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훈 김성훈

중앙대 명예교수(전 농림부 장관)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74)의 아호는 농훈(農熏)이다. 농업·농촌·농민의 기운이라는 뜻풀이는 그의 선한 인상과 잘 어울린다. “사람이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를 줄줄 외고 다니던 서울대 농대 재학 시절, 그는 그가 만든 모임‘한얼’에서 붙여 준 이 아호를 그는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농사를 짓던 어린 시절부터 농림부 장관직을 거친 지금까지 계속해서 나누는 삶을 실천해 왔다. 힘들여 일궈 놓은 밭에 “누구든 와서 드세요”라고 써 붙여놓은 그는 진정한 ‘나눔’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은 자칭 ‘도시농부’다.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자택 옥상에 아흔 아홉 개의 화분을 들여놓고 가꾼다. 사람과 건물이 빽빽한 도심에서 농사라니, 놀라는 기자에게 그는 향기가 듬뿍 밴 명함을 내민다. “야생화인 원추리와 옥잠화 향이에요. 여름에 피는 꽃들인데, 가을에 수확해서 향을 추출한 다음 명함 종이에 적셔 놨죠.” 향이 듬뿍 밴 명함은 지갑까지 향기롭게 만든다. 심지어 지갑 안의 돈까지 향기로워져서, 쓰고 나면 돈이 향기를 찾아 다시 돌아온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니 명함까지 농부답다.

  농사를 짓던 학생
  배움을 꿈꾸다

  -어렸을 때부터 ‘농사꾼’ 집안이었나요.
  “아버지가 협동조합장까지 지낸 농부셨어요. 그 밑에서 가축도 기르고 채소도 재배하면서 농민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죠. 농민은 왜 이렇게 가난할까, 왜 이렇게 핍박받을까. 그러면서 이들을 구제해야겠다고 다짐하곤 했어요.”
  -아버지 영향이 컸던 것 같네요.
  “그런 편이죠.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때는 미국에서 시작한 4-H(Head지식, Heart정열, Hand부지런함, Health건강)클럽이라는 농촌 청소년조직 활동도 시작하게 됐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는 거기 회원들과 리트머스 시험지로 동네 토양을 검사해서 밭 생산력을 높이기도 했죠.”
  -고등학생 신분으로 토양 검사까지 했다니요?
  “동네에서는 주로 밭농사를 지었는데, 해마다 생산력이 떨어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4-H회원들을 불러 모아 토지별로 번호를 매기고 산성도를 조사했죠. 그리고 동네 어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석회석을 적절히 뿌려야 밭작물의 생산력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어요. 결과는 대성공이었죠. 수확이 눈에 띄게 증가한 거예요.”
  -대학을 농업경제대로 간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던 건가요.
  “아니요, 저는 법대에 진학해서 농민을 변호하는 변호사가 되려고 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 교장의 부정한 학교 운영 방식에 반기를 들고 학생시위를 하다가 무기정학을 당하고 말았죠. 그 기간에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 기간 동안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가요.
  “무전여행을 떠났거든요. 무등산 뒤 광주 충장동 일대와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발생지인 담양 일대, 화순의 적병강 일대 등을 쭉 돌아다녔는데, 들판에서 일하고 있던 농민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 사람들은 배고파 보이는 학생이 지나가니까 막걸리 한 잔 마시고 가라, 밥 한 끼 먹고 가라며 저를 붙들었죠. 그 사람들과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문득, 농민들과 함께, 이렇게 섞여서 세상을 바꿔 나가는 낮은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농대에 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재학시절 성적이 좋았다고 들었는데, 부모님께서 반대하지는 않으셨나요.
“아버지가 농협운동을 하셨던 분이라 그런지 크게 반대하지는 않으셨어요. 다만 저에게 인생의 조언 하나를 해주셨어요. ‘앞으로 살아가면서 명예, 돈, 권력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거기에만 매진해라. 셋 다 할 수는 없다.’”
  -뭘 선택했나요.
  “명예를 선택했어요. 그리고 그날부터 농대에 가기 위한 공부를 밤새워 하기 시작했죠. 입시를 두 달 앞둔 때였는데, 법대를 지원하기 위해 들어가 있던 인문반에서 농대 지원을 위한 자연과학반으로 옮겼어요. 학기도 끝난 상태라 독학 밖에는 방법이 없었죠. 내용도 모른 채 달달 외우기를 두 달, 짧은 기간이었지만 결국 서울대 농대 3등, 농업경제학과 수석으로 입학했어요.”
  -이력을 보면 서울대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농업 관련 전공 대학원 총 세 곳을 다닌 것으로 나와 있던데요. 배움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것 같아요.
“좋은 스승을 따라다녔거든요. 서울대에 다닐 때 당시 학과장이던 분이 우리나라에서 1, 2등을 다투던 훌륭한 농업경제학자였어요. 그 분이 전남대 총장으로 가셔서 전남대로 대학원을 갔고, 그 분의 뜻을 받들어 공부하기 위해 다른 대학원들도 찾게 된 거죠.”
  -미국에 있는 대학원까지 나왔는데, 굳이 해외까지 갈 필요가 있었던 건가요.
  “기회가 닿는 한 배우고 싶었거든요. 당시 최고로 치는 대학이 케네디가 만든 EWC 하와이대였는데, ‘빤쓰’까지 다 주는 학교였어요. 한 사람 당 천불에 해당하는 장학금을 주면서 공부를 시키는 학교였죠. 경쟁률 500대1을 뚫고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동 대학원에서 장학금을 준다기에 간 거죠.”
  -농업은 아무래도 실전이 중요한 것 아닌가요. 
  “그래서 학교 다니면서 틈틈이 ‘한얼’과 ‘농사단’이라는 농민운동 단체에서 활동했고, 그 사람들과 ‘농활’도 갔어요. 방학마다 전라남도 진도에 있는 섬마을로 향했죠. 오지산골이었는데, 그때 제가 마을 이름을 따서 ‘용산마을의 노래’라는 것도 만들었어요. 지금 거기에 가면 노래 가사가 적인 비도 세워져 있어요.”
  -그 마을 사람들과 인연이 매우 깊은 것 같네요.
  “그때 초등학교에 다니던 사람이 지금 동네 이장이 돼 있어요. 절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는 거죠. 그래서 제가 장관이 돼서 다시 그 마을에 갔을 때, 마을 어귀에 ‘40년 전 학생이 장관 되어 돌아왔네’라는 플래카드를 걸어줬어요.”

