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이 있으면 과세가 따른다. 헌법에 명시되어 있듯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마땅히 자신의 경제능력에 상응하는 납세의 의무를 져야 한다. 김덕중 동문(경제학과 78학번)은 대한민국 제20대 국세청장으로 약 1년 5개월간 재직하며 지하경제의 양성화에 기여했다. 경제규모가 커지며 거래관계가 복잡해짐에 따라 탈세 수법이 더욱 지능화 되어가는 오늘날, ‘공정’과 ‘신뢰’의 가치에 중점을 두고 탈세 근절에 두 발 벗고 나섰던 그를 만나봤다.
 
 
  
이청득심(以廳得心) 청풍양수(淸風兩袖)
국민 신뢰 회복의 근간은 공직자의 청렴
납세자 어려움 헤아리는
국세청 되길 바란다
 
2013년 3월 27일. 직원 간의 소통, 공직자의 청렴을 강조하며 김덕중 동문은 제20대 세무청장으로 취임했다. 1년 5개월의 임기를 끝마친 그는 현재 중앙대의 석좌교수로서 강단에서 학생들과 소통하고 있다.‘아랫사람을 심하게 야단치기보다 포근히 감싸 주기를 잘하는 수장’을 뜻하는 ‘덕장’. 국세청 직원들을 ‘국세가족’이라 표현하며 조직운영에 힘썼다는 그는 대한민국의 조세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 ‘덕장’ 같았다.
 
고향인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비교적 조용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사건사고 하나 일으키지 않고 모범적인 학창시절을 보냈던 그였지만, 아버지의 사업쇠락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상황에도 학업에 정진해 중앙대에 입학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했다던 그는 경제학과로 진학하며 자신의 꿈을 본격적으로 펼치게 된다.
 
-가업이 어려웠다니. 당시 이야기를 듣고 싶다.
“면직물 직조업에 종사하던 아버지의 사업 상황이 갑자기 어려워졌다. 서울로의 대학 진학이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학업에 정진해 서울로 대학을 갈 수 있었다. 가족이 나에게 거는 기대가 컸던 만큼 입학 후에도 큰 일탈 없이 열심히 공부했다.”

-고향이 대전이다. 훗날 이곳에서 지방국세청장도 맡지 않았나.
“대전에 가면 안정감을 느끼고 편안한 기분이 먼저 든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그런 곳이지 않나. 훗날 이곳에서 지방국세청장을 맡기도 해서 나에게 대전은 각별한 곳이다. 지금까지도 가까운 친인척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학부 전공을 경제학과로 선택한 이유가 있나.
“입학 당시 학문에 대한 이해도는 높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 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당시에 막연히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막상 공부해 보니 나의 적성에도 잘 맞았던 것 같다. 아버지 또한 내가 대학을 졸업한 뒤 안정된 직장을 가지길 원했기 때문에 경제학과 진학에 대한 가족과의 이견은 일체 없었다.”

-내성적인 성격이 공무원이라는 직업과 잘 맞았는지 궁금하다.
“공무원이 나와 잘 맞는 부분이 있었지만 내성적인 성격이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나라의 녹을 먹고 일하는 공무원은 국민의 곁에서 그들을 설득하거나 이해시켜야 할 때가 생긴다. 이럴 때는 외향적인 성격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만나보니 전혀 내성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외향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육군 소대장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성격이 외향적으로 변한 것 같다. 소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리더십을 배웠고, 그 경험이 국세청장 재직 당시 많은 직원들과 잘 소통하는데 도움을 줬다.”

-사병으로 입대하지 않고 학사장교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할 당시 병역법이 개정됐다. 입대를 앞둔 행정고시 합격자들은 의무적으로 장교로 입대를 해야 했기 때문에 학사장교 7기로 임관을 했다. 전투병과인 보병으로 배정을 받고 학사장교로 군복무를 마쳤다.”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한 이유도 궁금하다.
“대학교 4학년까지 행정고시에 합격하지 못했다. 당시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군대에 입대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진학을 결정했다. 중앙대에서 4년을 보냈기 때문에 서울대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공부를 시작해보고 싶기도 했다.”

