 수밖에 없는 트래픽 전쟁이지만, 영혼 없는 기사를 지양하고 질 좋은 정보를 신속히 제공하겠다는 패기로 서울경제 후배와 공동창립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인사이트는 제 꿈의 전부가 아닌 과정이에요. 학생 기자 때부터 꿈꿔왔던,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랄까요.(웃음)”
 
  판잣집만 덩그러니 놓여있던 허허벌판 내리에 대학촌을 조성하고, 중앙대 농구부 후원회를 창단해 시들어가던 대학 농구의 인기를 다시금 끌어올리고, 대학과 지역 간의 네트워크를 형성해 정보를 전달하고자 학보사 최초로 지역면을 신설하고…. 믿기지 않겠지만 모두 일개 학생 기자가 이뤄낸 일이었다. 처음엔 모두들 만류했다. 네가 할 일도 아니면서 왜 그런 것까지 하느냐며 아니꼽게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겐 신념이 있었다. 비록 학생 기자라 할지라도,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정보 홍수의 극단에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 그것이 그가 기자로서 지닌 사명감이었다.
 
권경희 동문이 기획한 지역면.
  -학생 기자가 안성캠 내리에 대학촌을 조성했다니, 믿기지 않는다.
  “제가 직접 만들었다기보단 대학촌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공론의 장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당시 내리는 완전 허허벌판에다가 땅에 명확한 소속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소속이 있더라도 사용하지 않는 땅이었어요. 그런데 그곳 판잣집에서 오랫동안 영업행위를 이어오신 분들이 있어서 문제였죠. 재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있었지만 그대로 놔뒀다가는 대학가 옆에 아파트단지나 들어서게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문화마을을 조성해보고자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만나기로 했죠.”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어렵지도 않았어요. 총장님을 비롯해 국회의원, 안성시 공무원, 토지 소유자 등 관련인을 모두 한분 한분 만나서 말씀을 드렸죠. 네가 어떻게 그걸 할 수 있겠냐는 걱정도 들었지만, 모두가 재개발 사안에 공감하도록 장만 만들어주면 충분히 이뤄낼 수 있는 문제라 생각해서 시청과 연계해 간담회를 진행했어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서로 발전할 수 있는지 방안을 강구해서 윈윈 전략을 세우자는 취지로 공청회까지 개최했죠. 그분들도 제 의견을 순수하게 받아들여주시고 ‘그래 우리 지역주민을 위해 노력해보자’며 잘 협조해주셔서 시작하게 됐습니다.(웃음)”

  -그 이후의 진행은 어떻게 됐나.
  “당시 전 2학년이었는데, 구체적으로는 더 이상 관여하지 말래서 관여를 못 했어요. 제 본분은 기자니까, 논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서로를 연결하는 일까지만 하고 나머지는 총학생회에 넘겼죠. 그치만 끝까지 책임지지 못해서 결과가 만족스럽진 않아 아쉬운 부분이 많아요.”

  -대학신문 기자가 그런 것까지 구상했다는 게 놀랍다. 기자가 해야 할 일은 아니었지 않나.
  “그렇죠. 근데, 생각해봐요. 취재하며 지역주민과 대학본부와 학생들을 고루 만날 수 있는 사람이 기자예요. 학교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다양한 정보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인 거죠.”

  -그런데 의외로, 원래는 만평을 그리는 만화 기자로 중대신문에 입사했다고.
  “그림도 좋아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리고 싶은 건 그려야 하는 성격이라, 대학본부를 강하게 비판하는 그림도 마구 그려댔어요.”
권경희 동문이 중대신문 기자 시절 그렸던 만평.

   -어떤 만화를 그렸나.
  “입사해서 처음 그린 사단만평은 당시 정부의 구호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는데, MBC 9시 뉴스에서 제일 첫 메인 데스크에 소개됐어요. 그리고 이사장님이 메디컬센터를 지원하겠다 했는데 지원이 잘 안 돼서 제가 ‘배째라’라는 만평도 그렸었죠. 저희 주간 교수님이 그걸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어요. 대학 1학년 때 만평 때문에 국내 신문이라는 신문은 물론 가십기사까지 다 섭렵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아이디어는 항상 마감 직전에 나오더군요.(웃음)”

  -취재하러 돌아다니는 일은 적성에 맞았나.
  “만화 기자로 입사했는데도 취재를 시키더군요. 그런데 취재를 나가면, 항상 취재원들이 제게 수습기자 맞냐고, 취재를 잘한다고 오히려 칭찬해 주셨어요. 제가 가면 술술 이야기해주시면서 정보를 주시길래 ‘아, 내가 기자가 적성에 맞나보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만화보다는 취재기자로서 더 활동하기 시작했죠.”

