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현대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역할은 수없이 많다. 짊어져야 하는 역할들이 너무 무거워서일까. 우리는 이제 자신의 역할과 무관한 영역에서는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곤 한다. 인간은 혼자 외로움을 오래 견디지 못하는 존재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우리는 스스로를 철저한 개인의 영역으로 밀어 넣어 타인과의 경계를 구분지으려 한다. 무공감, 무연대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은 오늘날, 꽁꽁 숨겨두고 들키고 싶지 않았던 우리들의 이기심과 마주해보자.
 
▲ 이영광 시집 '그늘과 사귀다'를 읽고 있는 이경수 교수.

 최금진 시인의 시 ‘조용한 가족’은 파리약을 타 마시고 죽음을 선택한 70세 노파의 고독사를 다룬다. 뭉개진 변과 닭뼈다귀 같은 그녀의 몸, 그녀의 죽음을 ‘호상’이라 부르며 시신을 수습하는 남자의 모습은 오늘날 타자의 고통과 감정에 무감각한 세태의 어두운 단면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기밖에 모르고 사적인 일과 사회적인 일을 구분 짓는 이들이 곳곳에 편재하는 요즘, 문학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경수 교수(중앙대 국어국문학과)를 만나보았다.

 
-얼마 전에 세월호 희생자를 조롱한 네티즌에게 징역 1년형이 선고되었다는 기사를 보았어요. 이런 비상식적인 현상이 왜 일어난다고 보시나요.
“세월호 희생자를 비하하는 등,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지 못하는 일은 결국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최근의 사회적 분위기가 원인이라고 봐요. IMF 이후로 한국인들의 생각 저변에는 경제적 불안감과 공포가 남아 있어, 남을 짓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거든요. 경쟁과 생존이 우리 생각을 지배하는 병든 사회죠. 이런 괴이한 현상은 오랜 시간 힘겹게 남들과 투쟁하며 살았던 과거 ‘야만의 시대로의 회귀’의 전조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네요.”

-그 ‘야만의 시대’에는 대학생들도 포함이 되나요.
“요즘 대학생들은 기성세대 만큼이나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고 메마른 감정을 가지고 있어요. 가장 순수하고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할 젊은이들이 타인의 일에 이렇게나 메마르게 된 것은 결국 우리 사회가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데에 큰 원인이 있어요. 철학이 없는 교육,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만이 목표인 입시위주의 교육에서는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알려주지만 공감을 가르쳐 주지는 못했거든요. 미래를 짊어지고 가야 할 청춘들이 병드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세상이 하루아침에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시와 소설이 한순간에 눈앞의 일들을 해결해 주지는 못해요. 그러나 천천히 사회와 개인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 문학은 타인에 대한 관심을 열게 하는 장치이자 도구거든요. 시만 하더라도 당장 우리를 구원해주거나 고통을 치유해 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내가 왜 아픈지 돌아볼 수 있게 해줘요.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님은 ‘시는 패배를 말하는 시까지도 패배주의에 반대한다’라는 말을 통해 주저 앉지 말라고 말하는 용기가 시의 행복이며 윤리라는 말을 하셨죠.”

-일상의 언어와 문학의 언어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둘은 태생적으로 다르지 않아요. 다만 문학의 언어는 문학작품 속에서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그 용법이 달라질 수 있어요. 그중 일상에서 쓰던 언어의 습관적 지각을 교란시켜, 해당 언어를 관습화 된 언어로부터 탈피하게 하는 기법을 ‘낯설게 하기’라고 해요. 러시아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가 정의한 이 기법은 대상을 낯설게 하여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게 한다는 점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감각을 통한 지각과 인식을 하게 하죠.”

-그렇다면 좋은 문학은 어떤 문학인가요.
“좋은 문학은 내 안의 또 다른 감각들을 발견하게 하고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 문학이겠죠. 요즘 아이돌 노래처럼 단기적인 충격을 주고 감각을 마비시키는 문학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최정례 시인은 낡은 것과 말초적인 감정을 이용해 대중의 감각에 편승하려 드는 문학을 ‘저급한 문학’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문학은 언어말고도 감정을 다루기도 하는 것 같아요.
“문학은 언어와 동시에 인간의 정서도 함께 다루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매력이 있죠. 그런 면에서 문학을 감성교육이라고도 하잖아요. 현실에서는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문학을 통해 마주하곤 하죠. 최정례 시인은 감정이나 감각이 문학적 훈련을 통해 충분히 개발될 수 있다고 말했어요. 그만큼 문학 읽기의 효능을 짚어준 거죠.”

-문학에서 다루는 감정들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셀 수 없이 다양한 감정이 있지만 최근에는 슬픔과 우울, 불안과 고독 같은 감정들을 다루는 문학작품들이 많은 것 같네요. 팍팍하고 험난한 세상의 반증인 셈이죠. 예전보다 사랑이나 희망적인 감정을 다루는 작품의 등장은 많이 줄어들고 있어요.”

-삶이 팍팍해서 그런지 문학을 찾는 사람이 많이 줄어든 것 같아요.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현재에도 문학에 대한 갈망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인류는 역사적 경험으로 이미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경쟁을 부추기고 물질적 가치가 지배하는 불행한 세상에서 문학의 힘은 자연스럽게 커질 것이라고 봅니다. 뛰어난 문학 작품은 인류의 정신을 구원하고 그 작품을 쓴 시인과 작가들까지도 변화시키니까요.”

-소설과 시가 추구하는 문학관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장르의 경계가 무너진 오늘날 시와 소설은 크게 다르지 않아요. 둘 다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문학이니까요.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세상의 많은 가치와 담론들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여 타인과 이 세계에 대해 반성적 인식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공통점이 있죠. 미묘한 차이가 있다면 소설은 한 인간이 세계 속의 일부로서 나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세계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장르고, 시는 나의 내면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장르라는 점이에요. 시를 ‘나로부터 출발하는 장르’라고도 하잖아요. 이런 과정들이 결국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는 거고요.”

-문학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끌어낸 사례가 있을까요.
“200명 남짓 되는 시인과 소설가, 평론가들이 모여 한 줄의 문장으로 ‘6·9 작가선언’을 한 적이 있어요. 용산 참사를 겪으면서 시작된 이 선언운동은 세월호 참사 이후에 ‘304 낭독회’라는 모임으로 다시 이어지게 되었죠. 한 줄의 문장을 통해 사회에 관심이 적었던 젊은 시인들까지도 자발적인 참여를 했어요. 그들이 내뱉는 한 줄의 문장은 타인을 위한 개인의 관심이자 세상을 향한 발언이었던 셈이죠.”

-‘쓸모’라는 기준으로 학문의 가치가 재단되는 요즘, 문학이 삶에 어떤 도움이 될까요.
“문학은 ‘쓸모’라는 가치로 재단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문학이야말로 우리가 어디가 아픈지를 짚어주며 치열하게 현실을 고민하고 기억하게 해요. 한강의 최근 소설 『소년이 온다』를 보면 우리 시대가 망각 깊숙이 밀어 넣은 80년 오월의 봄에 대해 이야기해요. 그 봄에 누가 희생되었는지, 그 봄을 지독하게 겪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아직 우리들 곁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있죠. 시대의 아픈 역사를 다시 기억하고 환기시키는 것이 문학의 힘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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