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시

경민선

 

 

 

 

 

 

 

 

 

  졸음이 쏟아진다. 벌써 삼십분 째 드나드는 사람은 없다. 눈을 붙여도 되지 않을까 하는 노곤함이 몸을 감싸는 순간 갑자기 가느다란 종소리가 들려온다. 편의점의 문이 열리며 거리의 찬바람이 들어온다. 잠시 정신이 난다. 백발의 구부정한 할머니가 뒤뚱뒤뚱 들어온다. 등에는 지저분한 초록색 가방이 보인다. 물건은 안사면서 점원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그 악당이 계산대를 지나쳐 구석의 정수기로 향한다. 손에는 1.25리터 페트병이 보인다. 또 시작이구나.
“아 진짜… 이봐, 할머니!”
  구부정한 등은 돌아보지도 않는다. 물을 따르는 데에만 신경이 팔려 있다. 나는 그 어깨를 밀쳤다. 페트병이 흔들리며 뜨거운 물이 손에 튄다. 문득 백발 사이로 훤한 정수리가 보인다.
“아이고, 뜨거워. 왜 그래? 좀 따라갈게.”
“할머니가 이러면 우리만 혼나요. 빨랑 나가요.”
  할머니는 별다른 저항 없이 김이 나는 페트병을 챙겨 다시 뒤뚱뒤뚱 걸어 나간다. 묘한 우월감이 든다. 가느다란 종소리에 다시 노곤함이 몸을 감싼다. 난 계산대로 돌아와 담배 진열대에 등을 기댔다. 손님이 가장 없는 새벽 3시와 4시 사이는 잠깐 졸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다. 하지만 의자는 있어도 앉을 수는 없다. 점장은 매일 아침 CCTV를 확인한다. 야간반의 점원들은 서서 자는 법을 배워갔다.
“그냥 두지. 건물 청소부들이야.”
“청소랑 뜨거운 물 퍼가는 거랑 뭔 상관이야?”
“이 근처 건물들은 온수 안 나와. 손 시려서 그래.”
  창고에서 과자 수량을 세던 점원이 나와 계산대에 선다.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계집애. 그래도 새벽을 견디는 건 야간반의 계산대가 2인 1조이기 때문이다. 처음 점원 일을 시작했을 때는 나랑 동갑인 데에다 여자와 같이 일한다는 말에 기대를 했었다. 얼굴을 본 순간 그 기대의 3분의 2 정도는 사라졌다. 기대했던 예쁜 소녀가 아닌 건 둘째 치고 얼굴 자체가 잘 안 보였다. 숱이 많은 건지 머리카락이 양쪽 뺨과 눈썹 밑까지 가리고 있었다. 게다가 거의 고개를 숙이고 말해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 애가 처음 꺼낸 말을 기대의 나머지 3분의 1도 사라지게 했다.
“정산이랑 검수작업은 내가 할 테니까 청소랑 정리는 님이 하세요.”
  점장은 인근 이백 미터 안에 네 개나 포진된 편의점 중 자신의 편의점 매출이 월등한 것은 여자점원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낮 시간에 일하는 두 명의 점원은 모두 놀랄 정도로 예쁜 여자애들만 뽑아 놓았다. 하지만 이 야간반의 인력배치는 다소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야간에 더 우울해 보이는 이 여자애를 보고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은 없을 것이다. 새벽의 취객들을 쫓아내기 위해 고용된 보디가드가 나인지, 취객의 눈길을 끌기 위해 고용된 얼굴마담이 이 애인지는 둘 다 시급이 같았기에 분간할 이유가 없었다.
“크리스마스 때 뭐해? 여자 친구 없다고 했지?”
“낮잠 자고 나와서 일해야지. 넌 그때 뭔 일 있냐?”
“어.”
“뭐야, 알바 안 나오게?”
“어. 웬만하면 나오려고 했는데. 점장이랑 바꿀게.”
“그냥 나 혼자 할 테니까 점장 집에서 쉬라고 해. 넌 뭐 때문에 안 나와?”
“할아버지가 아파서. 친척들이 교대로 병간호 해주는 데 그 때 사람이 없어서.”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계집애. 지난달에는 엄마 제사 때문이라며 하루 빼먹고 월급 가불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점장에게 들었다. 이 여자애한테 돈을 꿔주기 전에 미리 듣지 못한 게 아쉽다. 그 때의 핑계는 암에 걸린 아버지 수술비였다. 너무 대범한 거짓말에는 오히려 솔깃 하는 법이다.
다시 종소리가 들리고 찬바람이 들어온다. 새벽 4시마다 삼각김밥을 사러 오는 피시방 아르바이트 아저씨이다. 마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다시 계산대에 설 때 여자애는 창고 컴퓨터 앞에서 정산작업을 하고 있었다. 졸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잠겨 있다. 그게 가뜩이나 재미없는 이 애와의 대화를 더 짜증나게 만든다. 하지만 새벽반의 대화는 재미를 위한 게 아니다. 그것은 업무의 일부로, 잠을 쫓기 위한 것이다.
“걱정된다. 나도 저 나이 먹을 때까지 알바 할까봐.”
“너야 시집가면 되겠지.”
“그래. 니가 더 걱정이다. 취직 못하고 있잖아.”
“내가 뭐?”
“너 현서대라고 했지? 과가 뭐라고?”
“문화학과인데.”
“암울하다 진짜.”
“중퇴한 너보단 낫거든요. 난 그래도 4년제지.”
“넌 남자잖아. 남자가 스펙 딸리면 결혼은 어떻게 하냐.”
“야, 아까 대걸레 어디 있었어?”
  여자애는 쪽문을 손으로 가리킨다. 난 쪽문을 열고 화장실로 간다. 빨아놓지도 않은 대걸레가 벽에 기댄 채 서 있었다. 또 시작이군. 수도꼭지를 틀자 찬물이 쏟아진다. 역시 뜨거운 물은 안 나온다.
“내가 대걸레 쓰면 빨아서 창고에 놓으랬지? 너야말로 성격이 그래서 결혼 어떻게 하냐.”