  -어떻게 취재를 했길래, 궁금하다.
  “반드시 이 사람을 통해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눈빛이 살아있었나 봐요. 아니면 단순히 이야기를 잘 들어줘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네요.(웃음)”
 
  남달랐다. 대학촌 발전을 위한 공청회를 독자적으로 주관한 데 그치지 않고 대학 최초로 지역면을 신설해 맡아 일간지의 조명을 받기도 했다. 중앙대와 주변 지역주민과는 전혀 연계가 없던 상황에서 대학과 지역 간의 경계를 허무는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프로농구 창단 둘째 날 경기에서 애국가를 부른 사람도, 중앙대 농구부 후원회를 창단한 사람도 그였다. 심지어는 구두를 신고 설악산을 완봉하기도 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하고 싶은 것과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꼭 해결해내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99년 졸업 후 서울전자신문에 입사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땐 꽤 성장하는 미디어였죠. 그런데 입사하자마자 저한테 SI(system integration)와 관련해 기사를 작성하라며, 면을 통째로 주는 거예요. IT분야인데, 소프트웨어·인터넷뿐만 아니라 기업용 솔루션을 주로 다뤄야 했어요. 그걸 맡은 별다른 이유는 없고 선배들이 어려워해서 저한테 떠넘긴 거죠.(웃음) 뭐, 어쩌겠어요. 해야죠.”

  -전혀 무지한 분야에 대해 갑자기 어떻게 면을 채우라는 건가.
  “당시 우리나라엔 SI 관련 번역본도 전무한 상태여서 무작정 외국계 기업 임직원들을 찾아갔어요. SI분야가 초창기다 보니 제가 만난 임직원들은 관련 분야 박사학위를 갓 따내고 한국에 온 분들이었어요. 덕분에 따끈따끈한 정보를 그대로 얻게 됐지요. 보통 하루에 세, 네 군데를 취재했는데 아침에 한 회사에 가서 열심히 설명을 듣고 나서 오후엔 경쟁업체에 가서 또 똑같은 설명을 듣는 거예요. 그렇게 서너 군데 다니다 보면 저녁엔 아는 척도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웃음)”

  -IT 쪽 전문기자로서 계속 활동했나.
  “당시 회사에서 인터넷 붐에 발맞춰 ‘인터넷벤처신문’을 만들고자 했는데, 제가 그 TFT팀장을 맡아 창간신문을 만들게 됐죠. 10억 원을 쥐고 지면계획부터 디자인까지 모두 총괄하며 성공적으로 발간했어요. 당시 발간한 신문이 강남에서 인기를 끌자 한국일보에서 특별섹션으로 구입해 배포하기도 했죠. 이후엔 한국데이터베이스진흥원에서 ‘디지털콘텐츠’라는 콘텐츠 전문 잡지를 만들었어요.”

  -2005년엔 서울경제에 입사했다.
  “제가 가장 오랫동안 몸담았던 곳이고 IT전문 기자로 입사했죠. 종편 도입이 다가오면서 콘텐츠 전문에 앵커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뉴미디어 부서로 발탁됐어요. 뉴미디어부 일원으로 서울경제TV 개국을 주관했죠. 서울경제TV를 개국하자 국제부로 발령이 났어요. 국제부 기자는 제 인생에 또 다른 도전이었어요. 그때까지 접했던 세상에 대한 시야를 한층 더 넓혀 주는 분야였거든요. 제가 좁은 시야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죠. 취재 대상도 바뀌었습니다. 우선 사람을 만나 실랑이를 벌이던 걸 책상머리에서 블룸버그통신 단말기와 외신 자료와 씨름을 합니다. 전 세계를 무대로 기자들과 경쟁하면서 짜릿하기까지 했습니다.”

  -국제부에선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다른 부서에 있을 땐 국제부는 가십 기사 쓰는 부서 정도로 생각했는데 막상 국제부에 가보니, 이건 스케일 자체가 달랐습니다. 어느 한 분야만 다루는 게 아니라 24시간 각국의 정치, 경제, 사회 등 종합기사를 모두 다루고 세계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자리인거죠. 증시는 물론 금, 유가, 각종 곡물 등 모든 시장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해야 하고 파악할 수 있게 됐어요. 지구촌이 점점 하나가 되고 영향력이 커지고 독자들도 국제 뉴스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다 보니 국제부는 매일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었어요. 야근담당 일 때는 평균 7백~8백 건의 외신이 올라오는데 그 중 지면에 오르는 뉴스는 5건도 안돼요. 그 만큼 내용에 대한 이해와 뉴스에 대한 감각 그리고 순발력이 있어야 좋은 기사를 내게 되죠. 매일 WSJ, 뉴욕타임스, 파이낸셜타임스, 이코노미스트 등을 꼭 봤어요. 그들의 기사를 번역하면서 ‘아, 기사는 이렇게 쓰는 거구나’라고 배웠죠. 그렇게 접한 정보로 시야를 넓힐 수 있었어요. 다만 아쉬운 점이 있었어요.”

