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교수의 공강시간
 
 
 
 
 
하늘에 보다 가까운 곳에서
땅을 밟으며
학문에 한 발 더 가까이

 
 
  약 30여 년간 농업, 농촌, 농민의 문제를 연구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제안해 온 윤석원 교수. 농업경제학전공 교수 중에서도 진짜 땅을 만지며 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 역시 처음엔 평범한 농업경제학자였지만 어느새 어엿한 ‘텃밭 농사꾼’이 되어있었다.
 
 
  경기도 광주의 한 마을. 따스한 가을 햇살을 벗 삼아 20분 정도 경사진 길을 오르면 동네 끝에 다다른다. 길 끝에는 풀을 닮은 초록빛의 2층 집이 보인다. 울타리 위로 자라난 무성한 화살나무들이 집 주변을 감싸고 있다. 13년 전, 마을에서 가장 먼저 터를 잡은 윤석원 교수의 집이다. “바로 윗집이 생기기 전까진 우리 집이 마을 꼭대기에 있었어요.” 그는 편안한 개량한복을 입고 세상의 시름을 모두 놓아버린 모습이었다. 
 
 
 
 
 
 
경제학 교수, 두 손에 흙을 묻히다
 
  그가 농업과 인연을 맺었던 때는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앙대 농업경제학과로 입학한 그는 학교에서 은사님들을 만나며 농업 문제에 차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엔 양파랑 마늘도 구분을 못했다니까요.” 이론으로만 공부해 오다 졸업 후 농촌경제연구원에 들어간 그는 현장을 직접 다녀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간접적이지만 농민들의 삶을 체험하며 어깨 너머로 농법도 조금씩 배울 수 있었다. 
 
  유학을 다녀온 그는 연구원 생활로 돌아가는 대신 강단에 서는 쪽을 택했다. 농업경제학자가 된 윤석원 교수는 농업, 농촌, 농민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연구했고, 정책을 제안하는 일을 해왔다. 그러던 찰나 직접 땅을 밟고 살 기회가 찾아 온 것이다. 
 
  “2001년 겨울이었어요. 분당의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아이들이 크면서 집이 점점 좁아지자 이사를 결심했죠. 아내와도 마음이 맞아 이곳에서 전원생활을 하게 됐어요.” 아파트를 팔았더니 넓은 마당에 2층 집을 지어도 자금은 충분했다. 땅이 생기면서 농업경제학이라는 학문의 중심에 서있는 농민의 생활을 직접 경험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잔디를 깔고 주변에는 꽃과 나무, 작물들을 심기 시작했다. 
 
사계절이 흘러가는 대로
 
  이사 후 가장 공을 들인 일은 아름답게 집 꾸미기였다. “누구나 주택 생활을 시작할 땐 꽃도 심고, 예쁘게 길도 내는 데 집중을 하죠.” 하지만 봄이 돼서 사다 심은 꽃들의 예쁜 자태는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했다. 
 
  10년 정도 살다 보니 아름다운 꽃이나 열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그는 느끼고 있었다. 계절에 따라 자연이 변하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더 즐겁다는 사실이었다. “봄 되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여름 되면 이파리가 무성해지고 윤기가 흐르죠. 가을이면 낙엽 지고 겨울에는 다시 나무가 앙상해지면서 눈이 내리는 그 모든 게 좋아요.” 마당 한 켠에는 활짝 핀 구절초와 국화들이 가을을 맞고 있었고, 사람의 키를 훌쩍 넘긴 대추나무에도 빨간 열매가 달려 있었다. “대추의 열매만이 좋아서 키우는 게 아니에요. 꽃이 피었을 때부터 마침내 열매들이 떨어지는 그 모든 과정을 보는 것이 더 즐거운 거죠.”
 