-행정고시에 여러 번 낙방했다. 상심이 컸을 것 같은데.
“지나간 것들은 모두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일까, 시험에 떨어져 힘들었던 기억은 없다.(웃음) 굳이 힘들었던 점을 말하자면 절제된 생활과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어야 했던 점이다. 장학금을 계속 받아야 학업을 계속할 수 있던 상황에서 평균 A학점을 받지 못해 부모님께 경제적 부담감을 안겨 드렸을 때는 조금 괴롭기도 했다.”

-본인의 학창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도서관에서 매일같이 연구반 친구들과 숙식했다. 당시는 법과대학과 경영대학 연구반이 따로 만들어져 있어 CPA·행정고시·사법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주로 모여 공부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 이외의 동아리 활동을 하지 못 했던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몇 번 실패의 고배를 마신 끝에 1983년 제27회 행정고시에 합격하게 된 그. 시골에서 올라온 할머니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공부했다는 그는 가족의 기대에 부응했다는 행복감과 공직에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에 젖어 합격의 기쁨을 누렸다. 마산 세무서에서 공직자로서의 첫걸음을 뗀 그는, 지난해까지 30여년간 국가의 녹을 먹었다. ‘세금은 성숙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살기 위해 국민들 스스로 납부해야 하는 연회비’라고 말하는 그의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했다.
 
-2006년에는 서울지방국세청 납세자 보호 담당관으로 일하게 된다. 어떤 직책인가.
“무리한 세무조사로부터 납세자를 보호하는 역할이다. 납세자가 무리한 세금징수를 요구 받았을 때 발생하는 고충을 해소해 주는 일을 주로 했다. 자신의 세금징수에 대해 불합리함을 느끼는 이들에게 적합한 세금부과였음을 설명해주고, 부당한 세금 징수였을 경우 적합한 절차를 통해 잘못된 점을 시정했다. 당시 경험은 납세자의 입장에서 납세자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줬다.”

-국세청장 취임 이후, 대기업과 대자산가에 초점을 맞춰 징세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당시의 포부에 대한 평가를 내리자면.
“상당 부분 진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워낙 어려운 과제였던 만큼 충분히 달성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의 주요 과제 중 하나가 지하경제의 양성화다. 국세청장 재직 당시 지능적 탈세 가능성이 높은 지하경제 양성화 50대 과제, 4대 중점 분야에 집중했고 대기업과 대자산가의 역외탈세를 중점적으로 방지하려 노력했다.”
▲ 2013년 3월 27일. 그는 박근혜 정부 첫 국세청 수장으로 취임해 공정한 세정을 펼쳐나갈 것을 선서했다. (사진출처 금강일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들을 했나.
“직원이 적극적으로 세정활동에 참여하는 체계로 국세청 분위기를 바꾸고 전문성과 열정을 가진 관리자가 될 것을 직원들에게 당부했다. 서로의 지혜와 경험을 모으는 조직문화를 만들려고도 노력했다.”

-‘공정’과 ‘신뢰’를 국세청 운영 원칙으로 삼기도 했는데.
“국세청 내부의 원활한 조직운영, 외부 납세자로부터의 신뢰 회복이 대단히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재직 기간에 공정과 신뢰, 투명한 세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공정한 조세행정 집행을 통해 국민들의 신뢰를 얻고 국세청의 이미지 개선에 힘쓰고 싶었던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세정은 국민의 소중한 재산을 상대로 펼치는 행정이다. 국민이 공감하는 합리적인 제도, 국세 공무원의 공정하고 투명한 집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나의 세정운영의 중심생각이다.”

