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은 호기심, 의심, 지적질 이 세 가지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임광기 동문(신문방송학과 81학번)은 늘 세상을 향한 레이더를 늦추지 않았다. 인터뷰 내내 그는 한결같은 표정으로 일관했지만 불법 태아 성감별 현장부터 알바니아 폭동 취재에 이르기까지 언론인으로서의 걸어온 길은 다채롭기 그지없었다.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언론인의 길을 걸어온 지 어느덧 약 30여 년. 임광기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날기 위해선
수많은 결심보다
한 번의 날갯짓이 필요하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토대로
매사에 합리적 의심을 던져라

그에게선 언론계 진정한 멀티 플레이어의 면모가 느껴졌다. 외환위기 당시 경제부, 청와대 출입 기자를 비롯해 SBS 보도부, 사회부, 정치부, 편집부를 두루 거쳐 현재 SBS 논설위원을 맡고 있는 임광기 동문. 그가 바라보는 한국 언론의 문제점과 언론인을 꿈꾸는 후배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목동 SBS 사옥에서 그를 만나 보았다.

  -지난 1월 중앙언론인상을 받았다.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한 소감은.
  “모교에서 뜻깊은 상을 받게 되어 감사한 마음으로 왔어요. 요즘엔 일이 없었지만 대학원을 다닐 때와 신문방송학부 <취재보도론> 강의를 맡았을 때는 자주 갔죠. 그 후로도 언론동문회 부회장으로서 모임이 있을 때마다 종종 모교를 방문했어요.”

  -전두환 정권이 시작되는 81년에 중앙대에 입학했다.
  “제가 재수를 하던 80년도까지만 해도 민주화의 바람이 불었어요. 하지만 얼마 못 가 또다시 군사 정권이 들어서면서 살얼음판이 됐죠. 숨쉬기도 어려울 만큼 꽁꽁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대학을 다녔어요. 교수들일지라도 문제의 소지가 있는 발언을 한다면 잡혀가는 시절이었으니까요.”

  -언론 탄압도 심하지 않았나.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싶었어요. 정부에서 내려온 보도 지침과 검열이 난무하던 시대였죠.  꼭 보도돼야 할 기사는 작은 1단 기사로 나오고, 정면으로 비판하기보다는 행간의 의미를 들여다봐야 비로소 그 속뜻을 알 수 있었죠. 대한민국 언론의 자유는 정말 먼 훗날에야 이뤄질 것만 같았어요.”

  -학업에만 전념하기 힘든 분위기였을 것 같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가 일어났죠. 학내에도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어요. 시위에 앞장서는 학생들과 그 와중에도 도서관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학생으로 나뉘었죠.”

  -심적 갈등은 없었나.
  “저 또한 시대적 상황과 현실적인 문제들 사이에서 아주 혼란스러웠어요. 아마 그 시기를 겪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한 번쯤 겪는 고뇌였을 것 같아요. 군대에 다녀오고 나니 87년의 봄이 왔더군요.”

“땅속 깊이 뿌리내린 나무에게 어떤 흙과 벌레가 도움 될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곳에 있던 모든 것들이 엮여 나무를 튼튼하게 키우는 게 아닌가 싶어요.” 비록 시대적으로는 혼란스러운 때였지만 그는 다양한 경험을 했던 학창시절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이자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자양분이 되었다고 말한다.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연극학회인 ‘또아리’를 만들기도 했다던데.
  “원래 연극에는 관심도 없었어요. 친구 대본 연습을 따라갔는데 옆에 있던 제게 당시 연출을 맡은 선배가 ‘너도 해봐, 목소리 좋다. 계속 해봐’라며 대사를 시키셨죠. 훗날 SBS 라디오 피디가 된 대선배님이셨어요. 그걸 계기로 현재 경향신문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배장수 선배와 함께 연극 활동을 시작했죠. 1인 18역을 연기한 ‘품바’ 공연이 큰 인기를 끌며 돈을 많이 벌었어요. 내친김에 학과 극회로 자리 잡게끔 ‘또아리’라는 이름을 짓고 남은 돈을 다음 기수에게 물려줬죠. 아직까지 후배들이 열심히 활동해줘서 고마워요.”

  -또 다른 활동이 있다면.
  “신입생 환영회, 중앙대 축제 등 각종 사회도 많이 보러 다녔어요. 당시 소문이 나서 서울교대, 국민대 등 다른 대학교 행사까지 맡게 됐죠.”

  -끼가 많은 학생이었는데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겠다.
  “그렇지 않아도 학창시절 같이 사회를 보던 친구가 자기와 함께 MBC 개그 콘테스트에 나가자고 했었어요. 하지만 저는 ‘미안하지만 나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죠. 어릴 때부터 당연하게 꿈꿔 온 건 기자였으니까요.”

