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라는 노래 가사가 있다. 요즘 대학생들이 스펙에 대해 갖는 생각으로 인용하자면, ‘내 일인 듯 내 일 아닌 내 일 같은 일’이라고 한다. 스펙을 따르자니 대학시절 황금 같은 청춘이 울고, 소신 있게 거부하려니 취업 문턱을 못 넘을까 불안해진다. 스펙을 보지 않고 인재를 뽑는 기업도 늘어나고 있다지만 한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누구나 갖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할 수도 없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딜레마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게 당연하다.

▲ 일러스트 전은빈씨
 
 스펙(Spec)은 ‘설명서’라는 뜻의 영어단어 ‘Specification’을 줄인 말이지만 영어에는 없는 콩글리시다. 스펙은 학교, 전공, 학점, 자격증, 어학능력, 어학연수 등 취업준비를 위해 증명 가능하고 점수화할 수 있는 것 모두를 말한다. 2004년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신어 자료집에 등록되었다. 재학시절에는 알바와 과외를 해야 하고, 졸업과 동시에 88만 원 세대로 던져질 가능성이 큰 절대다수의 20대들에게 스펙은 그들의 정체성과 존재양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쌓아야 할 스펙은 정해져 있다. 1학년 때는 관련 동아리 활동을 하며 인맥을 쌓고, 2학년 때는 경영학회 활동을 하며 공모전을 준비하고, 3학년 때는 교환학생을 다녀오고, 4학년 때 기업인턴과 영어성적을 만든다는 것이 정설이다. 스펙은 비단 대학사회만의 현상도 아니다. 스펙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꼽는 최고의 스펙은 ‘학벌’이다. 요즘 같은 취업난에 학벌이 정규직 대기업 취업을 보장해 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보다 나은 출발선에 서게 한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니 고등학교에서도 대학 진학을 위한 스펙 쌓기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토익을 보고 모의유엔대회 같은 토론대회에 참여하고, 봉사활동 점수도 꼼꼼히 챙긴다. 고등학교 때는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대학에서는 직장을 얻기 위해 10대, 20대는 스펙 쌓기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구직자를 선발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스펙을 어떻게 생각할까? 정작 대기업 CEO들은 ‘사람은 많지만 인 재는 없다’고 말한다. 스펙을 갖춘 지원자는 많지만 선발의 당락을 결정하는 것은 스펙이 아니라는 뜻이다. 취업준비서 가운데는 기업이 중시하지도 않는 스펙 쌓기를 부추기는 세력은 이를 통해 이익을 보는 자격증 주관기관, 영어학원, 유학원, 여행사들이라고 일침을 놓는 책도 있다. 취업준비생은 스펙에 목을 매는데 정작 뽑는 측에서는 스펙이 중요하지 않다고? 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스펙은 커트라인을 정해주는 최소요건일 뿐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공급과잉인 정규직 구직시장에서 수많은 지원자를 우선 걸러내는 기준이 스펙이다. “저는 스펙은 안중에도 없고 진짜 내 삶의 가치가 무엇이며, 무엇이 나와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고민해 왔습니다”라고 소신을 말할 수 있으려면 일단 서류심사에 합격해야 한다. 스펙이 나쁘면 당연히 서류심사에서 탈락한다. 그러니 스펙이 중요하지 않다는 기업 측의 말은 반은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슈퍼스펙’
남들 다 있는 스펙은 그때부터 ‘스펙’이 아닌 게 된다. 스펙을 쌓더라도 남들과 차별화된 스펙을 쌓는 것이 필요하다. 스펙을 넘은 ‘슈퍼스펙’의 탄생이다. 스펙은 운전면허시험이나 수능시험 같은 자격시험에 불과하고 진검승부는 ‘스펙 플러스 알파’부터 비로소 시작된다는 얘기가 된다. 이 정도면 거의 ‘미션 임파서블’이다. 현재 국내 기업이 제시하는 인재의 요건으로 꼽는 능력들은 ‘성실성’, ‘친화력’, ‘문제해결 능력’, ‘진취성’, ‘도전정신’, ‘창의성’ 등으로 표현된다. 모두 ‘인성’과 ‘역량’을 말하고 있다. 기본 스펙처럼 계량화될 수 없는 능력, 즉 주체의 내면을 끊임없이 계발하고 향상시켜야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치들의 추구에는 완성 기준도 도달점도 없기 때문에 그 과정은 무한도전이 되는 것이고, 슈퍼스펙을 추구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무한경쟁이 된다. 신자유주의가 주체를 빚어내는 방식이다.