-국세청에서 보낸 30여년의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많은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2년 6개월을 재무부의 세제실에서 근무했고 뉴욕으로 파견되어 2년간 조세행정에 대한 연수를 받기도 했다. 행정관으로서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한 경험 또한 생각난다. 국세청 외부 기관에서 근무한 경험들은 나의 시야를 넓히고 국세행정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 것 같아서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국세청장이라는 자리는 본인에게 어떤 자리였나.
“결코 편안한 자리는 아니었다. 세상에는 늘 이견이 존재하고 조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공무원은 늘 중립적인 언행, 공정한 판단을 해야 한다. 외부로부터 늘 주시를 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공직은 막중한 책임감이 따르는 자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사회에서는 다른 나라의 행정과도 경쟁해야 한다. 국가와 미래를 생각하는 자세가 공직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납세를 ‘자선’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대다수 국민들의 의식이 크게 성숙되어 가고 있지만 아직도 탈세가 일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탈루와 탈세가 난무하던 과거를 답습하려는 이들이 있기도 하다. 국민이 주인인 민주사회에서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스스로 납부하는 것은 국민의 기본 도리다. 미국 대법관 올리버 홉스는 ‘납세는 문명사회에 사는 대가’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세는 여전하다.
“현재 국세청은 성실한 납세를 위해 다방면에서 노력하고 있다. 세정상 국민들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발 벗고 찾아 나서고 있으며, 탈세자에 대해서는 엄격한 처벌로 형평성을 유지시키려 하고 있다.”

-성실한 납세자에게 주는 보상도 있다고 들었다.
“현재 국세청에서는 매년 아름다운 납세자를 선정하여 표창을 하고 사진을 게시하는 벽면을 설치하여 정직한 납세를 독려하고 있다. 또한 부수적인 혜택으로 대출 금리 인하, 국·공립 주차장 이용료 할인 등을 제공해 성실 납세자를 격려하고 있다.”
 
30여년 만에 중앙대를 다시 찾은 그. 신축 건물들이 들어선 지금의 학교를 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다고 했다. “예전에는 교회 건물 앞의 잔디에서 삼삼오오 모여 카드놀이를 하곤 했습니다. 새로운 건물이 지어져 학생들이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은 좋지만, 운동장이 사라져 당시 느끼던 널찍한 느낌은 사라진 것 같아 아쉽기도 합니다.” 과거 학교모습을 회상하는 그의 모습에서 모교의 발전을 위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요즘 하루 일과는 어떤가.
“현재는 모교인 중앙대에서 행정대학원 석사과정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현대사회와 조세>라는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데, 후배들과 강의실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나니 감회가 남다른 것 같다. 공직 생활을 하는 중에는 가급적 노출을 꺼리며 사적 모임을 가지지 않았다. 요즘은 그간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과 종종 식사 모임을 즐긴다. 9년째 수련하고 있는 국선도를 통해 몸과 마음의 건강도 보살피고 있다. 앞으로도 아내와 함께 국선도로 정신수양할 계획이다.”

-추후의 활동 계획이 궁금하다.
“2015년 현재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하고 활동할 수 있는 시기를 최장 20년으로 보고 있다. 앞으로의 10년은 납세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나의 역할에 대해 고민할 것이며 내년에는 우리나라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한 측면이 있는 창업주들의 발자취를 따라 국내 여행을 할 생각이다. 나머지 10년은 봉사재단을 만들어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을 나누고 싶다. 인생의 마무리 단계에 있는 만큼, 앞으로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볼 것이다.”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이상적인 목표를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일상을 충실하게 사는 자세가 대단히 중요하다. 지속적으로 하고 싶은 일에 정진하다 보면 개인에게 큰 의미와 발전이 있을 것이다. 늘 후배들을 응원하겠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아내가 중앙대 같은 학번의 수학과 출신입니다. 강의가 있어 학교에 들르는 날에는 학창시절 캠퍼스를 거닐며 아내와 함께 다녔던 곳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퇴직 이후, 다시 모교에서 후배들과 함께 할 수 있게 해준 것도 중앙대입니다.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해준 중앙대에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교의 발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응원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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