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해도 괜찮으세요?”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요.”라고 답할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성공을 한 후에나 할 수 있는 말이지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선 누구든 도전하기를 망설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송우달 한겨레 전략사업본부장(54)은 다르다. 그의 좌우명은 ‘실패할 수 있는 용기’. 학생기자 시절부터 꾸준히 일기를 써왔다는 그는 이 문구를 일기장에 새기며 마음을 다져왔다고 한다. 그는 성공하기 위한 실패를 바란 것이 아니라 실패든 성공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 도전하길 바랐던 것이다.

매일 아침 신문사로 출근하는 사람들 중엔 기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광고를 책임지는 광고국 직원부터 신문 배달을 책임지는 수송팀 직원까지, 하나의 신문이 만들어지기까지 수십 명의 손을 거친다. 취재가 전부인줄 알았던 그가 새로운 세계를 만난 건 광고국으로 옮긴, 나이 40이 넘어서였다. 50대가 된 지금, 그는 이제 한겨레 전체를 조망하는 자리에 있다.


-언론인의 꿈은 언제부터 가졌나.

“고등학생 때부터 언론인이 꿈이었어요. 부모님은 사범대에 진학해 교사가 되길 바라셨지만 꿈이 확고했죠. 중앙대에 입학하자마자 했던 일도 중대신문에 지원했던 거고요.”


-당시 중대신문 수습기자 모집공고가 뜨면 수십 명이 넘는 학생들이 지원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 수습기자 12명을 뽑는 데 백 명 이상 지원을 했을 정도였어요. 30명이 넘는 친구들과 함께 지원했는데, 저 혼자만 붙었네요.(웃음)”


-그 정도로 인기가 있었나.

“신문 부수가 지금보다 훨씬 많았는데도 부족할 정도였어요. 당시 신문이 나오면 어깨에 짊어지고 배부를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학생, 교수할 것 없이 ‘신문 나왔다’며 신문을 빼가느라 정신이 없었죠. 하도 뽑아 가니까 신문을 옮기는 길에 신문이 계속 줄어들었어요. 중대신문을 통해 중대신문을 자랑하는 것 같아서 민망하네요.(웃음)” 


-박정희 정권하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학내 분위기가 지금과는 달랐을 것 같은데.
“요즘엔 적어도 사석에서는 대통령 욕도 자유롭게 하죠. 하지만 그땐 ‘요즘 정치판에 문제가 많아’ 정도의 말만 해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요즘처럼 민주적으로 총학생회를 뽑던 시절도 아니고, 학교에서 학도호국단을 뽑아서 대표자를 세우던 시절이었거든요. 휴교령이 내려지면 군인들이 학교에 들어오기도 했어요. 그럴 때면 신문이 휴간되는 일도 비일비재했고요. 게다가 주간교수님과 마찰을 겪는 경우도 많았죠.”

▲ 매일 아침 그의 사무실엔 각종 신문들이 배달된다.


 

 

 

 

 

 

 

 

 

그는 졸업 후 새한신문(현재 한국교육신문)과 충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1988년 3월 창간을 앞둔 한겨레가 기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듣고 경력기자로 지원한다.


-한겨레의 창간멤버로 알고 있다.

“한겨레가 창간되기 2달 전에 입사했어요. 한겨레는 박정희 정권에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라며 정권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가 해직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들이 만든 신문입니다. 창간을 주도했던 건 70년대 말에 해직된 선배 기자들이었고, 저는 창간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경력기자로 채용된 거죠.”


-일반 신문사와 다른 방식으로 탄생한 것으로 알고 있다.

“세계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국민주 모금형식으로 창간했어요. 자주적이고 독립된 언론이 되기 위해선 권력과 자본에 얽매이지 않아야했는데 다들 알다시피 신문사업은 돈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소수 거대자본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 국민주 모금 방식을 선택한 거죠. 하지만 막상 모금을 시작했는데, 모금이 쉽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결국 많이 모이지 않았나.
“모금을 하던 중에 87년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어요. 당시 야권의 김대중 후보와 김영삼 후보가 단일화를 이뤄내지 못해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됐죠.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시절인데 군부 출신이 다시 정권을 잡아 많은 국민들이 좌절감을 느꼈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회의감을 갖기 시작하더라고요. 이런 상황에서 한겨레는 오히려 ‘민주화는 한 판 승부가 아니다’며 모금운동을 더 활발히 진행했어요. 그러자 오히려 반응이 더 오더라고요. 그 결과 이듬해 5월 15일에 한겨레 창간호가 발간될 수 있었죠.”