“나 전에는 알바 끝나면 남친이 데리러 왔었는데. 걔 벤츠 있었어.”
“아깝네. 그때 잡아서 결혼하지.”
“내가 찬 거야. 못생겨서 데리고 다니기 쪽팔려.”
“아이고, 무서워.”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계집애. 더 이상 대꾸하기가 지긋지긋해 걸레질을 그만두고 다시 화장실로 갔다. 수도꼭지에 손을 댔다가 단념하곤 걸레를 다시 벽에 기대에 세워놓는다. 이 편의점에서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 인간은 나 외에는 없다. 제멋대로인 이 여자애는 물론이고 주간반의 점원은 세트메뉴 계산을 어떻게 하냐는 질문을 하려고 내 낮잠을 깨웠다. 여자애가 정산을 끝내고 다시 계산대에 섰다. 벌써 30일은 연속으로 입고 나온 것 같은 저 흰 털잠바가 거슬린다. 후드의 깃털은 벌써 회색으로 변해 있다. 장담컨대 내가 벤츠를 끌고 다니는 남자친구였다면 아르바이트 마중 나갈 정성으로 저 패션센스부터 어떻게 해 줬을 것이다.
“그거 아냐? 주간 애들이 우리보다 시급 더 받는다. 걔네 사천칠백 원 받아.”
“왜? 야간이 더 많은 거 아니었어?”
“왜긴. 예쁘잖아 걔네. 대학도 좋은 데 다니고. 너도 처음엔 주간 하겠다고 했지?”
“아닌데?”
“뭘 아냐. 여자애를 바로 야간 시킬 리가 없잖아.”
“나 첨부터 야간 하겠다고 했는데.”
“하여간 주간을 시급 더 준다니까. 얼굴 갖다 차별 하냐고 점장한테 좀 따져봐 니가.”
“니가 하시지. 니 얼굴이 훨씬 구린데.”
  여자애는 일은 굼뜨면서 눈치는 빨라 자기 험담에 바로 반응한다. 차라리 잘 됐다. 삐쳐서 말 안하는 쪽이 오히려 편하니까. 여자애는 표정을 구기며 바구니를 들고 창고 안으로 들어간다. 침묵의 한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집에 도착하니 벌써 열한 시가 되어 있었다. 주말 아르바이트로 일을 시작한 지 한 달, 월요일 시험이 있을 때에도 일요일 새벽까지 일을 했었다. 학기가 끝나고 시간대를 평일 야간으로 옮기면서 본격적인 부엉이 생활이 시작되었다. 지급되는 시급은 10시간 분량이지만 집에서 준비하고 나가는 게 한 시간, 다시 들어오는 게 한 시간인걸 생각하면 하루의 반은 편의점 일로 보내는 셈이다. 그렇게 받은 90만 원을 방학 두 달간 한 푼도 안 쓰고 모으면 겨우 다음 학기 등록금의 반보다 조금 못되는 정도가 된다. 그 90만 원은 우리 가족 전체 수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즉 다음 학기 등록을 위해서는 우리 가족이 한 푼도 쓰지 않고 1월과 2월에 생기는 수입 전부를 저축해 둬야만 한다는 계산이다. 쓸데없는 계산이지만, 이 계산을 통해 점심 저녁은 편의점에서 싸온 유통기한 지난 김밥정도로 때우는 게 적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김밥봉지를 냉장고에 넣고 바로 자리에 누웠다. 엄마가 펴둔 자리 그대로이다. 이 자리에서 엄마는 밤에 잠을 잔 뒤 마트 계산대로 나가고 나는 낮에 잠을 잔 뒤 편의점 계산대로 나간다. 방학 시작한 뒤로 엄마를 마주친 적은 없었다. 온통 지치는 일 뿐이었다. 유일하게 감사할 일이 있다면 여자애가 이 김밥까지 탐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비몽사몽간에 여자애가 신고 왔던 지저분한 캐릭터양말이 떠올랐다. 슬리퍼 앞쪽으로 큰 구멍이 뚫린 양말이 훤히 보이는데도 가리려는 기색조차 없었다. 생각할수록 짜증나는 여자애였다. 졸음이 쏟아진다.
  여자애는 야간 타임 시작한 지 이십 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고 있다. 나는 담배 진열대에 등을 기댄다. 낮에 자는 잠은 아무리 길어도 효과가 없다는 것을 늘 몽롱한 상태로 일하면서 깨닫는다. 다시 종소리가 들리고 찬바람이 들어온다. 여자애가 찬바람을 몰고 들어온다. 또 꼬질꼬질한 잠바차림이다.
“눈 때문에 버스 배차가 길어졌어.”
“좀 빨리 좀 다녀.”
“점장은 안 들렀어?”
“오늘 스키장 가서 못 온다는데.”
“잘됐다.”
  여자애는 창고에 가방을 놓고 편의점 앞치마를 걸치고 나온다. 슬리퍼를 보니 또 어제의 그 양말이다. 오른발 엄지에 있던 구멍이 왼발 새끼 쪽으로 옮겨갔다. 얕은 수였다.
“아, 점장이 눈 치우라고 전화했는데.”
“왜?”
“밖에 눈 쌓였잖아. 저거 치워야 되는데.”
“경비실에서 도구 달라고 해.”
“오늘 늦게 왔으니까 니가 해.”
“뭐? 청소 니가 하기로 했잖아.”
“이건 청소가 아니지. 특수 업무지.”
“눈 치우는 게 청소가 아니면 뭔데?”
“지금 말장난해? 맨날 지각해서 사람 기다리게 하면 이런 건 좀 나서서 해.”
“싫어. 니 일인데 내가 왜 하냐.”
“알았다 나도 안 해 그럼.”
  예상된 반응이다. 대학교 입학 당시 처음 아르바이트를 잡았을 때에만 해도 얼굴을 붉히고 싸웠겠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아르바이트는 항상 짠 시급과 과중한 업무가 겹친 일터에 있다. 형편없는 벌이에 대한 억울함 때문에 업무량이라도 덜어보려는 지긋지긋한 싸움이 계속된다. 승자가 없는 싸움에 이제는 굳은살이 생겨 아무런 동요가 되지 않는다. 알바를 통해 배운 것이라곤 그런 싸움에서 정신적 승리를 하는 방법뿐이다.
“점장한테 가불해달라고 했다며?”
“점장이 그래?”
“몰라. 점장이 그랬었나. 누가 그랬었나.”
“사촌이 결혼해서 축의금 때문에.”
“이번엔 아빠 수술비는 아닌가봐?”
“어.”
“아 그땐 가불 아니었지. 내가 빌려줬었잖아.”