장기자랑 시간이 되면 직접 작성한 대본으로 이른바 ‘엉터리 뉴스’ 콩트를 선보이던 그는 대학 졸업 후 ‘진짜 기자’가 된다. 전남일보 창립 멤버 다섯 명 중 막내로 본격적인 기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91년 개국한 SBS에 경력 기자로 지원해 새로운 둥지를 틀게 된다. 

  -96년 산부인과 불법성감별 실태 보도로 ‘대한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과 그해 ‘한국방송대상 보도기자상’을 수상했다. 당시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요즘엔 이해가 잘 안 되겠지만 그때만 해도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불법 성감별이 성행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불법 성감별을 해주는 산부인과가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죠. 바로 잠입취재팀을 꾸렸어요.”

  -취재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아무래도 방송은 신문과 달리 영상이 필요하니까요. 잠입취재에 응해줄 임신 초기 임산부를 섭외하는 데만 한 달이 걸렸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임산부를 수소문하고 한동안 남의 배만 보고 다니는 날이 계속됐죠. 어렵게 임산부를 섭외해 잠입취재에 성공했어요. 불법 성감별이 성행하는 실태와 초등학생 교실 현황을 보여주며 남녀 성비 불균형 실태와 현재 관련 법안의 문제점을 연달아 보도했죠.”

  -보도 후 반응은 어땠나.
  “다음 날은 검찰 조사 착수, 그 다음 날은 보건복지부 진상 조사 착수 등의 속보가 이어졌어요. 결국 불법 성감별에 대한 처벌법이 강화되더라고요.”

  -기자로서 뿌듯한 결과였겠다.
  “그런가 하면 고발 보도를 할 때 아쉬움도 많이 남아요. 잘못을 저지른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고발한 건데 자칫하면 방송된 사람만 처벌받고 아무것도 개선되지 않은 채 끝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사안을 고발할 때는 이 사안이 구조적인 문제인지, 개인의 문제인지 확실히 짚고 가야 합니다. 만일 구조적인 문제라면 그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도록 취재하고 기사 작성에 좀 더 신중해야만 해요.”

  -지난 2008년부터는 ‘SBS 나이트라인’의 팀장을 맡기도 했다.
  “나이트라인은 SBS의 대표 마감 뉴스죠. 당시 나이트라인을 맡으며 어떻게 하면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했어요. 방송에서는 ‘무엇을 보도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더 중요할 때가 많기 때문이죠.”

  -고민한 결과 어떤 시도를 했나.
  “일반 보도와 스포츠 소식 등으로 이뤄지던 기존 뉴스의 틀을 깼어요. 뉴스가 될 만한 연예인들을 초대해 특별 인터뷰 자리를 마련했죠. 요즘도 하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마감 뉴스와 함께 이 시각 음주 단속 현장을 보여주었어요. 처음 이 아이디어를 냈을 때 사람들은 ‘농담이지?’라고 물었죠.(웃음) 경찰 측도 회의적이었고요. 하지만 막상 음주 단속 현장 방송이 나가자 꽤 화제가 됐어요. 신선하다는 평도 듣고요.”

  -뉴스 부문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같은 사안이라도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효과가 다르기 때문에 뉴스에서도 새로운 시도가 필요해요. 매사 새로운 방식을 추구하는 성격도 한몫했죠. 대신 무언가를 바꾸려면 제대로 된 근거가 있어야 해요. 기본적으로 아이디어가 좋아야 하고요.”

  -그래서 지난 SBS 6.3 지방선거 선거방송이 신선했나보다.
  “그랬다면 다행이네요.(웃음) 사실 선거방송을 총괄하는 기회는 흔치 않은 경험이에요. 방송 3사가 똑같은 시간대에 똑같은 내용으로 평가받는다는 점에서 담당자로서도 부담스러운 상황이었죠. 선거방송의 8할을 차지하는 ‘숫자’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면서도 더욱 재밌게 만들고 싶었어요. 후보자 얼굴과 숫자 배치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캐릭터, 배경음악, 애니메이션 효과 등을 이용해 눈길을 끌 만한 요소들을 집어넣었죠.”

“취재가 주어지면 공감을 하고 적극적으로 찾아보는 경우가 있지만 ‘그게 왜 문제라는 거지’라는 생각하는 때가 있죠. 적극적으로 뛰어들어도 취재에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100% 안 돼요.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해결책을 찾는 방법은 어느 취재론 강의에서도 알려주지 않죠. 스스로 부딪히면서 깨달아야 해요.”

  -기자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일은.
  “운 좋게도 워낙 많은 경험을 해서…. 그간 맡아온 일들이 다 기억에 남지만 특히 알바니아 폭동 취재는 잊지 못할 기억이에요. 현지인들은 그리스 국경을 통해 탈출하고 있는데 우리는 취재를 위해 알바니아로 들어가고 있었죠.”

