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왕자』 앙투안 드 셍텍쥐 페리 지음, 김용기 옮김 | 인디북 | 142쪽
 
 
나의 별 ‘소행성 B612호’를 떠나 여러 별을 탐험하던 중 지구라는 별에서 한 여우를 만난 적이 있다. 그 여우는 나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해줬다. “어린 왕자야,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야”라고. 뭔가를 진정으로 알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진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우를 만난 지도 벌써 80여년이 흘렀다. 요즘 그 여우와 같은 사람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다시 지구로 가 이번엔 ‘기자’라는 사람들을 만났다. 기자는 여우와 같이 진실의 중요성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속 빈 강정’같았다. 과거에 수많은 별을 거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을 만났었는데, 지구에서 만난 기자들도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처음 도착한 장소는 진도. 바다 한가운데에 여객선이 침몰했다. 침몰한 당시에 언론에서는 앞 다투어 ‘전원이 구조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시, 그것은 명백한 오보로 밝혀졌다. 기자들이 사실관계 파악 없이 정부기관에서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기사에 쓴 것이다. 이를 보니 과거에 만났던 지리학자가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기록하는 바다나 강 등을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오직 탐험가의 말에만 의존해서 쓸 뿐이었다. 이처럼 현장에 직접 가보지도 않고 보도 자료나 정부의 발표에만 근거해 쓴 기사에 진실이 있을 리가 없다. 
 
 다음으로 본 뉴스의 경우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그 뉴스는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과 이완구 전 국무총리의 평소 친분을 소개하면서 두 이름의 획수를 통해 궁합을 보는 ‘이름궁합’을 보도했다. 도대체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뉴스인 것일까. 단지 사람들의 이목을 받기 위한 것일 뿐이다. 예전에 5억 개나 되는 별들을 세며 자랑하는 사업가가 있었는데 그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저씨는 별들에게 하나도 유익하지 않아.” 그 뉴스들 역시 남들에게 유익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중대신문’이라는 학보사에서 만난 여기자는 과거에 만났던 점등인과 똑같았다. 점등인은 명령에 따라 일을 했는데, 그 역시 오로지 데스크의 지시대로만 취재를 했다. 자신의 신념은 전혀 없는 듯 보였다. 그는 부장이 기사의 주제나 방향을 제시하면 그것이 마치 정답인 양 취재를 했는데 의문이 들어도 넘어가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것이 데스크의 지시에 맞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 목소리를 내어 데스크를 납득 시키려는 노력조차 없었다. 그 모습에 실망한 나머지 원래 나의 별로 돌아갔다.
 
 다 하나같이 빈 껍데기의 기사였다. 물론 모두 지어낸 것 아닌 ‘팩트’다. 다만 남들보다 빠르게만 보도하기 위한 팩트,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위한 팩트, 데스크의 구미에 맞는 팩트다. 팩트라는 껍데기 속에 독자들이 원하는 ‘진실’은 어디에도 없었다. 빛 좋은 개살구와 같은 기사는 애초에 찾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여우가 해줬던 말이 더욱 간절해졌다. “알맹이는 눈에 보이지 않아. 사람들은 그 진실을 잊어버렸어.”
 
 진실을 아는 것은 쉽지 않다. 마치 나의 별에서 만난 작은 꽃처럼 말이다. 그 꽃은 항상 심술궂은 허영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가시는 호랑이들이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어도 문제없답니다!”라는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거나 갑자기 바람막이나 유리 덮개를 가져와 달라는 명령도 서슴지 않았다. 외양만 보고 그 꽃은 겸손하지 않고 심술궂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잘 것 없는 그 꽃으로부터 도망쳤다.
 
 하지만 그 보잘 것 없는 행동 뒤에 숨어있는 진실을 보지 못했던 건 내 잘못이었다. 그 꽃은 단지 나에게 향기를 주기 위해 시선을 끌었던 것이다. 자신의 진심이 들키는 것이 부끄러워 더욱 허세를 부리고 성가신 명령들을 내렸다.
 
 이제까지 만난 기자들이라면 분명 그 꽃을 보고 ‘허영심 많은 꽃, 사람들 홀려’라는 제목으로 보도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최대한 빠르게 보도를 하고 사람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 와중에 그들은 중요한 것을 놓칠 수밖에 없다. 바로 향기를 주기 위한 꽃의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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