  여자애는 아무 대꾸가 없다. 고개를 돌리니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불안해하고 있다는 신호이다. 조금 더 몰아붙일 필요가 있다.
“요즘은 돈 빌려간 애들이 먼저 갚는 법이 없어. 꼭 내가 말을 꺼내야 알아. 돈이 없으면 염치라도 있어야지 사람들이 너무 뻔뻔한 것 같아. 안 그래?”
“이번에 월급 나오면 갚을게.”
“주간 애들이 그러던데, 너 아빠가 예전에 무슨 기업 사장이라고 했다며? 기업 사장인데 왜 수술비 때문에 몇 만 원 빌리냐?”
“그건 진짜야. 공장 부사장한테 사기 당해서 잠깐 계좌가 막힌 거야.”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계집애. 여자애의 거짓말은 전형적인 사기꾼의 특성을 보인다. 동정을 유도하면서도 자존심은 끝까지 지키는 것이다. 여자애에게 돈을 빌려준 내 실수였다.
“벤츠 끄는 남친 있다며. 걔한테 돈 좀 갚아달라고 해.”
“헤어졌다니까?”
“헤어져도 전 여친이 돈 삼만 원 때문에 곤란하다는 데 안 꿔주겠어? 지금 전화해봐.”
“짜증나네, 진짜. 니가 뭔데 전화해라 말라야?”
“그거 거짓말이지? 너 그 옷 입고 벤츠 타러 나갔냐?”
  여자애는 기어이 쿵 하는 문소리를 내며 창고로 들어간다. 묘한 우월감이 든다. 여자애는 한동안 나오지 않는다. 돈을 빌려가고도 적반하장인 그 여자애의 태도를 다시 떠올리며 미안한 마음이 들려는 것을 가라앉혔다. 명분은 내 쪽에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은 잘만 갔다. 40분 만에 손님이 한 명 들어왔을 뿐이었다. 여자애는 종종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낼 뿐 여전히 창고에서 나오질 않고 있다.
처음 편의점 일을 시작할 때 들었던 괴담이 생각났다. 근처 마트에서 있었던 일이다. 점원이 새벽 아르바이트 도중 컴퓨터로 검수작업을 하러 들어갔을 때 창고에서 목을 매달고 죽은 점장을 발견한 것이다. 새벽 4시였다. 점원은 밤새 시체와 함께 보낸 셈인데, 더 놀라운 건 경찰 조사에서 밝혀졌다. 사실 점원은 점장의 죽음을 알고도 몇 시간이나 방치했던 것이다. 구급차가 점장의 시체를 실어간 뒤 편의점 계산대 하루 매상이 갱신되는 새벽 4시에 돈을 빼돌리려 했던 것이다. 겨우 십만 원이었다. 야간반 점원들을 강철심장으로 만들기 위한 액수는 십만 원으로 충분했다. 생각해보니 이 여자애는 더 엄청난 일을 벌일 것 같은 냄새를 풍기고 있다. 난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야 근데 너 쉬는 날 정산이랑 검수 어떻게 하냐? 나 좀 가르쳐 줘.”
“…….”
“야? 뭐해?”
“점장이 적어놓은 거 있어.”
  화가 많이 난 목소리다. 난 단념하고 걸레를 들었다. 곤도라 닦기는 야간반의 귀찮은 일과 중 하나이다. 누가 마른안주 진열대에 그렇게 거창한 이름을 붙였는지는 몰라도 점장이 세심하게 체크하는 부분 중 하나였다. 주간반의 예쁜이들은 시급을 더 받으면서도 청소를 하지 않는다. 먼지가 발견됐을 때 욕을 먹는 건 돈도 덜 받는 야간반의 멍청이들이다.
“저기요, 계산 안 해요?”
  젊은 여자가 카운터 앞에서 내 쪽을 보고 있다. 곤도라 청소를 하느라 손님이 들어온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잠시만요. 야! 계산 좀 해 나와서.”
“밖에 있는 사람이 해.”
“아 장난하나… 지금 청소하는 거 안보여!”
  여자애는 창고 문을 열고 계산대로 나온다. 힘없는 손동작으로 바코드를 찍는 여자애에게 잠시 눈을 뗄 수 없었다. 울고 있다. 손님은 계산을 하면서 나를 힐끔거린다. 나는 모른 척 하고 곤도라 걸레질에 집중했다. 계산대에 돌아왔을 때 여자애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계산대엔 나와 있어야지. 알바 때려 치자는 것도 아니고.”
“…….”
“야… 근데 울었냐? 내가 언제 바로 갚으랬냐? 질질 짜게.”
  처음 아르바이트를 잡았을 때에만 해도 미안해 몸 둘 바를 몰랐겠지만 이제는 나오는 대로 말한다. 무뚝뚝하게 나오는 대로 말한다면 나중에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손해 본 느낌은 들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승리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은 불친절이다.
여자애가 신은 슬리퍼를 봤다. 맨발이다. 정신적으로 패배하지 않기 위한 여자애만의 방법이었던가. 나는 알면서도 말을 꺼냈다.
“양말은 왜 벗었냐? 추워 죽겠는데. 구멍이라도 났냐?”
“…아 좀 시끄러워!”
  차라리 다행이다. 말이 없는 시간은 잘만 흐른다. 조용한 새벽이 지나갔다. 3시가 지났는데 뜨거운 물을 담으러 오는 할머니는 웬일인지 보이지 않는다. 약간의 아쉬운 마음도 든다. 내가 이 자리에서 하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자애의 말대로 건물 청소를 하는 불쌍한 할머니라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점장과 함께 야간반을 서던 첫 날도 그 할머니는 찾아왔었다. 점장은 그때 할머니 팔을 붙들고 강제로 문 밖으로 끌어냈다. 그 광경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 존중과 따뜻한 마음, 배려, 자기희생 같은 말들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하나씩 사라져 갔다. 영혼마저 시급 4000원으로 격하시키지 않으려면 기회가 될 때마다 분풀이를 하면서 정신적인 승리를 챙겨야 했다. 분노가 생기게 만드는 건 불의를 저지르는 거대한 힘이 아니라 주제를 넘는 미약한 힘이었다.