-지금 한겨레가 많이 성장하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굉장히 소규모 신문사 아니었나.왜 한겨레에 지원했나?
“한겨레가 만들어진 취지와 지향점에 공감했기 때문이죠. 민주화 시대에 걸맞게 민중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통일을 지향하는 정직한 언론 역할을 한겨레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겨레에서 편집부 기자로 시작했다고 하는데.
“처음 기자가 되면 보통은 사회부로 발령받아 경찰서에서 취재감을 찾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지 않나요? 그런데 저는 처음부터 편집부로 발령받아 내근기자로 시작했어요. 기자로선 조금 불행했다고나 할까요? 기자초년병 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취재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94년부터 노조활동을 시작하는데.
“사실 처음 노조가 만들어질 때만 해도 노조 설립에 회의적이었어요. 좋은 취지로 만들어진 회사인데 굳이 노조를 만들 필요가 있나 싶었죠. 하지만 노조가 경영뿐 아니라 지면에 어떤 기사를 실을지 부터 신문의 논조에 까지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알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래서 90년도부터 노조 집행부 활동을 해왔고 94년엔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하게 됐죠.”


-노조위원장까지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던 이유가 있나.
“회사가 강해지려면 노조도 강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한겨레 창간부터 함께한 선배가 있었는데 당시 연봉으론 아들 등록금을 내기도 어려워서 다른 회사로 옮길 수밖에 없었죠. 다른 기자들의 상황도 마찬가지로 어려웠어요. 아무리 좋은 취지의 신문사라도 직원들이 너무 힘들어서 다 빠져나간다면 문제가 있지않나 생각했죠. 연봉을 올려서 인재를 유치하는 것이 한겨레에도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3번의 연봉 협상에서 평균 20%씩 연봉 인상에 성공했습니다. 아마 역대 최대치였을 거에요.”


-노조위원장을 거쳐 광고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자출신이 광고국으로 자리를 옮기는 일이 쉽진 않았을 것 같은데.
“광고국에 기자출신이 몇 없었어요. 다들 광고국 쪽을 원하는 편은 아니었죠. 그런데 내가 잘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신문사가 잘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회사 일에 다른 방식으로 작은 힘이나마 보태야겠다 싶어서 지원하게 됐죠.”

 

기자로 입사한 한겨례
우연히 들어간 광고국
그 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찾았다


-‘기자’명함을 줄 때와 ‘광고국’명함을 내밀 때, 차이가 있었을 텐데.
“사실 기자라고하면 어딜 가도 대접을 해주는 편이죠. 하지만 광고는 말 그대로 ‘영업’이었어요. 이전까지는 항상 식사 대접을 받았다면, 이제는 제가 밥을 사야하는 상황이 되더라고요. 처음엔 적응이 안됐어요. 그런데 오히려 기자라는 감투를 벗으니 사람들과 마음을 열고 소통할 수 있더라고요. 기자일 때는 사람들이 말을 할 때 항상 방어를 해요. 혹시 말실수를 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런데 광고영업을 하러 가니, 속된 말로 ‘요즘 한겨레 기자들 왜 그러는거야?’같은 식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요. 기자들한테는 못하는 말을 저한테 하더라고요. 저도 기자였는데.(웃음) 광고국으로 옮긴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 같아요. 30대까지 기자생활만 했는데 마흔이 되어서 광고 영업을 배우고 나니 온전한 인생을 사는 것 같았죠.”


-광고국에 있을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뭐였나.
“개인적으로 술을 많이 마셔야 한다는거?(웃음) 아무래도 영업이니까 매일 매일이 술자리의 연속이었죠. 집에 있는 아내한테도 미안하고 힘들었죠.”


-광고국은 ‘영업’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어떤 영업이 기억에 남나.

