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벌레를 매우 싫어한다. 꿀잠을 자고 있을 때 잠을 깨우는 모기의 ‘윙~’ 소리도 싫고 강의실에서 때로 마주하게 되는 각종 벌레도 싫다. 나뿐만 아니라 벌레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기분 좋음을 느끼는 이들보다 혐오나 비호감 등의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타인에게 혹은 타인이 자신에게 벌레라고 부르는 것을 듣는다면 기분이 좋지만은 않을 테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타인에게 ‘벌레(충)’라고 부르는 일이 만연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이러한 ‘충’들은 우리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다.
 
  벌레를 뜻하는 한자 충(蟲)은 마치 하나의 접미사처럼 마구잡이로 붙여져 다양한 단어들을 만들어 내고 있고 이들 신조어는 충 앞에 붙은 단어들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며 공공연하게 사용되고 있다. ‘급식충’은 급식을 먹는 초·중·고등학생들 중에 미성숙한 태도를 보이는 이들에 대한 반감으로, ‘맘충’은 이기적인 일부 아이 엄마들에 대한 적대감으로, ‘진지충’은 어떤 사항이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졌다.
 
  이러한 ‘XX충’들은 줄어들기는커녕 다양한 단어들에 기생하면서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일부의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한 단어에서 보통 사람들까지 포괄하는 일반명사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증가 추세는 우리 사회에서 타인에 대한 혐오감이 커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분명 내가 기억하던 벌레는 책벌레나 일벌레처럼 대상을 가볍게 놀리는 단어였지, 이들에 대한 격렬한 증오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벌레라는 단어를 경멸의 대명사로 사용하게 된 것일까? 분명한 정답은 아니겠지만 그 원인 중 하나는 우리에게 여유가 사라진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성공과 생존(먹고살기 혹은 취업)을 쟁취하기 위해 승자와 패자가 갈리고 소수만 성공하는 경쟁사회 프레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게다가 최근에는 공정한 경쟁이 애초에 가능했던 것인지 회의감을 품게 하는 일련의 사태들이 일어났다. 수저로 대표되는 계층 간 갈등 문제, 헬조선과 같은 이슈들이 엮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더욱 각박해졌다. 이런 힘든 현실에서 잠시나마 탈출하자는 욕구는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창구에서 타인 혐오라는 방법으로 뒤틀려 표현되었던 것은 아닐까.
 
  뒤틀린 혐오는 일시적이면서도 개인적인 해소법이고, 타인을 지속적으로 미워하는 증오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뿐이다. ‘XX충’으로 대표되는 혐오문제는 우리 사회가 직면해야 할 만연한 문제이므로 이제 우리는 왜 서로가 미워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구성원들에게 혐오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지금 사회라면, 우리는 미래의 주역들이 더 이상 미움 속에서 자라지 않도록 뒤틀린 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
박서영 학생
역사학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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