  아침 10시가 되어 편의점을 나설 때에도 여자애는 아무말도 꺼내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애랑 신경전을 벌이느라 긴장했던 탓인지 걸음마저 휘청거린다. 점장이 점원들의 의자를 치운 후로 이 증상이 시작됐다. 결국 난 버스를 타기로 했다. 버스비 천 원이 너무나 아까운 순간이다. 매일 버스로 오간다면 이 길바닥에 매 달 4만 원을 뿌리는 셈이다. 그만큼 등록금은 멀어진다. 버스 창가에 머리를 기대며 편한 만큼 멀어진 등록금을 떠올린다. 그럴수록 여자애한테 꿔준 3만 원이 아른거린다. 졸음이 쏟아진다.
밤이 되어 다시 출근준비를 하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다. 평소에는 내가 출근한 뒤 엄마가 퇴근을 하기 때문에 마주치기 힘들었다. 갑자기 마주친 얼굴이라 그런지 별다른 인사말도 나오지 않는다. 엄마도 지친 표정으로 장바구니를 싱크대에 올려놓는다.
“웬일이야? 혹시 잘렸어?”
“아냐. 잘리긴 무슨. 오늘 마트에 경찰 오고 난리 났어.”
“무슨 경찰?”
“아니 어떤 할머니가 우유를 훔쳐가다가 걸렸거든. 그래서 매니저가 놓고 가랬는데 자긴 계산 했다면서 계속 욕하고 성질내고. 그러다 매니저 머리채 잡고 대판 싸웠지.”
“어떻게 됐는데?”
“몰라 경찰 와서 끌고 갔는데. 모르지 뭐.”
난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눌러썼다. 신발장에 나선 나를 엄마가 한 번 더 불러 세운다.
“인선아. 너도 알바 하다가 이상한 사람 만나면 바로 신고해. 어떻게 하려다 다치면 너만 손해야.”
“엄마, 그런 노친네들 그냥 쫓아내면 돼. 뭘 걱정해.”
  편의점에 도착해보니 점장 혼자 계산대를 보고 있다. 역시 어리둥절한 광경이다. 점장은 주로 내가 퇴근할 무렵인 아침에 들렀다. 나는 불편한 심정으로 그의 옆 계산대에 섰다. 여자애가 지각하는 순간을 그대로 점장에게 들킬 것을 생각하니 기대감도 들었다. 점장은 갑자기 창고에서 작은 하드보드지를 들고 나온다. 십자가와 함께 ‘온 누리에 축복을’ 이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예쁘지? 내일이면 크리스마스잖아.”
  나는 대꾸를 않고 청테이프로 하드보드지를 붙였다. 원래는 본사에서 내려온 광고 외에 개인적인 치장은 못 하도록 되어 있다. 점장은 그만큼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요즘은 새벽에 그 거지같은 노인네 안 들어오냐? 그 할머니 바닥에 물 흘리고 그러면 우리만 골치 아파. 들어오는 대로 다 쫓아내버려.”
“알았어요.”
“그리고 아침에 정산한 거 이천 원이나 비더라? 다 니 월급에서 까는 거 알지? 돈 계산 잘해라.”
“그거 여자애가 한 거예요.”
“맞다, 지영이 그 기집애 진짜 왜 그러는지 아냐? 나 참.”
“네?”
  여자애의 이름이 지영이었다는 사실에 문득 놀랐다. 너무나 낯선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한 달 동안이나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았었다는 게 새삼 이상했다.
“자꾸 가불해달라고 그러고, 이제 나한테 돈까지 빌려 달래. 미치겠다. 아주.”
“돈이요?”
“그냥 오늘부터 나오지 말라고 했다. 일도 성의 없게 하는 것 같고. 당분간 니가 혼자 해.”
“새벽에 저 혼자 다 하라구요?”
“알바 구하는 대로 야간에 세울 테니까, 연말만 니가 혼자 하자.”
“그 여자애 이제 안 온대요?”
“월급도 통장으로 부쳐줄 테니까 다신 얼씬거리지 말라고 했어.”
  당황스러운 소식이다. 여자애는 말은 밉게 했어도 눈치는 빨랐다. 돈이 급하다고 해도 점장에게 쫓겨날 정도로 미움을 살 짓은 하지 않을 타입이었다. 점장은 옷을 챙겨 창고에서 나왔다. 종이 찢는 소리가 난다. 돌아보니 점장이 찢고 있는 것은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 쓰는 계약서였다.
“내가 이래서 결손가정 애들은 안 쓰려고 하는 거야.”
“결손가정이요?”
“지영이 걔 할머니랑 지랑 둘이 살잖아. 돈도 없고 그래서 불쌍하게 봐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어.”
  점장은 찢은 계약서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문을 나선다. 나는 쓰레기통을 들여다봤다. 버려진 영수증들 사이로 그 애의 사진과 이름이 보인다. 여자애의 이름은 이지영이었다.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계집애. 예상외의 일이긴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애당초 이름조차 궁금하지 않던 여자애였다. 옆에서 떠들어대며 신경 긁는 인간이 없어지니 오히려 시간이 잘 갔다. 여자애가 하던 검수작업도 십 분도 안 걸려 끝났다. 여자애가 앉아있던 그 컴퓨터 앞에서 난 잠시 멍해진다. 여자애가 신고 있던 구멍 난 캐릭터 양말이 눈에 띈다. 여자애가 벗어던진 그 양말은 컴퓨터 옆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다. 이곳에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이 저 더러운 헝겊이라니, 생각할수록 짜증나는 여자애였다. 졸음이 쏟아진다.

