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학자의 분석에 따르면, 어른이라는 말은 본디 ‘어르다’에서 온 것으로, 그 뜻은 남녀가 어울려 하나의 완전한 우리를 만듦으로써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다. 이때 어울림에서 ‘어’는 이것과 저것으로 이루어진 짝을 말하고, ‘울림’은 서로 울려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어울림은 이것과 저것이 짝을 이루어 서로 잘 울리는 상태에 놓여 있음을 뜻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서로의 울림을 주고받음으로써 어울림 속으로 들어가 우리를 이룬다.

 결국 어른이란 다른 사람과 함께 조화로운 하나의 우리 상태를 만드는 사람이다. 어른은 자신을 온(전체라는 뜻의 우리말)이 아니라 쪽(한 부분의 의미)으로 이해하고, 상대방을 나와 쌍을 이루는 또 하나의 쪽으로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쪽으로 인정할 때만이 우리는 다른 사람과 우호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 이러한 연결이 많을수록 큰 어른이 되기 쉽고, 심리적으로도 무장하거나 긴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평온과 안정, 수용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반대로, 자신을 온으로 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수단이나 대상으로 지각하기 때문에 큰 우리를 만들 수 없고, 큰 우리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대아(大我)로 나아갈 수 없어 결국 큰 어른이 될 수 없다. 소아(小我)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분열할 뿐더러 강력한 자기로 무장하기 때문에, 다른 존재들을 부정하기 쉽고 그런 부정과 경쟁 속에서 우월, 긴장, 경직을 체험하기 쉽다. 심지어, 소아의 상태에서 느끼는 행복조차도 그것이 다른 존재에 대한 부정적 인지와 감정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순수한 행복이 될 수 없다.

 세상을 어떠한 식으로 볼 것인지는 시대적 영향과 더불어 일정 수준은 각자에게 달려 있다. 물론, 우리는 자신이 경험한 삶 이외의 다른 사람의 삶 가령, 그들의 생각, 판단, 선호 등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인간의 인식능력이 그만큼 뛰어나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잘 어울려 살 수 있는지는 존재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다. 우리가 각자 온의 상태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과 서로 쪽으로 어울려 있다고 믿는 사람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겠는가. 이런 면에서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우리를 더 크게 만드는 기틀이다.

 나이든 사람이 어린 사람과 같은 수준에서 삶을 이해한다면, 선생이 학생과 같은 수준에서 사고하고 처신한다면, 한 조직의 지도자가 나머지 사람들과 같은 수준에서 판단하고 결정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어른이 아니다. 그저 오래 산 사람, 강사, 그리고 일개 우두머리일 뿐이다. 어른이란 삶이 짧은 사람들, 지식이 얕은 사람들, 판단이 단편적인 사람들은 미치지 못하는 큰 우리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다. 큰 어른의 역할을 해야 할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할 때, 나머지 사람들의 삶도 더 잘 어울리게 되고 더 큰 우리 속에 있게 된다. 이러한 큰 어른이 그 어느 때보다 오늘의 우리에게 더욱 필요해 보인다.

정태연 교수
심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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