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엔 의견차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머리로 익힌 것과 다르게 사람들은 모두 “내 생각이 맞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잣대로, 너는 너의 잣대로 서로를 바라보는 일은 그리 이상하지도, 어색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꽤나 이기적인 존재인가 봅니다.
 
  그래도 살만한 건 사람들이 의견차를 좁히기 때문입니다.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초반부와 달리 이해를 구하고 결국 접점을 찾습니다. 한 사람이 마음을 기울였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조금씩 양보해 제3안을 선택했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과정엔 반드시 보이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대화’입니다. 의견차를 좁히기 위한 과정의 시작과 끝엔 항상 대화가 동반됩니다. 오고가는 상호작용 속에 ‘당신’이 보이고, ‘자신’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대화의 횟수가 늘면서 이뤄지는 끊임없는 재고 속에 서로의 입장이 눈에 들어오고, 의견차는 서서히 좁혀지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대화는 의견을 달리하는 서로에게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여느 때보다 대화가 간절한 지금, 중앙대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 상식선에선 당사자들은 항상 말이 많기 마련입니다. 구조조정 당사자들은 끊임없이 구조조정의 모순점과 부당함을 학내에 알리고, 자신들의 논리와 의견을 대학본부에 개진했을 겁니다. 하지만 학문단위 구조조정을 놓고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양측은 가시적인 진전을 보이는 만남을 가지고 있진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생산적인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 만남은 한 쪽이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구조조정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입장에서 대학본부가 당사자보다 진행을 앞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도 구조조정 대상 학과의 한 교수는 “인문사회계열은 항상 눈앞에 당장 닥쳤을 때 알려줬다”고 말했듯이 불 보듯 뻔한 결과였습니다. 결국 구조조정을 놓고 대학본부와 당사자들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출발선이 달라진 것입니다. 
 
  혹자는 구조조정은 협의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구조조정’이란 단어가 한국 사회에서 부정적인 어감으로 자리 잡았듯이 우리에게도 일방적인 의사결정의 과정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조조정을 피부로 느낄 수밖에 없는 당사자들에게 논의의 출발선이 다르다는 것은 가혹한 일입니다. 대학본부는 구조조정의 결승점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할 때 당사자들은 출발선에 섰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엔 ‘소통의 부재’가 원인이란 소리가 뻔해진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으로 모여 이뤄진 사회에서 당연할 법한 소통이 부재한다는 것은 굉장히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얼마 전 인문사회계열 전체교수회의가 열렸습니다. 대화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합니다. 무작정 만났다고 소통이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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