  중앙대학교와의 인연
  상지대학교에서의 변혁

  하나의 대학교와 세 개의 대학원을 거쳐 그는 중앙대학교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중앙대학교 산업경제학과 부교수, 정교수를 거쳐 산업과학대학장, 제2캠퍼스 부총장까지 어언 30년 가까이 되는 긴 인연이다.
  -중앙대학교에서 맡은 직책만 다섯 가지가 넘던데요. 남다른 인연인 것 같은데, 학교를 옮기지 않고 계속해서 남아 있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갈수록 애착이 생겼어요. 함께 고민하고 공부하던 기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믿음이 갔죠. 이 학교에서 같이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공부했는지, 또 얼마나 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인지, 얼마나 정의감이 있는 사람인지를 알게 되니까, 그 인연이 저를 계속해서 붙들게 되더라고요.”
  -다른 학교 출신이어서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느끼지는 않았나요. 
  “그렇지 않아요. 언젠가 중앙대학교를 졸업한 제 와이프랑 동창회에 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거기서 와이프는 동문이니까 정회원 대우를 해주고, 저는 교수니까 준회원 대우를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손들고 한마디 했죠. 와이프는 학교에 4년 밖에 안 다녔고, 나는 29년 간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데 왜 내 급이 더 낮으냐고 말이에요. 학교에 대한 애착은 와이프보다 제가 더 강하거든요.”
  -중앙대 안성캠 부총장 직까지 마친 후에 농림부 장관이 되지 않았나요. 장관이 된 것이 학교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제가 부총장 할 때가 IMF때였어요. 그래서 학교 내 과도한 전력 낭비나, 비누 같은 소모품을 절약하기 위해 직접 발로 뛰고 있었죠. 또 서울캠퍼스와 안성캠퍼스 간 거리 차이에서 오는 이동비용 절약을 위해 교무위원회의를 화상으로 하자고 제안 했어요. 그런데 그 화상회의가 열리는 첫 날 갑자기 연락이 온 거에요.”
  -청와대에서 온 전화였나요.
  “네, 아직도 생생해요. 장관에 임명됐으니까 지금 바로 서울로 오라는 말이었어요. 저는 장관이 되리라고 생각해 보지도 못했고, 또 준비하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당혹스러웠어요. 그래서 무슨 장관이 된지도 모른 채, 회의도 끝내지 못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기 시작했죠.”
  -준비가 안 된 장관 치고 장관직을 맡는 동안 아주 열정적이셨던데요.
  “그때 ‘이동장관실’이라는 것을 만들었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현장에서 바로 민원을 받고 즉석에서 해결했어요. 행정이라는 게 정책에 반영돼서 적용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잖아요. 그 틈새를 메우기 위해 노력한 거예요.”
  -재직할 당시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어느 담배 농가에서 담배농사 짓는 농민들이 저를 가둬 놓고 따진 일이 있었어요. 다들 힘든 시기니까 수매가를 올려달라는 건데, 그게 바로 해결되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하나는 약속하겠다. 수매가 못 올려 주는 대신 내가 죽을 때까지 담배를 피겠다’라고요.”
  -지금도 담배를 피우고 계신가요.
  “그렇죠. 그 후로 어딜 가든 농민들이 담배를 들고 쫓아오니까, 끊을 수가 없죠. 건강이 남아있는 한 계속 피울 거예요.(웃음)”
  -장관직 임기를 마치고 중앙대학교가 아닌 상지대학교로 갔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장관직 임기를 마치고 바로 간 건 아니에요. 4년 정도의 텀이 있었죠. 근무를 마친 후 정년 퇴임을 하고, 그 후에 상지대학교에서 초빙을 했기 때문에 간 거예요. 그때 상지대학교가 사학비리로 시끄러웠어요. 저는 학생제일주의를 표방하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거기에 가서 경영을 투명화하고, 학생이 궁금해 하는 서류라면 무엇이든 보여줬죠.” 

