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멸감: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저|문학과지성사|2014년 03월
서로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 일상화된 오늘날. 곳곳에선 분노에 찬, 억울함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억울해 죽겠어!”, “무시하지 마.”, “지는 그렇게 잘 났나?”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개인의 자존감은 처참히 내팽개쳐집니다.

  남을 공격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언제부턴가 TV 예능프로그램에서는 타인을 향한 공격과 비난으로 점철되어야만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기 시작했죠. 필연적으로 시청률 전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예능프로그램은 앞다투어 누가 더 독한지를 놓고 경쟁하기도 합니다.

  작가는 이러한 감정이 형성되는 사회적 구조를 추적합니다. 사실 특정한 감정의 끄나풀을 하나 끄집어내 복잡하게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어나가기란 만만치 않습니다. 게다가 감정에 대한 연구는 겉돌 수 있죠. 자칫 주관적이거나 사변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인데요. 그럼에도 작가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해 나갑니다.

  작가는 황폐해진 우리들의 감정을 ‘모멸감’이라는 키워드로 진지하게 연구해 나갑니다. 동서고금을 종횡무진 넘나들죠. 최근 벌어졌던 국내외 시사 사건들부터 오래된 문학 작품들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들은 이 책을 떠받치는 서까래가 됩니다. 또한 우리에게 꽤 통찰력 있는 시각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지난해 논란이 됐던 ‘갑질논란’을 예견한 것처럼 보이는 내용도 담겨 있죠.

  이 책에서 말하는 한국인의 모멸 작동 구조는 이렇습니다. 조선 시대에 형성된 귀천 의식과 신분적 우열 관념이 청산되지 못한 상태에서 산업화가 추진되고 사회 환경이 급변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계급적 질서 하에서 갖고 있던 개인의 수치심이 축적됐죠. 수치심은 자존감을 위협합니다. 결국 자존감의 하락은 되돌릴 수 없는 원한과 분노와 폭력의 뇌관을 때리게 되죠. 황금만능주의, 물질만능주의로 대변되는 천민자본주의로 작동되는 부러움과 부끄러움의 경제학은 한국인의 정신을 왜곡합니다. 이기주의는 있지만 개인주의는 없고, 집단주의는 팽배해도 연대할 공동체는 없으며, 국민은 있어도 시민은 없죠.

  오랫동안 지속된 봉건적 세계관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일까요? 일부 가진 자와 배운 자들은 자신을 양반으로 착각하는 말과 행동을 서슴없이 합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어디서 감히!” 등과 같은 갑질은 신분제가 폐지된 지 약 1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그 신분 의식만큼은 지속됨을 보여주죠. 그리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귀천을 구분하고 위계질서를 강화시켜나면서 서로를 모멸합니다. 그 모멸이 축적돼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죠.

  ‘극혐’이라는 자극이, ‘부들부들’이라는 반응이 넘쳐납니다. 상대방에 대한 극한의 혐오라는 자극과 주체할 수 없는 극한의 화로 몸까지 떠는 부들부들이라는 반응 말입니다. 이 둘은 각각 모멸을 주는 자극의 최상급이자 모멸을 받는 반응의 최상급이죠.

  저자가 인용한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롤로 메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유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서 멈추는 데 있다. 멈추는 곳에서 선택이 일어난다.” 자극과 반응 사이의 자동회로를 차단하는 데서 자유가 온다는 말이죠. 그 자극과 반응의 악순환 고리를 끊는 것이야말로 굴욕을 품위로 바꾸고 모멸을 존엄으로 전환하는 길입니다.

  이번호에서 중대신문 심층기획부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서 잠시 멈춰볼 시간을 가질 참입니다. 2주 연재로 진행되는 혐오 기획이 자극과 반응 사이의 자동회로를 차단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죠. 하지만 적어도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완충지대의 역할은 해줄 수 있습니다.

  모멸과 혐오가 갖는 의미는 각각 다릅니다. 모멸이 수용자 중심의 감정적 반응이라면 혐오는 생산자 중심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이 둘을 명약관화하게 분리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반작용이든 간에 이를 추동하는 작용하는 힘이 있을 것이고, 사태의 실마리를 푸는 데엔 당연히 그 작용의 힘을 알아볼 필요가 있죠. 그리고 우리는 양가의 감정 모두를 이해했을 때가 돼서야 비로소 ‘멈출 기회’를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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