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치즈코 저, 나일등 역 | 은행나무 | 319쪽
  얼마 전 서울캠 정문 앞에서 20여명의 사람들이 얼굴 전체가 가려질 정도로 ‘분노의 분칠’을 했다. 이들은 여성 단체의 회원들로 박용성 전 이사장의 여성혐오 발언을 규탄하며 퍼포먼스를 벌였다. 발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분 바르는 여학생들 잔뜩 입학하면 뭐 하느냐. 졸업 뒤 학교에 기부금도 내고 재단에 도움이 될 남학생을 뽑으라.” 왜 여성 단체 회원들은 이 발언에 대해 그토록 혐오감을 드러낸 것일까. 그 답을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를 통해 들여다보았다.

  분칠 퍼포먼스는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지만 실제로 ‘여성혐오’에 대해 심각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드물다. 오래전부터 사회 구석구석에 짙게 드리워진 탓에 알아채기 힘들기 때문이다. 항상 우리 몸을 짓누르는 중력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여성혐오는 그 시작을 엄밀하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확실한 것은 남성이 주체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여성을 차별·억압하고 심하게는 멸시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성인 남성 간 동성애를 극도로 혐오했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동성애가 밝혀지는 순간 당사자는 ‘계집 같은 애’로 낙인찍혀 남성 집단으로부터 추방당했다.(그리고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성인 남성간 동성애를 그토록 싫어했을까. 동성애는 남성을 성적 객체로 전락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성관계에 있어 페니스를 ‘삽입하는’ 이와 ‘삽입 당하는’ 이 사이에는 불평등한 관계가 존재한다. 전자는 성적 주체인 반면 후자는 성적 객체로 전락하게 된다. 남성은 삽입 당하는 객체의 자리를 여성의 자리로 규정하며 멸시하고 혐오해왔다. 여성화된 성적 객체에 위치함으로써 보다 열등한 자리로 강등될까 두려워한 것이다.

  물론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고귀하게 여겨지던 성애 역시 동성애였지만 그것은 양자의 관계가 ‘비대칭’적인 성인남성과 소년의 동성애에 한정됐다. 이는 성적 주체와 객체가 명확하게 분리되는 경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여성혐오에도 아킬레스건이 있으니, 바로 어머니다. 자신을 낳은 여성을 멸시하는 순간 자신의 태생을 위협하게 된다. 이에 남성들은 로마의 황제 가이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지배 철칙과 같이 여성을 ‘성녀’와 ‘창녀’로 나누어 억압했다. 성녀는 오로지 출산을 위한 성관계만 가능했다. 쾌락을 위한 성관계는 창녀에게 요구됐으며 동시에 그녀들은 ‘불결한 존재’로 비난받아야 했다.
여성혐오에는 여성에 대한 찬양과 경멸이 공존한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 남자친구에게 밥을 얻어먹었으면 커피 정도는 사야 ‘개념녀’로 칭송받는다. 그렇지 않으면 음담패설이 오고가는 ‘남자동기톡방’에서 ‘무개념녀’로 마녀사냥 당할 수 있다.

  과연 현재 남성은 여성혐오에서 자유로울까. 적어도 주변의 남자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남성은 남성 나름대로 성적 객체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몹시 괴롭다. 남녀관계에서 보통 학력이 더 높아야 하고, 키가 더 커야 하고, 차가 있어야 하는 대상은 모두 남자다. 여성혐오는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의 삶 역시 옭아맨다. 여성혐오의 틀 안에서는 모두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남녀 모두를 위한 학문이다. 페미니즘을 남성 자체를 부정하는 학문으로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페미니즘이 부정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남성성’이지 남성 자체가 아니다. 페미니즘은 책 제목 그대로 ‘여성혐오를 혐오’하는 이론이다.

  박용성 전 이사장의 발언은 명백한 여성혐오다. 그의 발언이 실제로 입시 결과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노동시장에서나 맞닥뜨릴 줄 알았던 유리천장을 그의 발언으로 대학 입학부터 마주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그 유리천장을 보고도 비난하지 않는다면 유리천장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그가 책망받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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