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이후로 모든 억울한 죽음은 세월호를 관통한다
황우석 사건 통해 대중에 대한 신뢰 잃기도


  김연아의 쇼트 프로그램 선곡으로 유명한 까미유 생상의 교향시 ‘죽음의 무도’. 죽음의 무도란 제목과 달리 음악은 열정적이고 경쾌한 바이올린의 선율로 이뤄진다. 이 교향시는 해골들이 깊은 밤 동안 벌이는 광란의 춤을 음악으로 묘사한 곡이다. 죽음의 경쾌한 축제라, 이질적이면서도 모순적인 곡의 모티프는 오롯이 까미유 생상이 만들어 낸 것일까. 인간의 영혼만이 이 곡에 깃든 것은 아니다. 시대의 손길도 담겨 있다. 중세시대의 시대상이 담겨있는 것이다. 전염병과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간 시대, 그 시대를 살아간 이들은 죽음에 대한 풍자를 통해서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했다. 시대는 이야기를 만들었고, 이야기는 곡으로 다시금 연주됐다.
  
  새 천년이 도래한 지도 벌써 15년이다. 19세기를 살아가던 사람들은 다가올 새 천년에 얼마나 많은 기대를 품었는가. ‘그놈이 그놈이다’하면서도 선거가 임박해선 그래도 다시 한 번 새 정부에 희망을 걸어보듯 어려운 시대를 나는 이들은 다시 돌아올 천년에 아낌없는 표를 주려 했다. 이제 그 기대, 설렘으로부터 열다섯 해가 지났다. 시대는 어떤 이야기를, 그리고 이야기는 어떤 교향시를 연주했을까.   
 
 
  2007년 당시 ‘한·미 FTA 협상’은 이강윤 학생(정치국제학과 2)에게 일종의 ‘데자뷰’였다. 그때 당시 느꼈던 불안과 걱정은 이미 이전에도 들이닥친 적 있는 어두운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집은 농사를 짓는다. 소도 키우고 논도 일군다. 문제는 2003년에 발생했다. 당시 미국에서 발생한 광우병은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에 보도됐다. 광우병 파동으로 인해 그의 집은 소를 헐값에 팔아야 했고 집안의 가세도 기울었다. 농부가 꿈이었던 그는 그 당시 안정적인 공무원으로 꿈을 자의 반 타의 반 바꿔야 했다. 그 좋지 않은 기억이 다시 2007년에 재현된 것이다. 한·미 FTA로 인해 싸게 들어온 미국산 쌀이 집안 경제를 또다시 어렵게 만들진 않을까 불안했다. 그는 또다시 생각할지도 모른다. 2003년에 꿈을 바꿨던 것처럼 이번에는 무엇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
 
  김영화 학생(신문방송학부 3)은 2014년 중간고사 시험 기간이 떠오른다. 대학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공부가 중요하지 않은 시험 기간이었다. 세월호가 침몰했고, 살아 돌아오라는 모두의 염원도 서서히 가라 앉는 중이었다. 특히 언론학도였던 그는 세월호 참사를 보도하던 언론에 엄청난 실망을 했다. “밤새며 지상파 뉴스만 봤어요. 그런데 ‘잘 진행되고 있다’는 희망 고문뿐이었죠.” 보는 사람은 사실을 통해 일말의 희망을 얻으려 했고, 언론은 포장을 통해 거짓된 희망을 전하려 했다. 밤새 눈물을 흘리며 뉴스를 봤지만 뭘 믿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언론을 불신하게 됐다고 말했다.  ‘ㅍㅍㅅㅅ’, ‘슬로우뉴스’와 같은 독립 언론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구독하기 시작했다. 세상을 보는 창을 바꾸는 계기가 된 것이다.
 
 
  올해 5.18 문학상 시 부문의 수상작은 <검은 물 밑에서>였다. 홍수가 난 가운데 지하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청소노동자의 이야기였다. “심사위원들이 평하길 <검은 물 밑에서>는 세월호 참사와 겹쳐 보이는 느낌을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이승현 학생(동국대 국어국문학과)은 세월호 참사를 이야기하며 <검은 물 밑에서>로 운을 뗐다. 세월호 참사 이후로 모든 억울한 죽음은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인문학을 하는 그에게 세월호 참사는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가 홀로코스트 이전과 이후 서정시의 방향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세월호 참사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은 세월호를 거쳐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누군가의 카메라로, 누군가의 생중계로 우리는 세월호를 그 무엇보다 가까이서 느꼈잖아요. 인문학도로서 앞으로의 인문학은 적어도 수십년 동안 세월호를 관통해야 하지 않을까요?”     
 
  “대중이라는 집단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된 것 같아요.” 김요한 학생(가명·가톨릭대 대학원)은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황우석 박사 논문조작 사건을 꼽는다. 과학에 관심이 많아 과학고에 진학했던 그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과학 기술이 대중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다가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대중은 연구윤리나 배경에 대한 고민 없이 황우석 박사를 맹신했다. 그는 대중과 언론의 맹신, 광신도와 같은 모습을 보며 무엇인가를 쉽게 믿지 않게 됐다.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를 직접 보기 전까지는 저명한 사람의 의견이라고 해도 단번에 믿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과학계에서 벌어진 사건이지만 이제 분야를 막론하고 주장에 대한 근거를 직접 확인해 보는 습관이 생겼어요. 국회에서 어떤 법을 발의했다고 하면 직접 국회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법령을 찾아보는 식이죠.” 
 
  동일본대지진은 2000년대 이후 일어난 자연재해 중 가장 무섭고 큰 사건이었다. 세계에서 발생한 지진 중 네 번째로 강력한 지진이었고, 지진 후 덮친 쓰나미로 인해 원전이 폭파되는 등 사상자가 1만 8천여 명을 기록했다. 박은지 학생(서울여대 아동학과)은 진도 9.0의 강진이 후쿠시마를 강타했을 당시 도쿄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도쿄는 진원지에서 떨어져 있었지만 진도 7.0의 여진이 일어나 안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일본에서 사는 동안 한 번도 외국인으로서 차별을 받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진이 일어나자 이런 생각은 단번에 바뀌었다. 한국인이 많이 사는 아파트에서 내국인에게 먼저 안전모를 나눠 줬기 때문이다. 생명이 위태로운 위급한 순간에 외국인으로서 차별을 당한다는 생각에 분했다. “일본에 살면서 한 번도 외국인이라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차별받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재앙 앞에서 외국인으로서 받아야 하는 차별은 유독 따가웠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