  -유기농 급식도 실현했다던데요. 
  “흔히들 유기농 식품을 먹는다고 하면 식비가 비싸진다는 편견이 많아요. 그런데 제가 상지대학교 총장으로 있었을 때는 2000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유기농 급식을 실현했어요. 학교 예산에서 쓸데없는 자재비며 경비를 절감하다보니 돈이 남았던 거죠. 학생을 먼저 생각하고 정직하게 운영하면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일인 거예요.”
  -학생들 반응은 어땠나요.
  “폭발적이었죠. 학생 뿐 아니라 동네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두루두루 좋아했어요. 점심시간만 되면 다들 버스타고 왔죠. 소문이 퍼지면서 학교 평가도 쑥 올라갔고요.”
  -이제는 강원도에서 가장 경쟁률 높은 학교로 부상했습니다. 감회가 남다르시겠어요.
  “지방 사립대는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아요. 교수도 그렇고 학생도 그렇죠. 그런데 가장 중요한 건 학생들을 친동생, 친자식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모든 교수가 학생들의 이름을 의무적으로 외우고, 졸업 후 취업이 끝날 때까지 애프터서비스를 해줬어요. 학생 10명당 한 명의 담당 교수 제도도 실행했고요. 전적으로 학생을 위하려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고 생각해요.”

  처음 마음가짐 그대로
  나누는 삶을 꿈꾸다

  이제 그는 (사)환경정의의 명예 이사장으로서, 중앙대의 명예교수로서 농촌과 농업과 농민을 위해 계속해서 뛰고 있다. 더 이상 무거운 직책을 맡지는 않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이다.
  -요즘은 빌딩 농업이라고 해서 빌딩에서 작물을 재배하는 농업이 유행하고 있는데요,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부정적인 입장이에요. 일부 작물에 한정된 빌딩 농업은 발전 가능성도 크지 않고, 종류도 제한적이에요. 그것은 그냥 실험적인 것일 뿐, 절대 오래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죠.”
  -그러면 앞으로 어떤 활동들을 할 생각인가요.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알아요?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굴 쪽으로 둔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뜻이죠. 그래서 이제는 처음 마음가짐으로 돌아가 사회 환원을 준비하고 있어요.”
  -예를 들자면요.
  “그동안 일이 많았잖아요. 광우병 논란, 사대강 사업, 한미 FTA체결 등. 저는 (사)환경정의 이사장을 이명박 대통령 임기가 끝남과 동시에 그만둘 예정이에요. 그리고 소비자 정의를 세우는 단체에서 NGO활동을 하고, 소비자를 연구하는 시민모임부터 시작해서 경제정의센터 활동까지 할 예정이죠.”
  -앞으로 뭘 이루고 싶나요.
  “제가 뭔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뭔가 이루어지도록 희망하고 봉사하고 싶어요. 첫째로 환경 생태계가 살아났으면 좋겠고요, 둘째로 공동체 정신이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셋째로 기후변화에 대비하고 싶어요. 작게는 나무를 많이 심는 것부터 실천할 예정이죠. 마지막으로 유기농 식품을 먹으면서 건강을 유지하고 싶어요.”
  -목표가 소박하면서도 원대한 것 같습니다.
  “70넘어서 뭐가 되겠다고 하는 건 참 추해요. 늙어서도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잖아요. 제 신조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더 먹고 싶을 때 그만두거라’라고 할 수 있어요.”
  -몇 년 전에 직접 쓴 책 제목 아닌가요.
  “맞아요. 모두가 어려웠던 초등학교 시절, 굶주려 있다가 먹을 게 보이면 벌떼같이 달려들던 가족들을 향해 어머니가 했던 말이에요. 한마디로 ‘나누는 삶’을 살자는 거죠. 어떻게 먹을 것에만 해당되는 문제겠어요. 남을 생각하고 함께 나누는 삶 치고, 먼저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는데서 시작하지 않는 경우가 어디 있겠어요.”

