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1주차 무전여행을 파헤치다
2주차 세 얼간이 기자들의 
 
 
 
  ‘세얼간이의 문화체험기’는 새로운 문화적 현상을 기자들이 직접 체험하고 느낀 뒤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전달하는 지면입니다. 문화 전문가를 만나 그들의 언어를 간접 전달하는 것에서 벗어나 기자들의 솔직 담백한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죠. 이번주는 ‘무전여행’을 파헤쳐 본 1주차에 이어 직접 무전여행에 나선 기자들의 체험기를 준비했습니다. 서울에서 해남군 땅끝마을까지 돈 없이 떠난 국토종단. 배고프고 고단했지만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알게 해준 여행이었습니다. SNS에 자랑할 만한 인증사진 따위는 없었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었던 무전여행의 여정을 같이 떠나볼까요.
 
▲ 전주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치명자산’.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까지 더해지니 그 동안의 고생을 보상받는 기분이다.
 
▲ 출발 후 24시간 만에 처음 맛본 음식은 바로 생라면. 누군가에겐 보잘것없을 수 있지만 배고픈 여행자들에겐 훌륭한 한 끼 식사다.
 
▲ 잘 곳을 찾지 못해 광주 시내를 떠도는 기자들. 낮에 얻은 삼각김밥이 지친 여행객들을 잠시나마 위로해준다.
 
▲ 서울 강남의 거리를 방불케 하는 천안 시내의 번화가. “아 눈부셔.”
 
●체험기
‘여행은 언제나 돈의 문제가 아니고 용기의 문제다.’ 세계적인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명언이다. 요즘 시대에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인식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자는 파울로 코엘료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무작정 떠난 무전여행은 돈이 아니라 세상으로 뛰어들 수 있는 용기를 지녔는지의 문제였기에.

1일차 중앙대 서울캠 -> 평택시
 ‘여행은 준비할 때가 더 행복하다’고들 말한다. 여행을 떠날 때보다 준비하며 상상하던 때가 더 좋다는 말이다. 그런데 무전여행은 준비할수록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앞으로 닥칠 상황들을 생각하니 선뜻 발을 뗄 수 없었다. 출발하기 전 마지막으로 밥이나 왕창 먹자는 생각에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오후 2시가 지나서야 중앙대 서울캠을 떠난다.

 과천시로 향하는 관문인 사당역 근처에서 ‘수원, 가는 곳까지만 태워 주세요’라는 문구를 스케치북에 써 가방에 붙인다. 길가에서 오두방정을 떠는 히치하이킹을 꿈꿨지만 아직 그 정도의 넉살은 엄두도 못 낸다. 이제 겨우 지리적인 서울을 벗어났을 뿐, 사람은 많았고 버스는 쉴 새 없이 승객들을 실어 날랐다. 버스 차창으로 보이는 수많은 시선에 창피함을 감출 길이 없다. 초짜 무전여행자에겐 난생처음 하는 히치하이킹이 낯설기만 하다.

 보일 듯 말 듯 소심하게 등 뒤에 붙여놓은 스케치북. 그 모습이 가여워서일까. 승용차 한 대가 깜빡이를 켠 채 기자들 앞에 멈춘다. “이렇게 빨리 차가 잡힐 리 없어. 우리 때문에 멈춘 게 아닐 거야.” 설마 하며 차 앞을 지나치자 얼른 타라는 반가운 소리가 들린다.
 
 환호성을 지르며 차에 오른 지 30분 만에 수원 화성에 도착했다. 걸어서 6,7시간 걸릴 거리를 30분 만에 도착하니 해남까지도 금방 갈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긴다. 이른 시간 수원에 도착한 김에 수원화성의 정취를 만끽했다.
 
▲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수원 화성. 성벽 길을 걷고 있으니 마치 역사의 주인공이 된 듯하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됐지만 돈이 없으니 당최 어딜 가야 밥을 먹을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때 얼핏 들었던 사찰에서 무료로 식사를 제공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혹시 식사를 할 수 있을까요?” 용기를 내 사찰 사무실에 식사를 할 수 있는지 물었다. “절은 5시부터 6시까지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어요.”

 결국 저녁 식사를 포기하고 수원을 벗어나기로 한 기자들은 다시 히치하이킹에 도전한다. 시간은 저녁 8시. 과감한 동작으로 운전자들에게 구애를 하지만 차들의 속력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아무런 소득 없이 길바닥에 주저앉아있던 기자들 앞으로 차 한 대가 멈춰 선다. 출장차 평택으로 가는 길이라는 젊은 운전자는 “너희 이러다 변사체로 발견돼”라는 뼈가 있는 농담을 던진다.