 

 


  창고에서 30분간 잤던 토막잠 때문인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침밥을 먹을 힘이 남아있었다. 난 집에 들어오자마자 봉지에서 김밥 두 개를 꺼내 포장을 뜯었다. 열두시간 뒤 또 시작될 아르바이트를 생각하니 밥알갱이가 더 퍼석하게 씹힌다. 점장이 CCTV를 확인하고 내가 조는 모습을 질책할 것이 불안하다. 게다가 크리스마스이브에 두 배로 몰려드는 취객들이 행패를 부리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다. 막 마트에 출근했을 엄마도 걱정이 된다. 즐거운 연말의 분위기는 각 계산대의 점원들을 두 배로 힘들게 만드는 법이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여자애가 아쉬워진다. 유일한 위안거리는 열두시간 뒤 월급이 기다린다는 점이다. 현금 90만 원이면 충분히 삼각김밥 식단을 탈피할 수 있다. 두꺼운 스테이크와 생선회가 아른거린다. 등록금 생각을 잠시 접어둘 수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다행히 점장은 CCTV를 확인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월급은 창고 서랍 안에 정확히 들어 있다. 90만 원을 잠바 안쪽주머니에 꽂아 놓으면 피로가 저절로 풀리게 하는 부적이 된다. 예상대로 무시무시한 취객의 물결이 가게 안으로 몰아쳐 왔다. 무책임하게 비워진 여자애의 자리가 다시 원망스러워진다. 여자애가 소녀가장이었다는 점장의 말은 놀라웠지만 동정심이 생기지는 않았다. 형편이 좋아서 계산대에 선 점원은 없다.
  손님의 인파도 2시 반이 지나자 시들해졌다. 언제나처럼 텅 비게 된 가게 앞에 유통업체 트럭이 멈춘다. 트럭에서 플라스틱 궤짝 두 개를 옮긴 후 한숨을 돌린다. 잠시 쓸데없는 돈 계산을 하기로 했다. 다음 1,2월의 월급으로 등록금의 반을 부담하기로 한다고 해도 오늘의 90만 원이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신용불량과 다름없는 상태인 엄마 대신 다음 달 생활비를 대야 한다. 어떻게 봐도 솟아날 구멍이 없는 계산이다. 두 사람이 오직 빚을 지기 위해 24시간을 교대로 일한 꼴이다. 한숨이 나온다. 그런 주제에 두꺼운 스테이크와 생선회를 떠올렸던 자신을 위한 한숨이다.
  나는 먹이가 담긴 궤짝으로 다가간다. 1200원짜리 김밥들이 너는 역시 내 친구라며 반긴다. 바닥에 주저앉아 김밥을 세려 하는데 갑자기 찬바람이 들어온다. 문 쪽을 보지만 아무것도 없다. 음산한 기운이다.
“혼자 일하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졸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잠겨 있다. 환청인가 해서 나는 뒤를 돌아봤다.
“나야. 뭐하고 있어?”
  여자애다. 그제야 문간에서 종소리가 들린다. 다시 찬바람이 들어온다. 나는 한참동안 여자애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것 말고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니… 무슨 일이야? 점장이 너 그만뒀다고….”
“그냥. 바쁜 날인데 혼자 일할까봐.”
“뭐라고?”
“내가 이거 도와줄게.”
  여자애는 내 옆에 주저앉아 수량 적는 종이와 펜을 자기 쪽으로 가져갔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잠시 손을 놓았다. 여자애가 반갑기보단 조금 무서웠다.
“저기… 진짜 그만둔 거 맞아? 무슨 일 있냐?”
“점장이 말 안했어? 뭐라고 했는데?”
“몰라. 난 너 그만뒀다고만 들었는데.”
“그래….”
“이제 안 나오는 거야?”
“응. 미안하게 됐어. 제일 바쁠 때.”
“아니 뭘….”
  여자애는 어울리지 않는 말투로 어울리지 않는 소리만 골라서 했다. 정말로 무서워졌다. 여자애가 돈 받고 일을 할 때에도 안 하던 분류작업이다. 그런 일을 자진해서 한다는 것 자체가 기묘한 풍경이다.
“근데 오늘 일 있어서 못 온다고 하지 않았어?”
“아, 괜찮아 이제.”
“할머니 아파서 간호해야 된다며?”
“나 말고 해줄 사람 생겼어.”
“잘됐네 뭐….”
“너 여자 친구 없다고 했지? 크리스마스 때 돈 굳어서 좋겠네.”
“좋긴. 하나도 안 좋거든.”
“내가 이거 수량 다 세고 진열할게. 너 바닥청소나 먼저 해.”
“으…응.”
“아참, 그리고 이거 갚을게… 나도 오늘 월급 받았으니까.”
  여자애는 갑자기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3장을 꺼내 내 주머니에 찔러줬다. 내가 무언가 말을 하기도 전에 여자애는 등을 돌리고 궤짝의 김밥들을 진열대에 올리기 시작했다. 작은 등이 보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 미어졌다. 처음부터 여자애의 표정은 악의보다는 절박함에 가까웠었다. 나는 쪽문을 열고 화장실로 향했다. 빨아놓지도 않은 대걸레가 벽에 기댄 채 서 있다. 수도꼭지를 돌리며 여자애의 목적을 약간은 알 것 같았다. 점장에게 잘 보여서 돌아오고 싶은 모양이겠지. 내가 잘 얘기해줬으면 하는 바람이겠지. 아르바이트 구하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었다. 점장에게 잘 얘기해줄까 하는 마음도 조금 들기 시작했다.
“너 오늘 이상하다. 점장이랑 싸웠냐?”
“내가 왜 점장이랑 싸우냐? 그냥 그만둔다고 했지.”
“그럼? 알바는 다른 데 알아볼 거야?”
“이제 제대로 된 데 찾아야지. 이런 거 계속 할 수도 없고.”
“그렇긴 하다.”
“점장한테 오늘 월급 받았어?”
“아…응.”
“얼마 나왔냐?”
“똑같이 구십만 원이지 뭐.”
“그래….”
“넌 안 받았냐?”
“받았어. 사십삼만 원 주던데.”
“뭐?”
  나는 잠시 걸레를 창고에 가져다 놓고 계산대에 섰다. 여자애는 궤짝을 밖에 내놓은 뒤 계산대로 돌아왔다. 엄청나게 차가운 바람이 들어와 화들짝 잠을 깨운다. 여자애는 내 옆 계산대에 서서 담배 진열대에 등을 기댄다. 야간반의 파트너가 된 이래로 여자애와 가장 가까운 거리다. 기묘한 오싹함이 느껴진다.
“우리 있잖아, 처음에 들어올 때 계약서 썼던 거 생각나?”
“어.”
“처음 이주치 일당은 그만둘 때 준다고 했었잖아. 근데 우리 잘못으로 그만두게 되면 안준다는 거 알아? 점장한테 들었어?”
“듣긴 들은 것 같은데. 그래서 너 이주치 까인 거야?”
“점장 씨발새끼… 내가 계약서 갖고 가서 노동청에 고발해버릴 거야.”
“…점장이 니 계약서 버렸어.”