  넓은 잔디밭 주위로 구획돼 있는 텃밭에는 고추, 배추, 갓, 상추가 저마다 키를 맞춰 자라 있었다. 아주 작은 공간에서 자라나는 작물들이지만 겨울 김장을 하기엔 충분하다. 그가 키워온 마당의 자연들은 누군가 와서 본다면 별 것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키를 훌쩍 넘은 사과나무나 벚나무, 울타리를 감싼 화살나무들은 윤석원 교수가 직접 지팡이만한 묘목을 옮겨다 심은 것이다. 그렇기에 아주 자그마할 때부터 자라온 것들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감정이 인다.
 
  동네를 지나다니는 차 소리 외에는 소음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무가 만들어 주는 그늘 아래에서 윤석원 교수는 선선한 가을바람을 느꼈다. “우리 사회는 너무 경쟁을 조장하지 않나요. 이렇게 자연과 더불어 살다 보니 마음이 순화 되고 욕심도 없어지게 돼요. 정서적으로도 안정이 되고요.” 
 
  그는 집 옆으로 푸르름이 묻어나는 산을 바라본다. “저 산도 다 내 것이 아니겠어요.” 그가 사는 곳은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면 얼마 되지는 않지만, 자연을 품에 안고 살아가니 그의 집에 오면 누구라도 부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다들 저보고 ‘윤 교수 부자다’라고 해요.” 
 
 
 
 
 
 
풀은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
 
  윤석원 교수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집 앞 작은 텃밭에 있는 배추의 잎사귀 위에는 작은 구멍들이 송송 나있다. “채소와 나무에 아무리 벌레가 많이 붙는다 해도 농약은 안쳐요. 벌레도 좀 먹고 살아야죠.” 
 
  있는 그대로 두어도 자라나지만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둔다면 그의 울타리 속 자연은 살아갈 수 없다. 작물을 키우는 일은 자식 키우는 일과 마찬가지다. “농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 들으며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따로 신경 써야 할 건 많이 없지만 조금만 소홀해지면 엉망진창이 돼요.” 가문 땅에 물을 주고 잡초들도 뽑다 보면 시간이 금세 흐른다. 그는 학교로 출근하기 전 매일 아침 1~2시간씩 마당을 둘러보는 일을 거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새벽형 인간이 되었다. “이 생활이 저한텐 맞아요. 이보다 더 좋은 취미가 있을까요.”
 
  구름은 보이지 않고 청량한 하늘 사이로 햇살이 내리쬔다. 초록의 이파리들도 곧 제 계절을 찾아 노랗고 빨갛게 물이 들 것이다. 윤석원 교수는 이 사계절의 흐름에 누구보다 가까이 서 있다. 사시사철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지켜보면서 그는 인생을 떠올렸다. “사계절이 흐르는 것, 그 자체에 순응해야죠.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0대는 20대 대로 60대는 60대 대로 그 자체의 모습이 아름다운 법이에요.”
 
농민의 삶을 더욱 가까이서
 
  정성들여 돌본 작물들이지만 병충해의 무서운 기세에는 모조리 시들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윤석원 교수는 개인적인 허탈함을 느끼기보다 농민들에게 더욱 안타까움을 갖게 되었다. “병충해 때문에 작물들이 죽으면 농민들에게는 한 해의 수입이 없어지니 심각한 문제지요. 이렇게라도 농민들의 애타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는 전원생활을 통해 농심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 것이 전공자로서 갖게 된 가장 큰 자부심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언제나 농민 편에 서서 이야기하는 농업경제학자였다. 그의 전공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입장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 또한 농민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책을 수립하는 것, 농업에 대한 연구가 아무리 잘 된다 해도 농민을 모르면 도루묵입니다. 산업으로서의 농업, 지역 공동체로서의 농촌, 인간으로서의 농민. 그 중에 제일은 농민이에요. 그들의 입장에서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 농업경제학자가 해야 할 역할이고요.”
 
  지금은 작은 텃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윤석원 교수. 퇴직 후에는 농촌으로 가서 더 큰 땅에 농사를 지으며 소박한 농가주택에 사는 꿈을 갖고 있다고 한다. “남은 생애도 농민들과 함께 부대끼며 보내고 싶습니다.”

글·사진 하예슬 기자 yesul@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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