 무사히 평택시 송탄동에 도착했지만 아직 기자들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숙소를 구하지 못하면 밖에서 노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핸드폰을 꺼내 무작정 주변에 있는 교회에 전화를 건다. 3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재워준다는 교회를 찾았다. 아무도 없는 빈 교회에 조용히 들어간다. 차디찬 바닥에 침낭을 펴고 누웠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다음날에 대한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크다.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이 뒤엉킨 채 첫날이 저문다.
 
▲ 졸리고 배고플 때 한 줄기 빛이 돼준 첫날 밤의 잠자리는 그 어느 곳보다 아늑한 장소였다.

2일차 평택시 -> 천안시
 힘차게 출발을 했지만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에 힘이 나질 않는다.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편의점으로 돌진한다. 유통기한이 지난 ‘폐기 물품’이라도 받아보려는 심산. 열 군데를 넘게 돌아다녔지만 음식을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냥 포기하면 안 되나?” 당장에라도 카드로 편의점에 있는 음식을 사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결국 근처 벤치에 앉아 생라면을 부숴 먹기로 한다. 뭐라도 먹지 않으면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혹시 몰라 챙겨온 라면 3봉지를 벌써 뜯게 될 줄이야. 이젠 꺼내먹을 비상식량도 없다. 평소엔 손도 대지 않던 생라면이 이렇게나 맛있는 음식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처럼 행운이 찾아왔다.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 천안 초입에서 차를 태워준 분이 바로 뷔페 집 사장님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기분 좋게 식사까지 제공받았다. 무전여행을 시작한 후 30시간 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된 기자들은 김치 하나에도 전율을 느끼며 음식을 흡입했다.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천안 시내. 더 늦기 전에 잠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불안감이 또다시 밀려온다. 무전여행은 산 넘어 산, 거기에 또 산을 넘는 여정이다. 간신히 차를 타고 이동하면 숙소를 구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이미 해가 진 늦은 시간, 교회 말고는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기에 무작정 교회에 전화를 건다. “교회로 오시면 컨테이너 창고에서 잘 수 있을 거예요.”

 교회에 도착한 기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려진 밥상이었다. 밤 10시가 넘은 상황이었지만 밥상의 한가운데에 기름진 삼겹살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후식으로는 목사님이 직접 만든 드립 커피. ‘평생 잊을 수 없는 맛’이라며 극찬을 쏟아낼 정도로 은은한 향이 예술이었다. 아침에 먹고 가라며 컵라면과 빵을 한가득 싸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목사님. 따뜻한 마음을 한 아름 받아서인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기분이다. 전날과는 너무나도 다른 느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조금은 기대가 된다.

3일차 천안시 -> 전주시
 오늘은 시작부터 운이 좋았다. 천안에서 세종까지 가는 장거리 운전자를 만난 것이다. 세종시와 공주시의 경계 부근서 소를 키우고 계신다는 아주머니. 경희대에 다니는 딸이 있어 기자들이 자식 같다며 최대한 먼 거리까지 이동해서 기자들을 내려준다.

 공주에 도착하긴 했지만 차에서 내린 곳은 외딴 섬과 같은 곳이었다. 도로로 가면 얼핏 고속도로와 같은 국도가, 마을로 들어가면 산이 나온다. 어쩔 수 없이 차들이 쌩쌩 달리는 국도를 선택한다.

 무전여행을 하면 할수록 특별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걸까? 국도를 걸은 지 10분 만에 검은색 승용차가 갓길에서 기자들을 기다린다. “말도 안 돼. 진짜 말도 안 돼.” 거의 연속으로 히치하이킹에 성공했다. 더불어 여행에서 처음으로 중앙대 동문도 만날 수 있었다. 1991년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해 석·박사를 모두 중앙대에서 마쳤다는 원광대 교수. 모처럼 만난 동문 선배가 반가워 기자들은 더욱더 열정적으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전주로 가는 길에 설렁탕까지 얻어먹어 고마운 마음에 성함과 연락처를 물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보답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에요”라는 단호한 거절뿐. 인연이 되면 언젠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결국 점심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오늘의 목적지인 전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주대에서 잠시 쉬었다 가려는 찰나, 최승민 기자의 핸드폰이 울린다. 전날 천안의 교회에서 만난 집사님 친구분이다. 택시 운전을 하는 집사님 친구분은 영업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전주대까지 한달음에 찾아오셨다. “한 시간 정도는 괜찮아”라며 오히려 기자들을 안심시키는 아저씨의 호탕한 웃음에는 젊은 패기로 뭉친 여행객들에 대한 부러움이 녹아있었다.

 저녁과 잠자리를 제공해준다는 아저씨 덕분에 오늘은 그동안의 고된 일정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여유를 가지고 전주를 둘러보기로 한다.

 그렇게 해서 찾게 된 ‘치명자산’과 ‘자만 벽화마을’은 한옥마을로만 생각하고 있던 전주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곳이었다.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발 딛는 곳으로 달려왔을 뿐인데 전주에 도착한 것도 모자라 관광을 즐기고 있었으니. 우연히 만난 인연들이 만들어 준 여유가 더욱 달콤하게 느껴진다.