  -가기 전 가족들에게는 뭐라 말했는지.
  “그때 아이들이 매우 어렸어요. 집에서 알면 반대할 게 뻔해서 가족들에게는 그리스에 문화유적 취재를 간다고 말했죠. 혹시 저한테 무슨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 사무실 책상 서랍에 편지를 남겨두고 떠났어요.”

  -방송을 보고 결국 탄로 났을 텐데.
  “열흘 정도 알바니아에 머무르고 왔는데 보도 영상을 보고 가족들이 깜짝 놀란 상태였죠. 그래서 ‘문화유적 취재를 갔다가 전쟁이 나서 그쪽으로 투입됐다’ 뭐 이런 식으로 말했어요.(웃음)”

  -그렇게 하면서까지 알바니아 폭동 소식을 보도한 이유가 있나.
  “당시 알바니아 폭동의 원인은 극심한 경제난이었어요. 반면 그때 대한민국 경제는 호황이었죠. 우리도 언제든 경제가 무너질 수 있고, 경제 위기로 인한 사회 혼란을 겪을 수 있다는 걸 타산지석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SBS 논설위원이 된 후로는 어떤 일을 맡았나.
  “SBS 러브FM ‘뉴스레이더’ 진행을 담당했었어요. 요즘은 사안에 따라 ‘뉴스 브리핑’이라는 프로그램에 가끔 패널로 출연하고 있죠.”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종종 논설위원이 전체 논조를 장악하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그건 영화일 뿐이죠. 지금은 우리 사회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요. 언론사 내 노동조합, 공정방송위원회 등 다양성이 보장받는 한층 성숙한 사회가 됐죠.”

  -언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감시자의 역할’이죠. 정보나 홍보 기능은 다른 매체나 방법으로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어요. 하지만 공정한 보도를 통해 정치, 경제를 비롯한 사회 전반을 감시하는 기능은 언론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에요. 부당한 것을 고발함과 동시에 예방하는 효과가 있죠.”

  -감시 기능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의미에서 속보 경쟁은 큰 의미가 없어요. 또한 언론계 인사가 정치권으로 진출하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죠. 언론 생활을 기초로 정치를 한다면 결국 언론이 정치의 발판으로 전락할 수 있어요. 비판의식이 흐려지기 때문에 감시 기능 또한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죠.”

  -현재 우리나라 언론이 고쳐야 할 문제점이 있다면.
  “민주화와 같이 우리 사회의 큰 공감대가 있던 시기를 지나면서 점차 옳고 그름보다는 좋고 나쁨을 따지는 이념적인 대립이 심해진 것 같아요. 문제는 언론인들 자체도 그 이념 속에 같이 서 있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 갈등을 풀어나가려는 노력보다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어 너무도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념에 따라 대립하는 보도가 이뤄진다는 건가.
  “우리나라 언론은 전반적으로는 불편부당을 내세우지만 사실상 이념에 따라 극명하게 다른 보도를 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미국의 경우 폭스(FOX) TV는 공화당을 지지한다고 알려져 있죠. 언론사별로 정치적 이념을 명확히 드러냈기 때문에 시청자들도 이를 미리 알고 뉴스를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 언론은 겉으로는 이념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보도를 정확하기 받아들이기 더욱 힘든 현실이에요.”

  -마지막으로 언론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호기심, 의심, 지적하는 능력을 키웠으면 해요. 제 아내는 가끔 제게 ‘왜 그렇게 지적하느냐’고 불평하지만.(웃음) 나쁜 의심, 지적이 아니라 사안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접근해야 합니다. 언론인이라면 정부가 발표한 내용도,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믿어달라는 정치인도 항상 합리적으로 의심하는 태도가 필요해요. 그리고 평소 시청자의 관점에서 나아가 제작자의 관점에서 세심하게 뉴스를 시청하는 훈련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사안에 따라 어떤 형식으로 풀어내는지 유의하며 보는 거죠.”

▲ 지난 1월 13일 모교에 방문한 그(왼쪽에서 두번째)는 중앙언론인상을 받았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항상 저를 지탱해주는 기둥과 같은 곳이에요. 무게를 견뎌내는 기둥이 있어 건물이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듯이 학창시절은 언론인이라는 제 꿈을 이루기까지 저를 지탱해준 고마운 기억이에요. 중앙대라는 울타리 안에서 쌓은 많은 경험은 훗날 기자 생활을 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됐죠. 졸업 후 사회에 나가서도 중앙대 출신 선후배, 동기들의 힘을 느낄 수 있었어요. 학교에 애정이 큰 만큼 이제는 제가 SBS 내의 중앙대 동문 모임을 이끌고 있습니다. 후배 여러분도 꼭 만나 뵙고 싶네요.”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