  여자애는 잠시 나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괜히 말했나 싶기도 하다. 가만히 들리는 여자애의 한숨소리만 공기를 꽉 채운다. 여자애의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 같다. 여자애는 이럴 때 항상 엇나가 버렸었다. 아무 일이라도 일어나서 이 애의 열을 조금 식혀줬으면 했다. 크리스마스이브라는데 손님은 여자애가 들어온 뒤로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받아낼 거야. 전에 일하다 그만둔 언니도 싸워서 받았댔어. 씨발, 하필 목돈도 필요한데.”
“글쎄… 점장 성격에 줄까….”
“아이 씨… 또 아빠 병원비 밀렸는데 아이 씨…. 돈은 금방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안줄 것 같다 아마. 내 생각엔.”
“아냐. 점장새끼 물러서 좀만 따지면 금방 줘. 아, 사십만 원 정도면 딱 되는데…. 점장이 어차피 줄 돈이긴 한데.”
“그럼 점장한테 지금 전화해서 따지지 그래.”
“당장 내일 아침까지 필요해서 그래. 그거 아님 안 왔을 거야.”
“뭐라고?”
“솔직히 말할게. 돈 급해 나. 너 내 사정 알지.”
“후… 미치겠네.”
“왜….”
“니 사정 잘 아는데, 오지 말지 그랬냐.”
“야….”
  여자애에 대한 기대와 안도는 단 몇 마디 말로 무너졌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여자애는 처음 3만 원을 빌려갔을 때와 같은 방식의 거짓말을 하고 있다. 사기꾼들은 늘 돈이 급하다는 말로 동정을 유발하면서도 훗날 갚을 능력은 충분하다는 희망의 약속을 내미는 법이다. 갑작스럽게 짜증이 밀려온다. 더 큰 돈을 꿔가기 위해 푼돈을 먼저 갚아 사람을 안심시킨 여자애의 영악함에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갑자기 종소리가 들린다. 찬바람을 몰고 들어온 사람은 백발의 구부정한 할머니다. 여전히 뒤뚱거리며 한 손에는 페트병을 들고 있다. 기막힌 타이밍에, 또 시작이구나.
“아 씨발… 이봐, 할머니!”
  구부정한 등은 돌아보지도 않는다. 물을 따르는 데에만 신경이 팔려 있다. 그 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할머니는 얼굴을 찡그리며 물러선다. 문득 백발 사이로 훤한 정수리가 보인다.
“아이고, 아파. 아파. 이거 놔.”
“여기가 당신 집이야? 여기 물 맡겨놨어?”
  나는 어깨를 밀쳐냈다. 할머니는 잠시 표정을 찡그리더니 느릿느릿 페트병을 주워 나간다. 물은 전부 바닥에 엎질러져 있다. 난 곧바로 대걸레를 가지고 왔다.
“야 적당히 좀 해. 그런다고 점장이 월급 더 주냐?”
  내가 할머니를 쫓아낸 뒤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애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 내가 자신의 거짓말에 반쯤 넘어갔으리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계산대 쪽에서 들려온 그 목소리가 내 정신줄을 끊었다. 난 바로 대걸레를 바닥에 팽개치고 계산대로 돌아왔다. 여자애는 주춤하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야…  왜 그래.”
“지금 장난 하냐? 너 때문에 나 혼자 일 다 하고 있는데 지금?”
“내가 뭘….”
“왜 왔냐 너? 월급날인거 알고 왔지?”
“…….”
“점장한테도 돈 꿔달라고 했다가 짤린 거라며? 솔직히 말해. 또 돈 꿔달라고 온 거지? 또 아빠 병원비냐?”
“아니야… 그런 거.”
“이번엔 한 사십만 원 빌려달라고? 점장한테 받으면 갚겠다고 하려고?”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야. 솔직히 말할까? 너 그러는 거 진짜 거지같아.”
“야, 그만해.”
“씨발 너나 그만해!”
  처음 아르바이트를 잡았을 때에만 해도 덥석 빌려줬을 것이다. 그리고 내 고생의 반을 여자애는 아무 대가 없이 가져갔을 것이다. 나는 다시 쓸데없는 돈 계산을 시작했다. 그리고 내 등록금을 자꾸만 멀어지게 만드는 악마들을 떠올렸다. 그 중심에는 눈만 뜨면 내 몫을 앗아가려는 이 아비규환의 일터가 있었다. 한 푼이 아쉬운 사람들, 그래서 더 악랄하게 남의 것을 탐내는 작자들. 여자애에게 화가 나는 것은 내 몫을 탐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얕은 수에 넘어올 정도의 바보로 여겼다는 것이다. 나는 주머니에서 방금 받은 더러운 3만 원을 다시 꺼내 구겼다.
“이거 갖고 나가. 갚을 필요도 없어.”
“내가 언제 이거 다시 달랬어?”
“불쌍해서 적선해주는 거야. 그리고 앞으로 여기 나타나지 마.”
  여자애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던진 만 원짜리 3장이 여자애의 몸에 맞아 바닥을 굴렀다. 안 그래도 긴 앞머리와 옆머리가 표정을 안 보이게 했다. 난 여자애의 어깨를 잡고 계산대 밖으로 밀쳤다. 더 크게 들려오는 여자애의 한숨소리만이 이 무거운 공기를 채운다. 여자애는 어깨를 들썩인다. 머리카락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양쪽 뺨에 물방울이 맺힌 것이 힐끗 보인다.
“누가 너한테 빌린댔어? 이 개새끼야….”
“…….”
“너 같은 새끼가 뭘 알아….”
  여자애는 갑자기 주머니로 손을 옮겼다. 그 안에서 여자애는 무언가를 꽉 움켜쥐었다. 여자애의 손끝에 칼날이 보인다. 여자애는 칼을 내 쪽으로 향하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충혈 되어 있다.
“점장한테 받으러 왔다고… 내 월급 받으러 왔다고 개새끼야…. 내가 일한 돈이야.”
“너, 너 뭐야… 갑자기….”
“같이 뒈지고 싶어? 사십만 원 꺼내 빨리….”
  난 여자애를 봤다. 손끝이 떨리고 있다. 손끝은 당황하여 가만히 있는 나를 자꾸만 보챈다. 여자애의 눈물은 뺨을 지나 턱에 맺힌다.
“야 진정해… 이거 강도질인거 아냐? 너 진짜 큰일 나.”
“더 큰일 날 것도 없어. 닥치고 내놔.”
“씨… 점장이 괜히 안 줬겠냐? 나 같아도 안 주겠다….”
“내 돈 내놓으라고!”