 학생제일주의를 표방했다
 가장 먼저 생협을 만들고
 유기농 식단을 도입했다
 먹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는 없다

▲ 농민가를 부르는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

  모두가 하나 되는 생활협동조합
  대학가마다 생협 바람이 불고 있다. 생협이란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직거래를 통해 중간마진을 없애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모임이다. 조합 측에서 미리 생산자들을 만나 공급량과 가격을 결정하기 때문에 판매가격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책정된다. 90년대 후반 생협법 제정을 이끈 김성훈 전 장관의 이야기를 따로 들어봤다.

  -생협법 제정을 이끌었다던데요.
  “1998년 3월, 김대중 전 대통령 정부의 첫 국무회의에서 제안했어요. ‘선진국 중에 농민들의 생산자협동조합만 있고 소비자들의 생활협동조합은 없는 나라는 없다. 기존 상인단체의 반대 로비 때문에 20년째 생협법안이 경제기획원 서랍에 묵혀있다’고 발언했던 거죠.”
  -그 발언이 우리나라 유기농 활성화의 물꼬를 튼 셈이네요.
  “그렇죠. 우여곡절 끝에 법이 제정돼서 1999년부터 시행됐고, 점차 생협들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유기농민들도 자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된 거죠.”
  -요즘은 대학에서도 생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요. 어떻게 보시나요.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몸에 좋은 것을 찾아 먹으려고 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학생들이 그걸 원하고, 또 스스로 방법을 찾아가는 거니까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중앙대는 아직 생협이 없는데요. 생협을 만든다는 것 자체를 어렵게 느끼는 학생들이 많은 것 같아요. 
  “서로에게 물어보세요. GMO(유전자 변형 농산물)콩나물을 먹고 싶은지, 유기농 콩나물을 먹고 싶은지, 선배들, 후배들, 동기들 모두에게 물어보세요. 농약을 치지 않고 재배한 농산물을 먹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러면 요구하면 되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요.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기 때문에, 학생이 건의하는 게 첫 순서죠. 그러면 교수랑 직원도 따라오게 돼요. 학생, 교수, 직원이 하나가 되어 생협운영자가 되면 저렴한 값에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방안 마련이 쉬워지는 거죠.”

 

  당신에게 중앙대란?
  영생을 얻은 곳이죠. 제가 가르친 제자들이 훌륭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이 사회에 착하고 바르게 스며드는 것을 보면서 저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어요. 제자들은 제 꿈을 실현시켜주고, 활동 무대를 넓혀주고, 또 희망을 갖게 해줬죠. 제가 죽어도 제가 뿌린 씨들이 곳곳에서 살아남고 또 다른 씨를 뿌릴 거라고 생각하니 행복하고 푸근한 마음이에요.

 추천해주세요

  동경하던 인물이나 꿈꾸던 인물이 있으신가요? 누군가가 너무너무 궁금해서 길 가다가 한 번만이라도 마주쳐봤으면 하고 바라던 사람이 있으신가요? 중대신문이 만나러 갑니다. 중앙대와 관련 있는 분을 추천해주세요. 추천해주신 분들 중 선정이 된 분에 한해서 소정의 문화상품권을 드립니다. owo_woo@cauon.net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공모기간은 오늘(4일)부터 15일 자정까지입니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