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 분야 노벨상 3년 연속 수상으로 일본 열도가 뜨겁다. 한때 한·중·일 3국 가운데 유독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연유를 놓고 열띤 논의가 진행된 적이 있었다. 당시 하버드대 교수였던 라이샤워는 일본의 장인정신에서 그 요체를 찾았다. 과거시험 합격 한 번으로 인생역전이 가능했던 한·중과 달리, 일본은 신분상승의 길이 없었기 때문에 주어진 한계 속에서 극한을 추구하는 장인정신이 꽃을 피워 기술발전이 가능했다는 일종의 역설이다. 
 
  이후 한국이 산업화에 성공하고 중국이 미국과 함께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로 급부상하면서 그런 주장은 설득력을 잃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전문가 집단의 장인정신 실종으로 위기를 겪고 있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라이샤워의 역설은 여전히 유효하다.  
 
  현재 한국사회는 법조비리, 회계조작, 보고서조작, 허위진단서 등으로 내홍에 휩싸여 있다. 모두 전문가 집단이 깊게 개입된 사건들이다. 물론 전문가 개개인의 도덕성 문제를 거론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환부이고, 병의 뿌리는 더 깊은 곳에 있다. 바로 단기적 성과주의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전관예우 등으로 로비를 잘해 눈앞의 성과를 거두는 변호사가, 학술적 가치와 사회적 기여도의 유무를 떠나 일단 많은 논문을 쓰는 교수가, 긴 호흡의 연구개발보다 정부정책이나 기업요구에 맞춰 연구비를 잘 따오는 과학자가, 환자들을 상대로 높은 매출액을 올리는 의사가 유능하다고 대접받는 사회 풍조 말이다. 
 
  그 결과로 따라붙은 것이 ‘헬조선’이라는 오명이다. 정부가 ‘모방에서 창조로 전환하기 위한 과학기술 혁신’을 국가 선진화 전략으로 내건 것이 지난 1995년 무렵이다. 그러나 2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First mover’가 아닌 ‘Fast follower’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답보하는 상태에서 이윤 창출을 위해 대기업은 중소 기업에, 중소 기업은 다시 노동자에 그 부담을 전가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정규직,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로 이어지는 노동자 계층의 수직적 질서요, 갑을관계로 대표되는 약탈적 먹이사슬이다. 
 
  어떻게 우리는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일까? 입으로는 창조적 혁신이라 외치면서 발걸음은 눈앞의 편리와 성과로 향했기 때문이다. 특히 교육계의 상대평가 만능주의는 무엇보다 심각하다. 학생들이 ‘무엇을 얼마나 배우고 깨우쳤나’가 아니라 ‘몇 등을 했나’로 평가받는 세상에선 우리가 바라는 창의적 인재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이제 일본의 노벨상 3년 연속 수상을 부러워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돌아볼 일이다. 가마에서 갓 꺼낸 도자기를 자기가 추구하는 작품세계가 아니라며 깨버리는 도공의 장인정신을 교수로서 나는 얼마나 실천하려 했는가? 우리 학교는 허울 좋은 스펙이 아닌 자기실현의 동기와 성취감을 학생들에게 얼마나 제공하였는가? 우리 사회는 얼마나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굳건히 자기의 길을 가는 장인들에게 비웃음이 아닌 박수와 성원을 보냈는가?

 
장규식 교수
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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