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마지막으로 너를 떠나는 사람이 될게.”

  지키지 못할 말이라면 뱉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나는 웬만해선 약속 같은 것은 잘 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지난 여름 가장 친한 친구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후 장례식에 쓸 영정사진을 찾으러 친구네 집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친구에게 약속했다.

  당시 우리는 스물셋, 죽음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너무 미숙한 나이였고 친구 아버님 역시 쉰셋으로 돌아가시기엔 너무 젊은 나이였다. 세상이 무너진 듯 울기만 하는 친구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함께 울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 우리는 너무 어렸고 처음 있는 일에, 상상도 못 해본 일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그리고 친구 아버님께서 입원해 계시는 순간부터 발인 당일 날까지 모든 절차를 친구 옆에서 경험했던 나 역시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그전까지 우리가 맞이할 첫 경조사는 당연히 결혼식일 줄로만 알았다.

  어쩌면 그 충격적인 순간의 연속이었던 그 날들은 ‘우리’에게 큰 전환점이 됐을 것이다. 사람을 둘러싼 분위기나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를 색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우리의 채도는 몰라도 암도(暗度)는 분명히 높아졌다. 때가 탄 것과는 다른 느낌의 것이었다. 아닌 척했지만 우리는 전보다 조용해졌고, 신중해졌고, 조심스러워졌고, 침착해졌다. 우리는 소중한 것을 잃었고, 소중한 것을 잃는 것을 보았다. 부재가 존재를 증명한다는 말이 이토록 잔인했던가. 친구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한참 동안 우리는 원래 생활로 돌아갈 수 없었다. 친구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나는 휴학을 했다. 우리는 최대한 같이 시간을 보냈으며 서로의 집안일을 도왔다. 아버님께 자주 찾아봬 많은 이야기도 나눴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않겠냐며, 너무 착하게 사는 것도 억울한 것 같다며, 하늘이 많이 외로웠나 보다며, 잘 계실 것이라며, 다 지켜보고 계실 것이라며, 좋은 모습 보여드리자며….

  저마다 ‘소중’의 의미가 다르겠지만 소중한 것 중에서는 갖고 싶은 것과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관계에서도 내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사람과 언제나 늘 내 사람으로 남아줬으면 하는 사람이 있다. 있으면 좋을 것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사람이 있다.

  진짜 소중한 것은 이미 갖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종종 왠지 모르게 의욕이 없고 ‘무엇을 위해 내가 이러고 있나’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소중한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지켜내기 위해서’라고 스스로 타이르곤 하는데 그러면 거짓말처럼 힘이 난다. 충분한 동기이지 않은가.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는데? 매 순간 나의 ‘소중이’들에게 나 역시 그들의 ‘소중이’이길 바라며 조금 더 반짝반짝 빛나기를.
 
이슬 학생
중국어문학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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