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 성희롱·성매매예방교육만 25회, 관련 성폭력 상담만 361회에 달하는데다 특강, 문화제, 영화제, 워크샵 등등의 사업들은 나열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잡혀 있다. 바쁜 만큼 잘 운영되고 있다는 입소문 덕에 타 대학에서 문의전화도 많이 걸려온다. 정규 근무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지만 연장근무를 하기도 부지기수. 서울캠 인권센터 성평등상담소 이은심 전문연구원(37)은 나이조차 망각하고 지낼 정도로 정신없다. “올해 몇 살이냐고요? 1977년에 태어났고 지금이 2012년이니까… 아니지, 2013년이구나. 그럼 37살인가, 38살인가. 제가 요즘 이러고 살아요.”

▲ 성평등상담소 발간 잡지를 들고 있는 이은심 전문연구원.

  얼마나 일이 넘쳐나기에 그 지경인가 궁금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녀의 일과를 살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세 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사무실에서 갖은 프로젝트를 혼자서 진행하는 것이다. 그런 탓인지 마음이 조급해져 말은 빨라지고 몸은 항상 긴장상태다. 국내 대학 10%에서만 운영되고 있다는 성평등상담소에서 ‘전문연구원’ 타이틀을 달기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원래 그녀의 꿈은 인권변호사가 되는 거였다. 그래서 법대로 진학했고, 학생회 활동을 하며 활발한 대학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학생회 내부에서 간부 선배가 후배 여러 명을 성추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피해는 생각보다 컸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법은 물론 여성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이 서른에 별다른 연고도 없이 고향 부산에서 서울로 유학해서 이화여대 여성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녀의 인생이 바뀌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2003년 이후 그녀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성문화운동팀 상근활동가로 일하면서 여성운동에 착수했다. 일명 고(故) 장자연 사건 때는 여성연예인인권서포터즈 활동을 하며 여성인권 캠페인을 벌이고, ‘오대령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해병대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피해자를 지원하며 기자회견을 했다. 이런 일을 거친 후에야 중앙대 성평등상담소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연구원 인력이 그녀 한 명뿐이었던 탓에 그녀는 모든 일을 처음부터 시작하는 기분으로 꿋꿋하게 일을 해나가야만 했다.


  인권센터는 학생지원처 산하였던 성평등상담소를 총장직속기구로 개편해서 그때보다 나은 인력을 갖춰갔다. 이제는 자리잡은 성평등상담소에서 그녀는 학내 여성주의 교지 <녹지>나 성소수자모임 ‘레인보우피쉬’를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도와줄 방법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들의 사업이나 글을 되도록 꼼꼼하게 검토하는 건 물론이다.


  그녀의 꿈은 성폭력 상담을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해내는 것이다. 조직뿐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섬세하게 신경써야 하는 성폭력 상담에는 그만한 방법이 필요하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하면서도 가해자를 비난하지 않고 합리적 판단을 하는 것이 목표다. 그녀는 밤새 불을 밝히고 상담을 공부한다. 그녀에게는 높이 쌓인 책과 일거리만큼이나 사명감이 차곡차곡 모여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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