“대선 시기가 되면, 어느 후보가 어느 신문에 광고를 싣는지도 중요한 이슈가 돼요. 97년 대선에 이인제 후보의 광고를 실은 게 기억에 남아요. 당시 선거가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의 삼파전이었어요. 이회창, 김대중 후보는 광고를 활발히 하던 상황이었는데, 이인제 후보는 자금이 부족했는지 광고를 싣지 못하는 상황이었죠. 보니까 이인제 후보에게 광고를 제안하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죠. 그래서 제가 이인제 후보에게 외상으로라도 광고를 싣자고 제안했어요.”


-현금이 부족했다고 하는데, 위험했던 거 아닌가.
“선거 결과 유효 득표수가 10%를 넘기면 국고보조를 받을 수 있었어요. 우선 광고를 싣고 보조금이 나오면 돈을 갚으라고 했죠. 외상이었기 때문에 위험수당까지 붙어서 광고비도 비쌌어요.”


-10%이상 득표하지 못한다면 외상금을 못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지 않나.
“사실은 조마조마했죠. 광고비가 10억 원이 넘었으니까요. 만약 외상광고비를 못 받으면 책임을 지고 한겨레를 떠나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19.2%의 지지를 받아서 광고비를 받을 수 있었죠.(웃음) 게다가 이인제 후보가 이회창 후보 지지층을 잠식하는 바람에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던 면도 있었어요. 아마 이인제후보가 그렇게 선전하지 못했다면 평화적 정권교체도 어려웠을 거에요. 우리끼리 모여서 광고 수익도 내고 정권교체도 이루었다며 자축을 했었죠.”


-이외에 언론으로서의 역할과 광고 수입 사이에서 고민도 있을 것 같다.
“고민이 많아요. 우리 논조와 다른 기업들이 거액을 제시할 땐, 솔직히 거절하는 게 쉽지만은 않아요. 하지만 언론으로서 지켜야 할 역할이 우선이죠.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가 일어났을 때, 미국 육류수출협회에서 미국산 소고기가 안전하다는 의견광고를 한겨레에 게재하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당시 조선일보 같은 보수 신문에는 광고를 많이 냈지만, 우리 신문에는 내지 않던 상황이었죠. 하지만 안전성이 검증되지도 않은 소고기에 대한 광고를 돈이 된다고 무작정 실을 수는 없죠. 그래서 대놓고 거절할 수는 없으니, 광고 10차례에 광고료 10억원을 제시했어요. 광고비를 일부러 높게 불러서 ‘사실상 거절’을 한 셈이죠. 그런데 의외로 미국 육류수출협회가 협의를 해보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거에요.”


-그래서 결국 실었나?
“당시 회사가 경영난에 시달리던 상황이라 사실 고민을 많이 했어요. 10억이면 꽤 큰 돈이잖아요. 하지만 간부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받지 않기로 결정했어요. 독자들을 배신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종이신문의 위기’라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한겨레도 자유롭진 않은 것 같다.
“종이신문의 위기라는 말은 10년 전부터 나왔어요. 고정 독자층이 100만명이었다면 10년후인 지금, 80만명 정도 된 거 같긴하지만 나중에 0명이 되지는 않을 거에요. 종이신문에 대한 애독자가 있기 때문이죠.”


-종이신문이 현재 800원이다, 인쇄비가 800원보다 더 들어 적자를 보고있다고 들었는데.
“그렇지는 않아요. 하루에 한 40만부정도 찍는데, 부수가 많다보니까 원가는 낮은 편이에요. 종이신문에서 이윤은 약간 나는 정도고, 수익은 다른 쪽에서 많이 보고 있죠.”

▲ 송우달 본부장의 스케쥴이 달력에 빼곡히 적혀있다.

 

 

 

 

 

 

 

 


-어떤 사업을 하고 있나.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한겨레는 신문만 하는 게 아니라 한겨레 경제연구소, 사회정책 연구소, 말글 연구소, 평화 연구소 등 연구사업도 활발히 하고 있어요. 포럼, 문화 공연 등 부대사업을 많이 하고 있어요.”


