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국과 세계종교 속에서
살아남은 모험의 역사
 
 지난 1월 7일 중앙유럽 표준시 11시경, 이슬람을 비판하는 만평을 실었던 『샤를리 에브도』본사에 복면을 쓴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의 두 테러리스트가 들이닥쳤다.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며 테러리스트들은 자동화기로 50발 이상을 난사했다. 12명이 사망했고 10명이 부상당했다. 종교 지도자인 동시에 통치자인 칼리프 체제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이슬람 세력의 어긋난 ‘모험’에 세계인들은 경악했다.
 
     ▲ 김호동 교수(가운데)가 강의가 끝나고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이슬람 문명의‘모험’:몽골의 충격과 그 이후’라는 제목의 강연은 이슬람 문명이 시작부터 ‘모험’의 역사였다는 점을 지적하며 시작됐다. 강연을 맡은 김호동 교수(서울대 동양사학과)는 세계 3대 종교 중 가장 늦게 출현했던 이슬람이 기독교와 불교의 틈을 비집고 가는 데에는 ‘벤처(venture)’적인 특징이 있었다고 말했다. 첫 번째 모험은 선행 종교들의 문제를 보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려 했던 노력이었다. 이슬람은 기독교의 유일신 개념을 강화해 알라야말로 진정한 절대신이자 유일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슬람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무함마드는 신이 아니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말씀인 코란의 메신저일 뿐이다.

 이슬람의 또 다른 ‘모험’은 종교적 가치와 세속적 가치를 일치시키는 성속일치의 구현이었다. 기독교가 종교와 사회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데에 비해, 이슬람은 종교와 사회를 하나로 결합했다. ‘샤리아(shari’ah)’라고 불리는 이슬람의 율법은 종교법인 동시에 사회 전반에 관한 규범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한 인간의 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법체계였다. 칼리프 체제는 바로 이러한 일체성을 보존하는 장치였다. 성속이 완벽히 일치된 사회, 이는 이슬람 문명의 근대화를 가로막는 영원한 난제인 동시에 이슬람의 강력한 결속력을 보장하는 장치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없다지만 ‘만약에’ 몽골의 아랍 정복과 지배가 없었다면 지금 이슬람 문명은 어떻게 됐을까. 당시 세계에서 최고 수준의 문명을 자랑했던 이슬람은 몽골인들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몽골의 ‘충격’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은 『세계 정복자의 역사』라는 책에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부수고, 태우고, 죽이고, 약탈하고, 떠나갔다.” 몽골인들이 벌인 파괴와 살육의 기록은 무슬림들에게 충격이었다. 아니, 물리적인 피해는 차치하고 칼리프 체제의 붕괴는 무슬림에게는 기록에서마저 지우고 싶은 상흔이었다. 사료에 따르면 칼리프는 당시 ‘고귀한 대상을 죽일 때는 피를 내지 않는다’는 몽골인들의 관념에 따라 벌판에서 카펫에 말린 뒤, 달리는 말에 밟혀 죽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몽골의 ‘충격’도 이슬람 세계를 완전히 무너뜨린 것은 아니었다. 샤리아 체제의 강고함과 현지 문화 존중이라는 몽골의 본속(本俗)주의가 그 원인이었다. 이슬람 성속 일치의 체제는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다. 그리고 반 천년이 지난 18세기 중반에 이슬람은 서구의 ‘충격’ 또한 온몸으로 겪어내고 있다. 그들은 또 다른 모험을 준비하고 있다.

 IS 집단이 보이는 어긋난 방식의 ‘모험’과는 다르게 터키는 상반된 또 다른 ‘모험’을 이미 진행 중이다. 오스만 제국이 붕괴된 후,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서 시작된 종교와 세속의 분리를 통한 서구적 근대화다. 그렇게 이슬람의 두 가지의 상반된 모험은 전혀 다른 생각으로부터, 전혀 다른 수단에 의해, 전혀 다른 무엇을 위해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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