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정의하기 위해 몇 가지 흥미로운 정식을 제안한 바 있다. 그 가운데 아마 가장 널리 알려진 것 하나를 꼽자면 단연코 ‘죽은 노동의 살아있는 노동의 지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기 자신의 노동의 결실이 자신의 삶을 옥죄고 지배하는 기이한 메커니즘을 자본주의의 본성으로 정의한다. 죽은 노동, 즉 살아있는 노동이 만들어낸 산물인 잉여가치가 다시 자신을 착취하는 힘으로 변신하여 다시 산 노동을 지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라는 이야기꾼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뱀파이어물’이라는 장르의 서사를 통해 묘사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마르크스가 쓴 『자본』에서 가장 자주 목격할 수 있는 캐릭터, 자본주의를 의인화하는 형상이 뱀파이어이거나 흡혈귀인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 일러스트 전은빈 씨

좀비의 시대에 사는 우리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뱀파이어의 시대가 아니라 좀비의 시대에 살고 있는 듯 보인다. 어디에서나 좀비의 모습이 어른대고 또 그것이 더욱 적절한 세계의 알레고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금은 멍청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를테면 뱀파이어가 19세기 후반의 자본주의를 의인화하는 배역이라면 좀비는 지금 21세기 초엽의 자본주의를 상연하는 전형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라는 물음말이다. 좀비는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암시하는 캐릭터일까. 그 물음에 대하여 우리는 기꺼이 “물론이지요!”라고 답할 수 있다. 알다시피 지금 뱀파이어는 유순해지거나 만만해졌고, 심지어 ‘쿨’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무해한 데 더해 멋지고 섹시하다. 영화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등장하는 뱀파이어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좀비라면 사정이 어떨까. 뱀파이어와 좀비는 괴물-타자의 세계의 일원으로서 둘 사이에 어떤 의미심장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뱀파이어는 어쨌든 살아있는 자의 세계 속에 제 자리를 마련하고 통합된 듯 보인다. 뱀파이어는 불길하고 섬뜩하다기보다는 아름답고 심지어는 선망하는 대상의 자리에 등극했다. 시들지 않고 병들지 않는 눈부신 삶, 특히 그 살아있음의 화신으로 군림하는 영원한 젊음을 가리키기 위하여 우리는 기꺼이 뱀파이어를 참조하고 있다. 언젠가 잔주름 하나 없는 탱탱한 낯을 가진 이들을 위하여 ‘뱀파이어’라는 이름을 단 성형 기법이 등장할 것이라는 데, 우리는 기꺼이 내기를 걸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좀비는 사정이 좀 다른 듯하다. 좀비는 께름칙하기 때문이다. 좀비는 B급에 가깝고 아마 영원히 B급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를테면 좀비기업이란 이름은 그리 좋게 들리지 않는다. 갚을 돈을 받기 위해 채권은행이 계속 돈을 지급해 연명하는 기업이란 뜻의 좀비기업은 비생산적이고 기생적인 혹 덩어리에 다름 아닌 듯 표상된다. 좀비컴퓨터란 말 역시 전연 좋게 들리지 않는다. 좀비컴퓨터란 흔히 악성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디도스 공격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컴퓨터를 가리킨다. 그 때 좀비컴퓨터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사악한 명령을 무조건적으로 집행하는 기계적 움직임을 응축한다. 그렇게 좀비를 참조하는 대상들이 수도 없이 거론된다. 많은 나쁜 것들은 좀비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썩을 좀비적인 XX!

 좀비가 증식하고 많은 나쁜 것들이 좀비에 비견된다는 것은 지배적인 윤리적 이상을 불편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응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좀비에 대한 애착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존재론(ontology)을 유령론(hauntology)이라는 동음이의어로 바꿔 쓰는 자크 데리다를 떠올려볼 수 있다. 그는 초월적이거나 보편적인 기초, 모든 것을 규정하는 제일원인과 같은 것을 비판할 작정으로 유령론을 내세운다. 그가 말하는 유령이란 존재하면서도 부재하는, 살아있으면서도 죽어있는, 즉 규정할 수 없는 무엇을 가리킨다. 그는 부재하지만 그렇다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그런 점에서 기이하리만치 끈질기게 배경처럼 존재하는 그 유령에서 윤리적인 약속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그에게 유령이란 약속이고 희망이다. 그 유령의 이름은 그에게는 공산주의이다.

자본주의와 좀비
 그렇지만 그의 달콤한 윤리학은 오늘날 좀비를 둘러싼 불길함을 생각하면 생뚱맞기도 하다. 유령들은 개체분열을 하여 왔다. 뱀파이어는 선망의 대상이 되고 좀비는 부인되어야 할 대상의 화신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유령들에 대하여 그다지 깊이 섬세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불평할 수 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공산주의라는 유령만을 생각했지 자본주의 자체가 유령적인 존재라는 것을 깜빡 잊고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악명 높은 ‘상품(화폐) 물신주의’를 분석하며 자본주의가 왜 유령과도 같은 것인지를 고발한 바 있다. 자본주의란 특정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오직 가치를 가져다주는 환상의 대상을 생산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모든 사물은 자신의 특색을 잃은 채 오직 가치로서만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산 것을 죽은 것으로 둔갑시키는 원리이다. 그러나 시장에서 상품은 무엇보다 생생하고 육감적이다.

 누군가 ‘좀비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이르듯이, 우리는 더욱 좀비의 위력에 가위눌린다. 금융화된 세계란 말이 이를 집약해서 보여준다. 그 용어는 돈이 스스로 더 많은 돈을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마법의 세계에 우리가 꼼짝없이 갇혀있음을 가리킨다. 돈이라는 좀비, 오직 돈이라는 추상적인 기호가 모든 사물의 세계를 대신하는 현실, 삶의 물질적 형편을 가리키는 경제라는 기만적인 용어가 숫제 노골적으로 돈이라는 말로 대체된 현실(언제부터인가 신문의 경제면은 은근슬쩍 ‘머니’라는 면으로 이름을 바꿔치기 했다), 우리의 삶의 형편을 가리키는 지표가 코스피, 코스닥 지수, 시중 금리, 환율 등의 오락가락하는 숫자로 나타나는 세계, 그런 것이야말로 좀비화된 세계를 가리키는 것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중화된 좀비의 모습을 본다. 먼저 우리는 좀비처럼 더 많은 가치를 향해 달려드는 자본주의의 운동에 겁을 집어먹고 불안에 떤다. 그러나 자본주의 자체는 우리에게 좀비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국제시장>같은 영화가 천연덕스레 말하듯 우리에게 경제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고단한 벌이와 노동일뿐이다. 결국 자본주의라는 좀비는 우리에게 꼭꼭 숨겨져 있다. 그러나 좀비적 자본주의는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으려는 맹목적 자동성 탓에 착취를 초래하고 섬뜩한 결과를 낳는다. 그 때 우리는 자본주의를 직접 자신의 시야 속에 그려낼 수 없어도 그것이 뿜어내는 불길한 힘들을 감지한다. 그리고 그 추상적인 힘을 가시화하고자 애쓴다. 그것의 형상은 좀비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뱀파이어 순정만화의 왕자였던 <트와일라잇>의 주인공, 로버트 패틴슨은 <코스모폴리스>에서 리무진에 갇힌 채 맨해튼을 배회하는 좀비 같은 펀드매니저로 등장한다. 아마 감독은 이미 산송장(living dead)으로 알려진 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우리가 화면에서 보는 그 펀드매니저가 실은 유령이라는 것을 당신도 모두 알고 있지 않았냐는 듯이 말이다.

계원예대
융합예술학과 서동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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