 “원래 찜질방을 데려가려고 했는데 다른 장소를 구했어.” 관광을 마치자 지인이 운영하는 킥복싱 체육관을 구했다는 택시 아저씨의 연락이 온다. 과거 무전여행을 해봤다는 아저씨는 기자들이 무전여행의 느낌을 좀 더 알 수 있도록 낯선 장소를 구해주셨다. 체육관 바닥은 푹신한 매트가 깔려있어 잠을 청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밀린 빨래를 링 위에 말려두고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든다.
 
▲ 무전여행자들의 보금자리가 된 킥복싱 체육관. 링을 건조대 삼아 때묻은 옷가지들을 말려 놓았다.

4일차 전주시 -> 광주광역시
 전주의 아침은 수많은 여행객으로 활기차다. 사람들은 요즘 좀처럼 보기 힘든 무전여행객을 신기한 듯 쳐다본다. 처음 여행을 떠날 때의 창피함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이젠 사람들의 시선이 익숙하다.

 “스미마셍.” 풍남문 앞 ‘소녀평화상’ 앞을 지나던 중 익숙지 않은 언어가 들려온다. 한국에 여행을 온 일본인 노부부가 배낭에 붙어있는 ‘무전여행’이란 단어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소녀평화상’ 앞을 지날 정도로 위안부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던 부부. 영어와 한글, 보디랭귀지 3개 언어를 총동원해 대화를 나눴다. 일본으로 꼭 놀러 오라는 말과 함께 연락처를 건네준다. “일본에서 무전여행을 해보자”는 기자들의 장난 섞인 말에 몸만 오면 숙식을 전부 해결해주겠다고 화답한다. 관심을 가져주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에 떠나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3번의 히치하이킹 성공으로 광주에 도착했지만 날은 이미 어두워진 지 오래. 실례를 무릅쓰고 무작정 교회 문을 두드렸다. “무전여행을 한다고? 정말 좋은 걸 하고 있네.”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무전여행을 시작하고 이렇게 호의적인 반응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기자들은 무전여행객을 반기는 사모님 덕분에 작은 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자그마한 공간에서 침낭을 펴고 잠을 자는 것도 어느덧 안락해진 지 오래. 제집인 마냥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는다.

5일차 광주광역시 -> 해남군 땅끝마을
 교회를 떠나 출발하기 전, 목사님은 점심에 먹으라고 떡 한 박스를 준 것도 모자라 나주로 가는 버스비까지 건네주셨다. ‘왜 사람들은 아무 연고도 없는 여행객들을 도와줄까’라는 궁금증에서 시작한 여행, 실제로 무조건적인 호의를 접하고 있음에도 그 속 깊은 마음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나주에서 해남으로 가는 길에 특별한 인연을 한 번 더 만날 수 있었다. 처음으로 가족이 타고 있는 차에 탄 것이다. 아저씨는 평소에는 일을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 지낸다고 한다. 5개월 만에 아내와 아들을 만나 떠나는 가족여행. 가족끼리 오붓하게 추억을 만들기에도 아까운 시간이었을 텐데도 아저씨는 낯선 청년들을 태워주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아저씨 덕분에 최종 목적지인 땅끝마을과 인접한 곳까지 올 수 있었다. 5개월 만에 만나는 가족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싶어 사진촬영을 요청했고 이들은 흔쾌히 모델이 되어주었다. 아직은 아빠의 품이 익숙하지 않은 듯 아이는 자꾸 칭얼댔지만 낯선 여행자에게는 그 모습마저 다정한 가족의 모습처럼 보였다. 차가 떠나면서 창문 너머로 아이가 고개를 내민다. “다음에 또 만나요!” 그 새 정이 들었는지 아이는 아쉬움의 작별 인사를 보낸다. “그래. 꼭 잘 커야 해!” 지금의 해맑은 모습으로 바르게 자라길 간절히 바랐다.

 바다 냄새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다. 어느덧 눈앞엔 확 트인 푸른 풍경이 펼쳐졌다. 수많은 여행객의 최종 목적지답게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그 속에 함께 파묻혀 있으니 이제 정말 다 왔다는 게 실감이 난다. ‘땅끝탑’을 향해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는 기자들.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걷다 보니 눈앞에 높이 솟은 탑이 보인다.
 
▲ 드디어 땅끝탑에 도착. 그동안 도와줬던 분들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긴다. “고맙습니다.”

 목적지는 해남 땅끝마을이었고 그 목적을 달성했다. 그런데도 크게 기쁘지 않았다. 사실 여행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은 것인데 어느 순간부터 여러 사람을 만나고 교감을 나누는 것 자체가 행복해졌다. 돈 없이 여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한 여행, 그 여행의 답은 사람이었다. 땅끝탑 전망대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니 지금까지 도와줬던 분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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