  난 천천히 계산대의 돈통을 열었다. 여자애의 칼끝이 잠시 밑으로 향했다. 칼끝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난 재빨리 여자애의 손목을 잡았다. 여자애는 급히 손을 빼냈다. 그 바람에 칼날이 손바닥을 베고 지나갔다. 여자애가 몸을 움츠린다. 난 곧바로 주먹을 뻗어 여자애의 얼굴을 쳤다. 계산대 밖으로 튀어나간 나는 여자애가 다시 칼을 겨누기 전에 그 애의 얼굴을 또 때렸다. 여자애가 쓰러지며 칼이 바닥을 미끄러진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여자애는 숨을 몰아쉬며 이상한 소리를 낸다. 울음과 신음이 뒤섞인 소리다. 난 칼을 주워 계산대에 올렸다. 손이 데인 듯 아파온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난 계산대 앞에 주저앉았다. 여자애는 울먹이며 곤도라에 몸을 기대앉는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눈을 훔치는 여자애의 손 사이로 터져서 피가 흐르는 입술만이 보인다. 그와 동시에, 벌써 35일은 연속으로 입고 나온 것 같은 저 흰 털잠바가 이제야 보인다. 회색으로 변한 후드의 깃털이 들썩이는 어깨에 맞춰 흔들리며, 전부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든다.
“후 …괜찮냐 너?”
“…….”
“점장 오기 전에 빨리 가. 진짜 큰일 나기 싫으면.”
  흉기를 든 네가 잘못이고, 정당방위였다는 말이 혀끝을 맴돌다 이내 사라진다. 칼은 꺼내든 순간부터 떨리고 있었다. 한두 마디 협박만으로도 그 무딘 과도는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 여자애는 한동안 아무 원망도, 변명도 없다. 끝까지 뻔뻔스러울 줄 알았던 여자애가 너무나 손쉽게 무너져 내린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온다.
“야. 괜찮냐고?”
“꺼져 개새끼야….”
  여자애는 한숨소리, 울음소리, 중얼거리는 욕지거리가 뒤섞인 쇳소리를 낸다. 한바탕 난리를 치느라 판매대에서 어지럽게 쏟아진 빨대들이 보인다. 주워 담을 힘이 나지 않았다. 여자애도 간신히 버텨왔을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어지러워 고개를 숙였다. 편의점의 하얀 바닥에 점점 멀어진다.
“그러길래 왜 칼을 꺼내 갑자기… 나도 놀랬잖아.”
  나는 고개를 들어 대답 없는 여자애를 보았다. 여자애의 작은 어깨가 곤도라에 건어물들과 함께 매달려 있었다. 초라하게. 등록금을 점점 멀어지게 만든 건 여자애가 아니었다. 주저앉은 여자애에게는 그럴 힘이 없다. 그것은 뜨거운 물을 담아가는 할머니도 아니었다. 두꺼운 스테이크와 생선회는 더더욱 아니었다. 계산대에서 목격한 두 번의 눈물이 나를 다시 멍청이로 만들었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계집애. 나는 여자애가 빨리 거짓말이라도 꾸며 말하길 바랐다. 왜 우리가 야밤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지, 왜 가뜩이나 더러운 잠바가 더럽혀졌는지 그 거짓말로 대답을 주기를.
“너… 왜 칼까지 들고 왔냐? 그렇게 급한 거야? 말해봐.”
“…….”
“응? 말해봐.”
“너… 여기 물 받으러오는 노인네들 쫓아냈지? 우리 할머니도… 그거 했었어. 건물 청소부….”
“그래서…?”
“그러다 지난주에 짤리고 이제 폐지 줍는 거밖에 못해. 그러다 배가 고파서 그런 건지… 미친 노인네가 마트에서 먹을 거 훔치다가 걸렸어….”
“그래서….”
“우리 할머니 그것 때문에 경찰서까지 가고… 폭행으로 합의 봐야 된대. 씨발 근데… 딱 구십만 원이면 되는데….”
  여자애는 더 이상 말이 없다. 하지만 그것으로 왠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거짓말은 지금가지 여자애가 지어낸 거짓말 중 가장 그럴싸한 이야기였으니까. 이상하게 현실감이 있는 그 거짓말이 가슴 한쪽구석을 때리고 지나간다. 나는 다시 돈 계산을 시작했다. 다음 1, 2월을 열심히 번다면 등록금의 반은 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언제나 그랬듯이 등록금은 어떻게든 마련될 것이다. 그 쓸데없는 계산만이 날 움직일 수 있다.
“그렇게 필요하냐…. 없으면 안 되는 거지….”
“…….”
“진짜 사십만 원만 더 있으면 되냐?”
“뭐…?”
 난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창고로 향했다. 창고 문은 멀어진 등록금만큼 자꾸만 자꾸만 멀어진다.
“이제부터 검수작업 들어갈 거야. 컴퓨터 건드리다… 씨씨티브이가 실수로 꺼질 것 같아. 나머진 책임 못 져. 점장 오기 전에 알아서 해.”
“뭐? 진짜 한다?”
“…….”
“점장이 니 월급에서 까도 몰라. 니 돈 안 갚는다. 이제.”
  여자애의 목소리가 뒤에서 희미하게 들린다. 간신히 창고에 도착해 절대로 내려선 안 될 컴퓨터의 전원을 내렸다. 계산대를 비춰주던 화면이 사라진다. 파일채로 사라질 것이다. 다시 복원시키기 전에는 어젯밤 그 애와 내 모습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어느새 밖에선 여자애가 계산대의 돈통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점장에겐 뭐라고 말해야 할까. 점장이 경찰에 신고한다면 결국 모든 게 밝혀지겠지. 여자애에게는 그렇게도 필요한 돈이었을까. 나는 지난밤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이제 전부 다 끝이다. 다시, 졸음이 쏟아진다.
“야! 일어나! 너 아주 창고에 숨어서 자냐 이제?”
  고개를 들자 점장이 보인다. 점장은 내 어깨를 세게 붙잡고 있다. 어느새 창밖이 밝아 있다. 남은 일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똑같은 거짓말에 또 넘어간 멍청이가 이 크리스마스 아침을 끝장냈다는 생각만 든다.
“점장님. 오늘 돈이 좀 빌 거예요. 내가 자느라….”
“뭐라고?”
“후… 뭔 일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월급에서 까세요. 난 몰라요.”
“뭔 소리야 너? 오늘은 돈 남던데 좀.”
“네…?”
  난 창고에서 튀어나와 계산대의 돈통을 열었다. 그리고 안을 봤다. 그 안에는, 완전히 구겨져서 바닥을 뒹굴던 만 원짜리 3장이 다른 지폐들 위에 얌전히 놓여 있다. 나는 점장을 봤다. 점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표정으로 계산대 앞에서 십자가가 그려진 하드보드지를 떼고 있다. 하드보드지는 쓰레기통에 처박힌다. 온 누리에 축복을. 지폐의 구겨진 주름을 펴며 이상한 기분이 든다.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 마냥 3만 원이 돌아와 있다. 사라진 건 여자애뿐이다. 기묘한 꿈을 꾼 것처럼 여자애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 애가 기대어 울던 곤도라만이 아직도 비뚤어져 있다. 여자애는 이미 속을 준비가 다 된 나에게서 3만 원의 빚조차 가지고 사라져버렸다. 안 갚을 거라더니. 계집애는 끝까지 거짓말이다.
 