  -어떤 점이 아쉬웠나.
  “전 지원받은 단말기를 통해 이런 좋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지만 모두에게 빨리 알려줄 수 없다는 게 아쉬웠어요. 신문에 나갈 땐 이미 하루가 지난 후잖아요. 우리는 전날 아침 따끈따끈한 정보를 접하는데 편집회의를 통과해 지면에 실리고 인쇄작업을 거쳐 배부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거예요. 심지어는 일반보도가 아닌 기획기사로 낸다고 하면 일주일 뒤에야 정보가 나가니까요. 그래서 ‘아, 이런 걸 잘 전달해 줄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생각이 인사이트를 만들게 된 시작이라 할 수 있겠네요.(웃음)”
 
  노무현 정권 당시 언론이 비교적 자유화되면서 이곳저곳에서 매체가 속출했다.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진 언론은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종목은 ‘속도’와 ‘자극’. 누가 얼마나 빠르게 보도하고, 자극적으로 보도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지에 따라 트래픽(통신의 흐름) 양이 좌우됐다. 기자들은 본연의 업무가 아닌 특집기사나 사업파트로 밀려났다. 남은 것은 인터넷에 어지러이 표류하고 있는 영혼 없는 기사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기자들뿐.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타 언론사들이 포털에서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을 때 인사이트는 페이스북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아무리 포털에서 아등바등해봤자 이미 사람들은 페이스북에 결집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다.
 
  -종이신문의 위기가 닥쳤다.
  “타이타닉의 몰락이에요. 배 안에선 침몰하는지 몰랐듯이 안에 있으면 이곳에서 내려야 한다는 생각을 못 해요. 발전은 없어지고 점점 가라앉는 느낌은 들지만, 그래서 언젠간 무너질 게 확실한데 내가 있을 땐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상황이 온 거죠. 기자가 더는 예전처럼 대접받는 직업도 아니고, 그러는 동안 네이버 블로그 기사와 페이스북이 활발해지면서 점점 자리를 빼앗아가고….”

  -기자가 사라진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직업으로서의 기자의 역할이 바뀔 순 있겠지만 기자는 없어지지 않아요. 기록하고 보고 분석해서 정보를 전달하는 일은 누군간 해야 하니까요. 정보에 배고파하는 사람은 언제나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오히려 천문학적인 양의 정보 홍수 속에서 어떤 정보가 중요한 정보이고 좋은 정보인지, 필요한 정보인지 알기가 힘들어지니까 이럴 때일수록 기자의 역할이 중요시된다고 생각해요.”

  -기자는 정보를 골라줘야 한다는 건가.
  “그렇죠. 큐레이터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쉬워요. 지금까지 뉴스는 전문적인 기자들이 취재한 것을 뉴스로 내보냈다면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만들어낸 정보 중 재미있거나 가치 있는 것을 재빨리 찾아내어 사실 여부를 확인한 뒤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기자들이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동안 매체는 어떤 특정한 색깔을 갖고 한쪽면만 보여줬다면 우리는 앞뒤옆면 모두를 볼 수 있는, 독자에게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는 매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좋은 재료란 정확히 어떤 정보인가.
  “좋은 정보는 좋은 정보원으로부터 시작해요. 보통 일간지에선 특정 분야의 최정상에 위치한 권위 있고 이미 잘 알려진 사람들의 정보만 사용하잖아요. 그 외엔 ‘격’이 안돼서 걸러내죠. 하지만 그건 굉장히 협소한 정보이고, 그 사람들이 아무리 분야의 권위자라 해도 충분히 다른 좋은 의견들이 있을 수 있는 거거든요.”