‘창의성(creativity)’을 예로 들어 슈퍼스펙을 비틀고 꼬집어보자. 대량생산에서 다품종소량생산으로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산업생산의 중심이 옮겨가던 90년대에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했다. 21세기에는 “별난 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인재 유형도 고도경제성장기에는 산업전사가 모델이었다면 90년대에는 두뇌 지식인이, 21세기에는 창의적 지식인이 롤 모델로 부상했다. 이제는 그냥 인재로는 부족하다. ‘창의적 인재’여야 한다. 창의성이라는 ‘슈퍼스펙’은 어떻게 쌓아야 하나? 중·고등학교에서 주입식교육과 스펙 쌓기로 창의적 생각의 싹을 잘랐으면서, 또한 대학은 취업학원으로 만들어 놓았으면서, 갑자기 창의력을 발휘하라니? 어불성설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창의력을 키우려면 역시 인문학이라고. 기업이 창의적 인재에 주목하기 시작한 이 시대는 위기에 처한 인문학이 살아날 기회라고. 그래서 CEO를 위한 인문학 특강이 기획되고 CEO가 직접 나서서 인문학 강의를 하는 것인가? 의문이 든다.
 
인문학을 통한 ‘낯설게 보기’
‘창의성’은 ‘독창성’이며 ‘창조성’이다. 독창성은 나만의 관점을 길러내는 것이다. 독창성은 ‘낯설게 보기’에서 시작된다. 낯설게 보는 훈련은 내 안에 모호하게 존재하는 독특한 감각과 느낌을 풀어내는 감성을 길러 준다. 시를 읽는 것은 시인의 언어를 통해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해준다. 역사를 읽는 것은 과거라는 ‘낯선 나라’로의 여행이다. 현재 당연시되는 상식이나 제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역사를 통해 살펴봄으로써 현재적 가치가 영원하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현재를 낯설게 보는 눈은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해 갈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이방인은 낯설게 보는 시각을 몸소 가르쳐 주는 존재이다. 이방인은 한 공동체 안에 아직 완전히 동화되지 않아 낯섦을 간직하고 있는 자이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멀리 떨어져 있는 긴장 속에 놓여 있는 이방인으로부터 우리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낯설게 보는 시선을 배운다. 다양한 이질적 문화를 지니고 한국사회에 찾아온 ‘이주민’으로부터 한반도 ‘선주민’ 한국인들은 창조적 사고의 원천이 되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고 비판하는 시선을 배울 수 있다. 물음을 던지는 자, 당연시되던 것을 다른 관점에서 새삼 묻는 탐구자로서 이방인의 지위는 데리다가 지적한대로 그들을 ‘환대’해야 하는 이유이다. 철학자 데리다는 주체의 필요에 의한 ‘조건부 관용’이 아니라 ‘무조건적 환대’를 타자에 대한 윤리로서 요청한다. 이방인을 환대하고 공감한다면 쉽사리 남을 짓밟고 올라설 수 없다. 동정이 아닌 공감, 경쟁이 아닌 동행의 윤리로 이방인을 대할 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성’을 진정으로 추구하면 경쟁논리는 부정될 수밖에 없다. 창조성에 대한 요구는 순응하는 주체를 길러내려는 신자유주의의 의도를 내파(內破)하는 계기를 품고 있다. 슈퍼스펙에 내재하는 자기모순의 틈새에서 가능성을 찾아보자. 슈퍼스펙을 쌓으려다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품기 시작한다. 자기계발이 아닌 자기교육의 시작이다. “인문학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인문학은 결코 CEO의 서가에 얌전하게 길들여지지 않는다. 누가 아는가? 스펙 쌓기가 아니라 경험 쌓기, 자기계발이 아니라 자기교육을 하다가 취업에는 실패해도 인생에는 성공할지. 기대해 보셔도 좋으리라. 공부해서 남 주지 않으니까.
 
염운옥 연구교수
고려대 역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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