-부대사업도 한겨레니까 차별화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
“그렇죠. 한겨레라는 이름을 걸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직하고 차별화된 컨텐츠를 만들어야한다는 사명감이 있어요. 조중동과 똑같이 만들어서는 경쟁력도 없고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신뢰를 바탕에 둔 콘텐츠, 정직한 콘텐츠가 힘이죠.”


-일각에선 한겨레를 비판하기도 하는데.

“모든 사람의 지지를 받을 순 없죠.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보통 ‘기계적 균형’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정말 진실되고 정직한 보도를 위해서 약자의 편에 서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최근에 정수장학회가 선거에 개입한 과정을 한겨레 기자가 특종 취재한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지금 검찰 쪽에서 부당하게 편집권을 침해하는 것 같아요.”


-진실된 보도를 하려고 하는데 그런 탄압을 받을 때면 힘이 좀 빠질 것 같다.

“얼마 전에 검찰이 해당 기자를 소환조사를 했어요. 하지만 그럴 때 오히려 사내에서는 칭찬을 해주는 편이에요. 외부에서도 민주언론상을 받기도 했고요. 좌절하거나 힘이 빠질 때면, 구성원들이 격려하고 칭찬해주면서 극복해나가고 있는 셈이죠.”


-언론인으로서 언론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예전엔 속보 경쟁이었다면 요즘엔 독자들에게 얼마나 정론을 펼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민족의 평화, 남북통일에도 기여하고 안전한 사회의 토대를 만들어가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 있고, 그 중심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 송의달씨 졸업식에서. 왼쪽부터 송우달씨, 조선일보 송의달씨, 국토해양부 송명달씨, KBS 송웅달씨.

언론계의 달달이 삼형제
송우달 한겨레 전략사업본부장의 부모님은 아침마다 고민을 한다. “‘한겨레’를 먼저 집어야 하나 ‘조선일보를’ 집어야 하나?” 부모님의 정치 성향이 한겨레와 달리 보수적이어서가 아니다. 첫째 아들은 한겨레에, 둘째 아들은 조선일보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볼 땐 고민이 비교적 적다. 막내아들이 다니고 있는 KBS를 맘 편히 보면 된다.
부모님께 이런 ‘행복한 고민’을 하게 하는 이들은 언론계에서는 이미 유명한 일명 ‘달달이 삼형제’. 송우달 한겨레 본부장, 송의달 조선일보 부장대우, 송웅달 KBS 다큐멘터리 PD다. 집안에 언론인이 하나만 나와도 자랑인 시대에 네 형제 중 셋이나 언론계에서 한 자리씩 꿰차고 있다.
두 동생이 언론계에 발을 들인 것은 아무래도 첫 물꼬를 튼 형의 영향이 컸을 터. 송우달 본부장은 “동생들이 내가 싱글벙글하며 신문사에 다니던 모습을 부러워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막내동생은 너무 고생하는 두 형의 모습을 보며 오히려 기자가 아닌 PD를 선택했다고 한다.
한겨레에 다니는 형과 조선일보에 다니는 동생이 만나서 정치 이야기를 하면 싸움이 나지는 않을까? 15년 전까지만 해도 세 형제가 다 같이 정권교체가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의견을 모았지만, 최근에는 정치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다수의 동생들은 나와 뜻을 같이하고 있을 거라 믿는다”고 말한다.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일부러 입을 다무는 편이지만, 조선일보와 한겨레 사이에 좋은 시스템이 있으면 서로 공유하는 편이다.
 삼형제는 바쁜 와중에도 꾸준히 모임을 갖는 편이다. 첫째 형은 경영일선에서, 둘째는 기자로 활약하고 있으며, 막내는 최근 ‘슈퍼 피쉬’라는 다큐멘터리로 호평을 얻기도 했다. 각자의 위치에서 항상 열심인 그들의 내일이 더욱 기대된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중앙대는 오늘의 저를 있게 해준 안식처이자 보금자리죠. 중앙대에서 실패하더라도 도전하는 법을 배웠고 우주정복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얻었어요. 생생한 학창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들도 있고 미래의 후배들이 커가는 공간이기도 하죠. 지난 7월 중앙언론동문회 회장으로 선출됐어요. 동문회를 통해서 제가 경험했던 것들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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