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촌 동생은 윌리엄스 증후군이라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 병을 앓는 사람은 타인에 대한 경계시스템이 전혀 없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도 전혀 경계하지 않고 좋아해 준다. 지나가는 크롭톱 입은 사람의 배를 만지며 ‘안 추워?’라고 물어보고, 무서운 사람이 위협적인 태도로 시비를 걸면 피해야 하는 줄도 모른 채 오히려 ‘왜 그래? 화났어?’라며 걱정해준다. 이들이야말로 아가페적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어떤 성직자는 이들을 ‘날개 없는 천사들’이라고 칭했다.
 
  외가댁의 어른들께서도 그를 ‘천사’라고 부르신다. 그러나 ‘천사’라는 단어에는 그저 ‘착하다’라는 의미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장애를 곧이곧대로 보지 않고 왜곡하는 시선일지도 모른다.
 
  사촌 동생은 명절에 용돈을 받지 않는다. 그의 몫이 있어도 손에 직접 쥐어진 적은 없다. 외할아버지께선 “우리 ‘천사’는 돈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며 “그만큼 순수한 아이이기 때문에 줄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사촌 동생은 고등학교 삼학년이 되도록 아직 용돈을 받아 본 적이 없다.
 
  또 그는 친구가 없다. 적어도 우리 집안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여진다. 미국 학교에서 친구랑 졸업파티를 가게 됐다고 말했을 때, 가족들은 그 사람이 놀아주고 같이 가주는 것일 뿐이라고 반응했다. ‘천사’같이 착한 아이라 ‘친함’과 ‘친하지 않음’을 구분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일 뿐이라고.
 
  사촌 동생과 ‘정상인’들의 차이는 딱 세 가지다.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점, IQ가 특정 부분에서 낮고 특정 부분에서는 높다는 점, 그리고 심장질환을 앓고 있다는 점. 그러나 모든 사람을 좋아하는 순진한 아이에게도 동등한 위치의 친구가 있을 수 있으며 지능이 낮다고 해서 타인의 동정심 담긴 눈빛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는 돈의 개념을 알고 있으며 자신만 몇 년째 돈을 받지 못한다는 소외감도 느끼고 있다. 그에게도 보고 싶다는 친구들의 연락이 오고 어른들의 수군거림도 느껴진다.
 
  이 모든 것들을 어른들께서 모르시는 건 아니다. 이 증후군에 대해 그분들만큼 잘 아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내게 이 모든 것을 가르쳐준 분들은 오히려 어른들이다.
 
  하지만 그분들은 천사라는 단어의 늪에 빠지신 것 같다. ‘걔는 순진한 천사라서 못해’, ‘천사같이 바보야’란 말들 때문에 당신들도 모르게 그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신다. 그리고 배려라고 생각했던 말과 행동이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아마 다른 장애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장애’라는 꼬리표 때문에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해서 ‘그들은 도움이 필요하고 능력이 없다’는 제한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위험이 크다.
 
  우리는 이런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 ‘천사’라는 단어의 늪에서 빠져나와야만 그들이 인간으로서 온전한 대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사’가 아니다. 인간일 뿐이다.
범지민 학생
심리학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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