 

 

 

 

소설 부문 당선자 경민선 인터뷰 "결국은 인간적일 수밖에 없다"

 

 

 

 

 

 -시나리오에서 출발한 작품이라고 들었다. 
“원래 중앙대 영화학과에 다니며 시나리오를 쓰고프리랜서처럼 일을 했었어요. 시나리오를 쓸 땐 제작될 가능성이 있는 글을 써야 했기 때문에 쓰고 싶은 이야기를 못 쓰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다른 종류의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나리오는 항상 다 써도 미완이라는 콤플렉스가 남아있었거든요. 영화로 제작되어야만 완성된다고 생각해 제작되지 못하면 회의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어요. 이 소설도 원래 단편 영화 시나리오였는데 제작되지 못했던 작품이에요.”


-평소 어떤 글을 지향하는가. 
“주제가 전면에 드러나는 교조적인 태도는 지양하는 편이에요. 사회 참여적인 독립영화 중 교조적인 작품이 많은데 결국 그런 영화들의 주제의식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래서 시나리오 쓸 때도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해요. 그렇게 하면 주제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주제가 드러나거든요.” 


-‘난쟁이 연작’의 조세희 작가를 등대로 삼는다고 들었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나. 
“조세희 작가의 작품이 지닌 ‘주제의식’에 매료됐어요. 그의 작품은 인간적인 주제의식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표현방식에 있어서는 건조하고 날카롭거든요. 그 카리스마를 굉장히 닮고 싶어요.”
-편의점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돋보인다. 이 작품이 자신의 이야기라고 했는데 경험에서 착안한 건가. 
“친구가 편의점에서 일할 때 페트병에 뜨거운 물을 받아가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점장이 내쫓았다는 얘기를 해줬어요. 보통 아르바이트할 때 대걸레를 빠는 곳엔 찬물만 나오는데 뜨거운 물과 섞어 쓰면 좋아요. 그래서 그런 용도로 받아가려고 하지 않았을까 상상해서 만든 캐릭터에요.”


-결말에서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인가. 
“줄곧 주인공은 지영에게 다신 속지 않겠다는 방어막을 쳤고, 지영은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방어기제로 거짓말을 해왔어요. 결말은 서로의 방어막이 깨지는 것을 의미해요. 힘든 현실에 내몰려 방어적이고 냉혹하게 살아야 한다고 해도 결국은 인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요.”

 

소설부문 심사평 "망설임 없이 택했다"

 

 

정지아 교수 (공연영상창작학부 문예창작전공)

 

  세상은 언제나 변한다. 당연한 진리다. 이번 응모작들은 그 당연한 진리를 다시금 되새기게 해주었다. 90년대 이후 사망선고를 받은 것과 진배없던 문학의 장에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게 아닐까, 작은 희망을 품어본다. 이번 응모작들은 시간에 관한 존재론적인 고찰을 담은 작품에서부터 당대의 암울한 현실을 다룬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 주제와 소재가 다양하다는 점이 특징적이었다. 젊은 학생들의 인식의 층위가 다양해지고 있다는 긍정적 신호일 것이다.

  마지막까지 경합한 것은 세 작품이었다. 진준한의 「이층의 악마」는 악마와의 동거를 다룬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소설의 악마는 인간의 영혼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인간을 파괴하지도 않는다. 용서를 잊게 할 뿐이라는, 악마에 대한 정의가 독특할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제법 깊이 있는 인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동거의 과정에서 악마에게 애정을 느껴가는, 혼자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의 상징과도 같은 주인공의 외로움 역시 꽤 설득력이 있었다. 문체 또한 참신했다. 다만 악마의 능력을 시험하는 소설의 전반부가 그 의미에 비해 너무 장황한 것이 흠이었다. 장편으로 개작해볼 것을 권한다.

  김민영의 「시간의 왼쪽」은 기억되지 못한 채 사라져버린 시간에 관한 소설이다. 시간을 지배하고자 하나 결국 시간을 소비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다시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진지한 작품이었으나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한 할아버지가 중반 이후 사라져버린 것, 할아버지가 말한 시간의 의미와 주제가 정교하게 맞물리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경민선의 「27시」는 편의점 알바의 일상을 통해 그 작은 공간에서조차 계급이 존재하는 불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하는 주인공은 알바가 아니면 대학조차 다닐 수 없는 처지면서도 다른 알바생이나 편의점에 공짜 온수를 받으러 오는 늙은 청소부마저 자본의 논리로 대한다. 작은 연민조차 품을 수 없는 각박한 현실 탓이다. 그러나 거짓말쟁이로 생각했던 여자 알바생의 마지막 거짓말은 영혼까지 시급 4천인 인생일지라도 인간이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한다. 일상적인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시치미를 떼는 천연덕스러운 솜씨가 돋보였고, 편의점이라는 작은 공간까지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를 몇몇 인물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치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안정적인 구성과 경쾌한 문장까지, 망설임 없이 당선작으로 선택하게 했다. 문학의 길을 포기하지 말고 정진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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