  -듣고 보니 그렇다.
  “스타가 되고 싶은 사람은 너무 많거든요. 그리고 그중엔 그럴 자격이 충분히 되는데도 불구하고 기회가 없어서 아직 유명해지지 않은 분들도 분야마다 굉장히 많아요. 자신의 좋은 정보를 아무리 알리려고 해도 접근해주지 않으면 그분들은 드러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그런 분들을 발굴해내자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사람들과 연결해준다는 건가.
  “그런 분들에게 칼럼을 받아서 제공해주자고 했어요. 그분들은 본인을 드러내고 싶어서 자기 SNS에 정보를 막 올리곤 하는데 사실 SNS는 지인들 외 사람들에겐 도달하기 힘들잖아요. 바로 그 지점이에요. 우리가 중간역할을 해주자는 거죠.”

  -정보를 독식하지 않고 퍼뜨린다, 멋지다.
  “그런데 아무리 그런 게 하고 싶어도 매체가 힘이 없으면 할 수가 없잖아요. 아무리 좋은 걸 만들어도 보는 사람이 있어야죠. 어느 정도 트래픽에는 도달해야 우리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때 정말 유혹도 많았고, 실수도 많이 했어요. 트래픽 전쟁을 하기 위해 선정적인 기사를 많이 내기도 하고 그랬죠. 그 부분에서 내부적으로 대립이 있었어요.”

  -트래픽이 우선인지, 원래의 취지가 우선인지에 대한 대립인가.
   “그렇죠. 원래는 그런 자극적인 기사들이 싫어서 인사이트를 만들었는데, 현실적으로 우리도 트래픽이라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 거죠. 그래서 어느 정도 트래픽을 올려두고 나서야 우리가 하고 싶은걸 할 수 있으니 감수하자는 입장과 그래도 원칙을 지키자는 입장이 있었어요. 전 후자였죠.”

  -어떤 방식을 택했나.
  “인사이트는 결국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을 택했어요. 트래픽을 고려하되, 선정적인 기사는 지양하고 흥미로운 내용으로 대체하기로 했어요. 전 세계 각국의 재미있는 뉴스를 퍼 나르는 방식으로요. 그렇지만 우리의 애초 취지인, 정보가 필요한 사람과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을 연결하자는 역할도 병행했죠.”

  -비주류 권위자들에게 질 좋은 칼럼을 받아 게재하겠다는 취지 말인가.
  “네. 책에 대한 칼럼이에요. 가장 통찰력을 줄 수 있는 건 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요즘 책을 잘 안 읽는데 어떻게 관련 정보를 주는 게 좋을까, 고민 끝에 출판사와 제휴를 맺어서 작가들의 정보를 인사이트에 칼럼 형식으로 내보내기로 했어요. 간접적으로 책을 홍보하고,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죠.”

  -실제로 어떠한 영향을 미쳤나.
  “생각보다 많이들 읽었어요. 정보 제공자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책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나아가 책을 사는 데까지 영향을 미치니까 좋아하시더라고요. 선순환 구조가 형성이 되는 거죠.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창간 100일 만에 트래픽이 1억을 찍었어요. 최근에 이르러서는 원래의 취지를 잘 살리려 노력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습니다.(웃음)”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기자란, 좋은 정보를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해요. 물론 사람들이 정말 알아야 하는 사회 뉴스를 발굴해서 전달하는 기자도 필요하죠. 그렇지만 생활에 있어서, 삶에 있어서 필요한 정보들을 전달하는 기자들도 있어야 하잖아요. 다수의 사람이 보게끔 기사로 내보낼 수도 있지만 오직 한 명만을 대상으로 하는 정보라도 다이렉트로 제공해 주는 실제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제 신조예요. 특별한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서로 연결해 주고 정보를 전달해 주는 거죠. 이를 위해 현재는 아동, 여성, 신지식인 등 특화된 분야의 정보를 중심으로 한 미디어를 만들려고 알파홀딩스라는 그룹을 만들어 미디어본부장을 맡고 있어요. 국내 최초 세계를 연결하는 멀티미디어 미디어사를 만들고 싶어요.(웃음)”
 
프로농구 창단 둘째날, ‘중대신문사 합창단’ 이름으로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중앙대는 제게 숙명과 같은 존재이고 자양분이 된 곳이에요. 중학생 때부터 기아팬이었던 제게 그 대상을 만나 함께 땀을 흘릴 수 있게 한 장소이고, 연극과 영화에 관심이 많은 제게 특별한 인연을 맺게 하고 배움의 장도 만들어 준 추억의 장이예요. 많은 배움과 인적 네트워크, 언론인이라는 제 꿈을 이루기까지 저를 새롭게 탄생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끼친 고마운 기억이에요. 저의 신앙의 근간인 기독교 정신을 더욱 확고하게 한 곳 역시 중앙대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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